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담속찬’에서는 이 말을
‘一夜之宿長城或築’이라 쓰고
비록 잠시라도 마땅히
대비치 않으면 안 된다 풀이한다
남녀 사이 인연을 강조하고
스쳐지나가는 만남조차도
소홀하지 말라는 뜻과
사뭇 다른데 왜 그럴까…

고운기

서울의 월드컵경기장에서 한강을 건너가는 다리는 10년 째 짓고 있다. 일명 월드컵대교, 본디 5년 전이면 끝날 공사였는데, 예산 부족과 설계오류로 공사기간이 5년 늘어났다. 가끔 현장을 지날 때마다 한숨이 나온다. 체증도 체증이지만 완공이 늦어진 만큼 공사비는 눈덩이처럼 불었다. 

문득 일야작교(一夜作橋), 다리 하나를 하룻밤에 지었다는 <삼국유사>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이야기는 신라 진평왕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형은 혼령인 아버지 진지왕과 사람인 어머니 도화 사이에서 태어났다. 실은 생전 진지왕이 여염집 여인인 도화를 좋아하다 죽었는데, 혼령으로 찾아와 도화의 집에서 일주일을 머물고, 이로 인해 태기가 있어 도화가 비형을 낳은 것이다. 그러니까 비형은 혼령과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셈이다.

다음 왕인 진평왕은 진지왕의 조카이고, 그러므로 따지자면 비형과는 사촌형제이다. 진평왕이 비형의 능력을 인정하여 집사에 임명하는데, 일이 끝나 밤이 되면 비형은 경주의 귀신이 모여 노는 황천으로 달려갔다. 반인반귀(半人半鬼)라는 아주 특이한 형태로 태어난 비형은 밤에는 귀신과 낮에는 사람과 어울려 산다. 하루를 24시간 사는 것이다. 

이같은 소문은 진평왕의 귀에도 들어갔다. 왕은 시험 삼아 비형에게 귀신을 부려 황천에 다리를 하나 만들어보라 명하였다. 비형은 하룻밤에 다리를 뚝딱 만들어버렸다. 일야작교(一夜作橋), 다리 하나를 하룻밤에 지었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경주 사람들은 귀신이 만든 다리라 하여 귀교(鬼橋)라 불렀다.

요즈음 뛰어난 기술로도 10년 넘게 다리 하나 완성하지 못하는 판국에, 비록 황천이 한강에 비해 작은 개천이라 해도, 하룻밤 만에 귀신이 부리는 조화를 사람이 당하기 어렵다. 그런 귀신을 부리는 비형 같은 존재가 놀랍기만 하다. 

그런데 여기서 “일야작교…, 하룻밤 사이에 다리를 짓다”는 말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이는 분명 비형의 귀신 부리는 능력을 나타내지만, 요즘으로 치면 치밀하게 대비하고 실행하는 리더의 능력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우리 속담에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이 있다. 흔히 잠시 만난 사이라도 정의(情誼)를 깊게 맺어 두라는 의미로 쓰이는 속담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이담속찬(耳談續纂)>에서는 이 말을 ‘일야지숙 장성혹축(一夜之宿長城或築)’이라 써놓고, 비록 잠시라도 마땅히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풀이한다. 남녀 사이 만남의 인연을 강조하고, 스쳐지나가는 만남도 소홀하지 말라는 뜻과 사뭇 다르다.

어디선가는 하룻밤 사이에도 큰 성이 하나 쌓일 수 있으니, 저 혼자 잘났다고 방심하거나 자만하다가는 큰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경계이다. 나아가 남과 사귈 때, 서로 정다울지라도 오히려 한계를 분명히 하여, 뜻밖의 상황에 대비하라는 뜻도 있다. 그렇다면 이 말이 지금 너무 좁은 뜻으로 쓰이고 있는 셈이다. 

비형은 사람과 귀신 사이를 오가며 살았다. 그러면서 귀신의 논리와 사람의 논리를 두루 경험한다. 왕이 다리를 만들어보라 했을 때, 하룻밤 사이에 차질 없이 명령을 수행한 것은 그 같은 준비와 노력의 결과였다. 방심하고 자만하는 사이, 어디선가 누군가는 성을 쌓아놓고 미소 짓고 있을지 모른다. 

[불교신문3496호/2019년6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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