손영문 문화재청 전문위원 특별강연
불상 겉모습 아닌 그 속에 담긴 시대정신 이해해야

지난 6월12일 손영문 문화재청 전문위원이 ‘조선후기 조각승 인균’을 주제로 강연했다. 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지난 6월12일 손영문 문화재청 전문위원이 ‘조선후기 조각승 인균’을 주제로 강연했다. 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불교중앙박물관(관장 송하스님)은 지난 528일부터 612일까지 3차례에 걸쳐 나들이 나온 나한테마전과 연계한 불교문화강좌를 실시했다. 3번째 강연의 강사로 나선 손영문 문화재청 전문위원은 지난 6월12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조선 후기 조각승 인균을 주제로 강의했다.

손영문 위원은 “17세기는 전란으로 폐허가 된 사찰을 복구하는데 사부대중 모두가 힘을 모음으로써 불교조각과 미술에 있어 르네상스 시대를 이뤘다면서 특히 인균스님은 전반적으로 응원스님의 양식적 특징을 계승하고 있지만, 얼굴 표면에서는 독창성이 돋보이는 등 17세기 전반기를 대표하는 조각승이라고 강조했다.

전란 후 폐허된 사찰 복구 진력

임진왜란 이후 불상 조성은 승려 조각승에 의해 집단적으로 이뤄졌다. 조선 전기 불사의 후원 주체가 특정세력, 즉 왕실과 권력을 가진 중앙과 지방의 유력자들의 발원에 의해 이뤄졌다면, 조선 후기는 평범한 민중과 스님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물론 불사의 규모는 대작불사였고, 범위는 전국 주요 사찰이 모두 포함됐다. 이는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교 전래 이후 이룬 대부분의 불사의 성과들이 흔적 없이 사라졌고 사찰은 폐허가 됐기 때문이다. 전란의 화마를 비켜갔던 일부 사찰도 시대의 궤적을 같이 돌며 살림살이도 녹록치 않았던 때다.

전란 후 조각승들의 소명은 폐허가 된 사찰의 복구와 소실된 예배존상을 다시 조성하는 것이었다. 불사에는 고승대덕이 선두에서 팔을 걷어붙였고, 여력이 있는 스님들도 자발적인 시주자가 됐다. 조각승들도 불상 제작 뿐만 아니라 동료 조각승의 불상 제작에 시주자로 적극 동참해 불사를 도왔다.

일반신도들도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간절한 소망과 사연을 담아 발원자가 되고, 크고 작은 시주를 통해 불상 제작을 지원했다. 오늘날 우리가 단편적인 기록과 불상의 겉모습만 보고 불상이 갖고 있는 종교성과 예술성 등을 판단하지만, 그 속에 담긴 눈물과 아픔을 극복하기 위한 시대배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본다면 하나하나가 정말 거룩하고 위대한 불사였음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사부대중 모두가 불사 동참

조각승들은 저마다의 솜씨와 개성을 발휘하며 불상을 만들었다. 불상 제작은 주로 집단을 이루며 공동작업으로 진행됐다. 교계에서 덕망 높은 대덕 스님이 증명법사로 참여했으며 시주는 남녀, 승속, 귀천 구분 없이 사부대중이 동참했다. 조각승들은 서로 교유하며 불교조각과 관련한 정보를 교환하고 조직적 역량도 강화했다.

불상 제작은 조각승 한 명이 모든 제작과정을 담당한 것이 아니라 전문분야별로 분업화돼 있었다. 이러한 전통은 1458년 효령대군 등 왕실에서 발원해 제작한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통해 화원(畵員), 부금(付金), 금박(金箔), 칠금(漆金), 각수(刻手), 마조(磨造), 소목(小木) 등 조각가의 역할이 나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1612년 제작된 함양 상련대 목조관음보살좌상과 함양 법인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에는 상원(上員), 조상주(造像主), 차원(次員), 교습(敎習) 등으로 역할이 나눠져 있으며 , 1655년 제작된 법인사 목조아미타불상에는 화원(畵員), 조성(造成), 화불(畵佛) 등으로 분업화돼 불상이 제작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7세기 불교는 승려 장인의 시대

17세기대 조선불교는 승려 장인들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기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인해 전 국토가 피폐해진 시대로, 불교 또한 전란의 소용돌이의 중심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 피해도 막대했다.

따라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고 돌아온 새로운 시대인 17세기는 불교계 입장에서도 재건의 시대이자 앞서 국가 정책적으로 핍박 받고 탄압 받았음에도 구국의 일념으로 목숨을 바친 의승장들의 활약으로 인해 새로운 부흥기, 전환기를 맞이하는 시대였다. 조선 후기는 불교조각과 미술에 있어서 르네상스시대였다.

그 중에서도 부휴 선수스님과 청허 휴정스님의 문도들 가운데 건축과 조각에 재능이 있는 스님들이 스님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이 분야에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이 시기에 활약한 스님들은 수백명에 이른다. 대표적인 조각승은 각민, 원오, 현진, 응원, 수연, 청헌, 청허, 무염, 승일스님 등이며 인균스님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17세기 초중반 활약한 조각승 인균스님

조각승 인균(印均)스님의 생몰연대와 활동시기를 밝히는 것은 일대기를 기록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 한 정확하게 밝히는 것은 어렵다. 인균스님이 한국불교 조각사상 처음으로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1613년 조성된 무안 목우암 아미타여래좌상의 밑바닥에 기록된 묵서명에서다.

조성연대와 불상제작에 참여한 인원이 기록돼 있는데 인균스님은 6번째 조각승으로 등장하고 있다. 불상 제작 당시 나이를 10대 후반 또는 20대 초반으로 본다면 인균스님은 적어도 1690년대에 태어났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추측할 수 있다. 1610년대에는 당대 최고의 조각승인 태전(太顚)스님 아래에서 향후 개성 넘치는 작품활동을 펼치기 위한 기반을 다졌다.

1620년대 대조각승 응원스님의 보조화원으로 참여해 응원스님의 핵심적인 조각승으로 성장하는 등 수조각승(首彫刻僧)으로 향한 발걸음을 걸었다. 인균스님은 1630년대부터 1660년대까지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하며 유파를 형성했다. 특히 인균스님은 1633년 김제 귀신사 나한전 불상을 최초로 자신의 후학들을 이끌고 제작했다. 이 불상은 인균스님은 12명의 보조 조각승과 함께 불상 조성에 참여하고 있는데 스님의 독특한 조각풍이 잘 나타나고 있다.

인균스님은 1660대까지 약 30년동안 활발한 조각활동을 펼친 17세기 전반의 대표적인 조각승이다. 백운사 대웅전 아미타여래좌상(1643), 흥국사 무사전 지장시왕상 및 권속(1648), 흥국사 응진당 석가삼세불 및 16나한상(1655), 학소암 자음전 약사여래좌상(1662) 등을 수화승(首畵僧)으로 참여해 불상을 조성했다.

인균스님 전라도 승군 총섭도 맡아

특히 그의 작품이 남아 있는 여수 흥국사, 구례 화엄사, 순천 송광사, 김제 귀신사 등은 임진왜란 당시 승군(僧軍)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사찰이다. 송광사 사천왕상 중수 때 인균스님은 오위(五衛)의 정6품에 해당하는 사과(司果)라는 군직을 역임했으며 국일도대선사벽암비에는 총섭을 맡았다고 전해진다.

이를 통해 그는 벽암각성스님이 이끄는 승군에 속해 있는 조각승이자 벽암각성의 문도로 여겨진다. 특히 인균스님의 작품이 전국적이지 못하고 주로 전라도 남부지역(전남 여수 흥국사, 순천 송광사, 구례 화엄사, 전북 김제 귀신사 등)에 한정돼 나타나는 점도 스님이 전라도 승군 직제에 편승돼 있었음을 말해준다.

큼직한 돌출코 등 독창적 작품

인균스님의 불상은 전반적으로 응원스님의 양식적 특징을 계승하고 있지만, 얼굴 표면에서는 독창성이 돋보인다. 특히 그의 전반기(1620~40) 조각에서는 부푼 눈두덩, 늘어진 군살 턱, 큼직한 돌출코, 두툼한 입술과 묵중한 신체 표현으로 인해 중후한 형태미를 연출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후반기(1640~60) 조각에서는 얼굴의 윤곽이 정제되고, 신체표현도 전반기의 중후함에서 다소 후퇴해 단정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정리돼 가고 있다.

그의 작품 대다수가 <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는 수기형식 조각을 많이 조각했다. 특히 16나한상은 도상규범이 자유로워 작가의 능력과 개성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작품이지만, 작가의 도상해석 능력이나 조각기술이 부족하면 완전한 조각으로 승화시키기 어려운 작품이다. 그는 표현하기 어려운 16나한상 역시 능숙한 조각솜씨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상당한 조각역량을 갖춘 17세기 대표적인 조각가였다. 그의 작풍은 삼인, 야육, 색난스님 등으로 계승되고 있다
 

손영문 전문위원의 강의를 듣는 불자들 모습.
손영문 전문위원의 강의를 듣는 불자들 모습.

■ 손영문 위원은…
동국대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한 뒤 동국대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고려대 문화재학협동과정 미술사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불교미술문화재연구소 연구원을 시작으로 조계종 문화유산발굴조사단 선임연구원,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경기도박물관 유물감정 평가위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상근전문위원과 문화재위원회 동산문화재분과 전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조각승 인균파 불상조각의 연구’ ‘조각승 응혜파 불상조각의 연구’ ‘고려시대 용화수인 미륵도상의 연구’ ‘조선 후기 아미타여래삼존 불감과 아미타여래칠존 불감 고찰’ ‘해인사 법보전 및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의 연구등이 있다. 또한 <문화재대관 보물-불교조각> ·권 등을 공동집필했다.

정리=박인탁 기자 parkintak@ibulgyo.com
사진=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불교신문3498호/2019년6월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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