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선불교 중흥조…현대 조계종사 주역

“중이 수행하지 않고 죽으면
콧구멍 없는 소가 된다”는
말끝에 홀연히 ‘법안’ 열려
‘무비공’ 유명한 화두 전해
오도 후 해인사 정혜결사
통도사 범어사 송광사 등
선원 개설 ‘수행풍토 조성’
출세간 ‘경허선사참선곡’
인간미 넘치는 ‘경허집’
수행자라면 누구나 애송

경허선사가 정각 후 보림하며 머물던 서산 천장암의 방사.
경허선사가 정각 후 보림하며 머물던 서산 천장암의 방사.

“천만고(千萬古)의 영웅호걸 북망산의 무덤이요, 부귀문장 쓸데없다 황천객을 면할쏘냐? 오호라 나의 몸이 풀끝의 이슬이요, 바람 속의 등불이라.” 

위 내용은 ‘경허선사 참선곡’의 첫머리에 등장한다. 사찰 불교대학에서 선학 강의를 할 때면, 불자들과 참선곡을 함께 독송한다. 서산 휴정의 선시에도 “만국의 도성은 개미집과 같고 천하의 수많은 호걸들도 하루살이 같도다”라고 했다. ‘우리 삶에서 진정으로 가치있는 삶이 무엇인가?’를 사유토록 해준다. 인간에게 재물과 명예가 아닌 무엇인가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대목이다. 

불교는 수행의 종교로, 존재의식을 자각하고, 삶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궁구하게 하며, 진정한 행복의 길(離苦得樂)을 제시한다. 불조의 진리가 넘쳐나건만 우리는 왜 그렇게 번뇌의 구렁에서 헤어나지 못할까?

견줄 이 없는 위대한 선지식! 

19~20세기 중반, 중국의 선(禪)을 개혁한 선사가 허운(虛雲, 1840~1959)이다. 대만이나 해외에 체류하는 중국 선사들이 대부분 허운의 법맥이다. 허운이 아니었다면, 현 중국의 선은 존재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필자는 이 허운과 비교해 우리나라 선사로 늘 경허선사를 말한다. 곧 경허가 없었다면, 현 한국의 선이 제대로 존립했을까? 의문이 들 정도이다. 수십여 년 전부터 근자에 이르기까지 기행(奇行)으로 인해 그에 대해 평가가 분분하지만, 여기서는 근현대의 한국선을 개척한 선지식 측면에서 경허를 만나보자. 

경허 성우(鏡虛惺牛, 1849~1912)는 1849년 전주 출생으로, 법호는 경허, 법명은 성우(惺牛)다. 9세 때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경기도 과천 청계산으로 출가했다. 계허에게 득도해 5년을 보내고, 13세에 한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어서 14세에 스승 계허가 경허를 동학사 만화 강백에게 소개해 경전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872년 23세에 경허는 동학사에서 강사가 되어 경전을 강의했다.

31세 되던 해, 속세로 돌아간 옛 은사를 찾아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한 밤중에 비가 퍼붓자, 하룻밤 묵고자 마을에 찾아들었다. 마침 어느 집 추녀 밑에 서 있다가 노크를 하며 하룻밤 재워 달라고 소리치자, 그 집 주인이 대문을 열고 말했다. “지금 이 동네 근방에 전염병이 돌아 사람이 계속 죽어나가는데, 스님께서도 빨리 도망가십시오.”

선사는 전염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들을 목도하고 무상감을 느꼈다. 사찰로 돌아오면서 죽음이라는 단어에 두려움을 느끼는 자신에 깊은 회의감에 빠졌다. 선사는 동학사로 돌아와 ‘앞으로 강의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학인들을 흩어 보냈다. 다음날부터 골방에 들어가 정각을 이루지 못하면, 일어나지 않겠다는 각오로 장좌불와를 하며 턱밑에 송곳을 대놓고 용맹정진에 들었다. 경허는 영운 지근(?~866)의 ‘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驢事 未去馬事到來)’라는 화두를 잡고 참선을 시작했다.

이 무렵 선사의 정진을 시봉하는 사미가 동학사 아래 마을 사는 이처사와 대화를 하는 중에 의문이 있는 채로 절에 돌아왔다. 사미는 경허에게 “중이 수행하지 않고 죽으면, 콧구멍 없는 소가 된다”는 말을 하자, 선사는 그 말끝에 홀연히 법안이 열렸다. 이때 경허는 다음 오도송을 읊었다. “문득 무비공이란 말을 듣는 순간에 삼천세계가 내 집임을 몰록 깨우쳤네. 6월이라 연암산 내려오는 야인이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네.”

여기서 무비공(無鼻孔)이라는 말이 유명한 화두가 되었다. 

1880년 31세에 경허는 용암(龍巖)의 법통을 이었으며, 서산 휴정의 11대손, 환성 지안의 7대손이라 스스로 밝혔다(지금 법맥도는 이 기준을 따름). 그런데 이렇게 법통을 거론하지만, 경허는 무사독오(無師獨悟)한 셈이다. 선사는 서산 천장암으로 옮겨가 보림을 했다. <경허집>에 의하면, 선사의 보림 과정을 이렇게 전한다.

“한 벌 누더기 옷으로 추운 겨울이나 찌는 여름에도 갈아입지 않았다. 옷 속에는 빈대와 이가 득실거렸는데, 스님의 온몸은 이와 빈대에 의해 헐어있을 정도였다. 혹 누워 있을 때, 구렁이가 배에 기어다녀도 태연했고, 구렁이가 어깨와 등을 타고 기어다녀도 마음에 조금도 동하지 않았다.”

선사가 이곳에 머물 때, 1884년 수월(水月)이 왔고, 한 달 후 14살의 어린동자 만공이 왔으며, 비슷한 시기에 혜월(慧月)이 입문했다. 이들은 모두 선사의 제자들인데 ‘세 달(三月)’이라고 불린다(수월은 상현달, 혜월은 하현달, 만공은 보름달). 선사는 충남 일대 개심사와 부석사를 왕래하면서 선풍을 드날렸다. 이후 20여 년 간 도처 곳곳 사찰에서 선풍을 떨치며 제자들을 지도했다.

1898년 50세에 범어사에 최초의 선원을 개설했다. 다음 해에 해인사로 옮겨갔는데, 대장경 인출 불사와 수선사(修禪社)를 설치하는 불사에 법주(法主)로 추대됐다. 이밖에 경허는 해인사에서 결사문을 작성한다. 그 다음해에는 조계산 송광사에 머물다 실상사 백장암 중수문을 작성했다. 이렇게 선사는 영호남을 오가며 선풍을 전개하는 중, 54세에 범어사에서 <선문촬요(禪門撮要)>를 편찬한다. 

1904년 56세 되는 해에 경허는 천장암으로 돌아온다. 선사는 천장암에서 염불승 무용(無用)을 만나 ‘참선곡’과 ‘중노릇 잘 하는 법’을 가사문학으로 만들었다. 다음 해 57세에 광릉 봉선사 월초스님을 만나고, 오대산 금강산을 거쳐 안변 석왕사에서 오백나한 개분불사 증명법사로서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자취를 감췄다.

경허는 삼수갑산에서 박난주라고 개명하고 서당 훈장을 하다가 1912년 4월, 64세에 갑산 웅이방 도하동에서 입적했다. 1913년 만공과 혜월이 갑산으로 가서 스승의 시신을 꺼내어 다비했다. 선사는 집착 없는 자재함으로 참 자유를 즐기다 헌옷을 버리고 새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해탈 언덕으로 건너갔다. 
 

2012년 건립한 열반 100주년 기념탑.
2012년 건립한 열반 100주년 기념탑.

경허의 선시 

<경허집>에 실린 경허의 몇 선시를 만나보자. 먼저 ‘막론시비(莫論是非)’인데, 승속을 막론하고, 많은 이들이 애송하는 시구이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 모두가 꿈속의 일이로다. 북망산 아래 누가 너고, 누가 나이더냐(誰是孰非 夢中之事 北邙山下 誰爾誰我).”

“살 때는 온몸으로 살고 죽을 때는 온몸으로 죽어라. 높이 서려면 산꼭대기에 서고, 깊이 가려면 바다 밑으로 가라.” “고요히 고향생각 떠오르네. 세상만사 뜬구름과 같거니, 실다운 것이 무엇이랴! 백년을 두고 흐르는 물과 같이 뜨내기 인생인 것을 억지로 만나기 힘들어 오늘도 늦었고 무단히 이별한지 몇 해나 되었던가? 백발도 슬프거니 이별 또한 어이하리! 그대 가고 나면 나 혼자 여기에서 어찌 견딜 것인가?”

위의 시는 경허 선사가 도반인 청암사의 만우당 선사와 함께 있다가 헤어지면서 남긴 이별시이다. 선사는 제자 한암에게도 이렇게 표현했다. “덧없는 인생은 늙기 쉽고 좋은 인연은 다시 만나기 어려운데, 이별의 섭섭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으랴… 진실로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과연 한암이 아니면, 내가 누구와 더불어 지음(知音)이 되랴!” 이별시에 경허의 인간적인 풍모가 스며온다. 승려는 깨달음과 관련된 선시를 남기는 것이 여법하다고 하겠지만, 인간 본연의 모습인 감정에 애틋함이 전해온다. 

경허의 한국선사상적 위치 

경허는 평생 무사한(無事漢)이 되어 걸림 없는 언행으로 입적할 때까지 무애자재한 수행자였다. 일반적으로 한 인물에 대해 평가가 상이하지만, 의도적으로 경허를 폄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 점에 있어서 글쎄? 적어도 경허와 같은 오도(悟道) 경지가 아니라면, 부정적으로 매도하거나 학문에 입각한 평가는 자제해야한다고 본다. 경허의 한국선사상적 위치를 보자. 

첫째, 경허는 결사정신에 의한 수행풍토를 정립시킨 근현대의 중흥조이다. 선사는 보조 지눌, 서산 휴정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한국선의 등불같은 존재이다. 1899년 경허는 오도 후에 해인사에서 정혜결사를 시작으로 통도사, 범어사, 송광사 등 여러 곳에 선원을 개설해 수행풍토를 조성했다. 이 결사를 통해 한국선의 정체성을 확립시켰다고 본다. 한편 선사의 결사 특징의 하나는 정혜를 닦는 가운데서도 현실적인 구원사상이 있었다. 곧 근기가 미치지 못한 중생들에게 미륵사상을 도입함으로서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어 방편을 허용했다. 

둘째, 경허의 선은 화두 참구의 간화선이다. 경허가 제자 만공에게 무자(無字) 화두를 주면서, “무문관을 통하여 다시 깨닫도록 하여라. 반드시 원돈문(圓頓門)을 짓지 말고 경절문(徑截門)을 다시 지어보도록 하여라”라며, 간화선의 직절을 강조했다. <경허선사참선곡>에 의하면 “나의 마음 어떻게 생겼는고? 의심하고 의심하되 고양이가 쥐 잡듯이 주린 사람 밥 찾듯이 목마른데 물 찾듯이 육칠십 늙은 과부 외자식을 잃은 후에 자식생각 간절하듯 생각생각 잊지 말고 깊이 궁구하여 가되 일념만년 되게 하여 폐침망찬할지경에 대오하기 가깝도다”라고 했는데, 간화선의 대의정(大疑情)이 거듭 강조되어 있다. 

셋째, 경허는 근현대 한국선의 선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바로 현 한국선의 근원지이다. 수덕사의 만공·수월, 부산 선암사 혜월, 오대산의 한암 등이 경허선풍을 전개했다. 곧 현재의 선풍은 경허선이라고 볼 수 있으며, 현대 조계종사의 주역이다. 

[불교신문3497호/2019년6월2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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