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암산 호랑이로 남은 육사생도들

1기 10명, 2기 3명, 기간병 7명
불암산 거점삼아 3개월 간 활약
적 후방 교란 혁혁한 전과 올려
불암사 스님들 도움으로 유격전
해마다 현충일날 천도재 봉행

한국전쟁 개전 초기 육사생도 13명과 기간병 7명은 한강 이남 철수를 거부하고 불암산에 은신하며 적 후방을 교란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생도들의 유격전을 측면 지원했던 불암사는 지금은 영령들을 천도하며 그 숭고한 뜻을 기린다. 불암사 전경.
한국전쟁 개전 초기 육사생도 13명과 기간병 7명은 한강 이남 철수를 거부하고 불암산에 은신하며 적 후방을 교란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생도들의 유격전을 측면 지원했던 불암사는 지금은 영령들을 천도하며 그 숭고한 뜻을 기린다. 불암사 전경.

사단법인 생명나눔실천본부(이사장 일면스님)는 6월6일 현충일을 맞아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떠난 의인들을 위한 생명나눔천도재를 봉행했다. 장기를 기증하여 남을 살리고 떠난 의인이나 국가와 민족을 위해 고귀한 목숨을 던진 군인 경찰의 위패를 모시고 천도한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끄는 인물은 불암산 유격대라고 불리는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다. 

불암사 대웅전에 모신 10위패 

강원기 김동원 김봉교 박금천 박인기 이장관 전희택 조영달 한효준 홍명집 모두 10위의 위패에다 3명의 이름 모를 인물이 불암사 대웅전에 모셔졌다. 1950년 한국전쟁 개전(開戰) 초기 불암산에서 북한군을 맞아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한 생도들이다. 그 유명한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다.원래 3명의 이름이 묻혔지만 육군사관학교의 노력으로 1명의 이름이 다시 밝혀졌다. 

지난 6일 위령재가 열리는 불암사를 찾았다. 불암사는 제25교구 봉선사 말사로 824년(신라 헌덕왕 16년) 지증이 창건하고 도선( 827~898)과 자초 무학대사(1327~1405)가 중창한 천년 고찰이다. 조선 세조가 한양을 둘러싼 경기도에 왕실 발전과 안녕을 기원하는 사찰을 하나씩 선정했는데, 동쪽 사찰로 뽑혀 동불암(東佛巖)이라고 불렸다.
 

불암사 모습.
불암사 모습.

서쪽 진관사, 남쪽 삼막사, 북쪽 승가사와 더불어 수도 서울을 수호하는 4대 사찰인 셈이다. 현재의 사격(寺格)은 조선 영 정조 시대 만들어졌다. 대웅전 제월루 관음전 산신각 독성각 동축당 수성전 등의 건물과 보물 제591호로 지정된 ‘석씨원류’ 목판 212장 등 성보를 간직한 명찰이다. 

불암사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수도 서울의 수호가람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기습 남침한 북한군을 맞아 한국군은 필사적으로 맞섰지만 중과부적이었다. 포천 의정부 방면으로 침투하는 북한군을 막기 위해 태능에 있던 육사 생도들도 최전선에 긴급 투입됐다. 당시 1기생 262명은 임관 20일을 남겨두고 있었다. 철저하게 준비해서 기습 침입한 북에 비해 무방비 상태였던 국군은 치열하게 싸웠지만 당해낼 수 없었다.

생도 대대는 태릉으로 철수해 불암산 일대에 배치됐지만 개전 2일 뒤인 27일 밤 전황(戰況)이 악화돼 자칫 고립당할 수 있었다. 북한군은 포천 양주 의정부 축선과 홍천 양평을 거쳐 남한강을 따라 퇴계원을 거치는 서울의 남쪽 축선을 따라 밀고 들어와 불암산은 적 가운데 놓인 형국이 됐다. 할 수 없이 생도 대대도 28일 아침 망우리 고개 용마산을 거쳐 광나무 방향으로 철수해 한강을 건넜다. 

그러나 모두 철수한 것은 아니었다. 철수 명령을 받고도 불암산에서 적과 싸우다 죽기로 맹세한 생도들이 있었다. 김동원 생도가 그 대표였다. 그는 후방으로 철수하기 보다 불암산 일대에서 유격 활동을 감행하기로 하고 동료들에게 의사를 물었다.

1기생 10명과 인적사항이 확인되지 않은 2기생 3명, 7사단 9연대 김만석 중사 등 부사관 2명과 병사 5명 등 20명이 죽음을 각오한 사수의지를 다졌다. 전 대원의 투표로 최초 유격활동을 제안했던 김동원 생도가 유격대장으로 선출됐다. 조영달, 박인기, 김만석 중사를 각 조장으로 선출하고 암호명은 ‘ 호랑이’로 정했다. 
 

석천암.
석천암.

창동 퇴계원 등 적진 공격 

불암산유격대는 6월29일부터 3개월 간 산을 은신처 삼아 밤이 되면 인근 별내면 창동 퇴계원 등지로 나가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적 보급소, 수송대 등을 공격하여 타격을 입혔다. 몸을 사리지 않는 과감한 공격으로 많은 전과를 올렸지만 이들의 희생도 컸다. 

1차 전투는 유격대를 결성하고 보름여 만인 7월 11일 새벽 감행했다. 남양주 퇴계원 북한군 보급소를 기습 공격하여 유류 50드럼 등 보급품을 불태우고 3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7월31일 새벽 2차 전투에서는 서울시 도봉구 창동 인근 북한군 수송부대와 보안소를 기습하여 적을 사살하고 차량 다수를 폭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8월 15일 밤에 감행한 세 번째 공격 목표는 생도들의 모교 육사였다. 북한군은 육사를 의용군 훈련소로 사용했다. 유격대는 의용군으로 끌려온 학생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대담한 공격작전을 시행해 북한군 50여 명을 사살했다. 

전투를 치러 적에게 엄청난 타격을 가하고 전과를 올렸지만 유격대도 많은 희생를 감수해야했다. 첫 전투에서 박인기 김봉교 생도가 산화하고 두 번 째는 김만석 중사가, 세 번 째 육사 공격에서는 전희택, 김동원, 홍명집 생도가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 

마지막 전투는 더 대담하고 과감했다. 9월15일 인천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됐다. 허리를 뚫린 적은 북으로 퇴각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끌려갔다.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기 위해 서쪽 방면에서 진격해오는 동안 서울 동북 방면에 위치했던 유격대는 끌려가는 마을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나섰다. 9월21일 밤 지금 봉선사 종립학교인 광동고등학교가 위치한 남양주 진접읍 내곡리에서 적 수송대를 기습했다. 그리하여 많은 주민들을 구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격대원들은 모두 쓰러졌다. 아마 마지막 전투임을 직감하고 전 병력을 동원했을 것이다. 이장관 조영달 한효준 박금천 생도가 전투 중 희생됐다. 강원기 생도만 겨우 목숨을 건져 마을 사람들에 의해 구출돼 제52 육군병원으로 후송됐다. 1년여 간 부상 후유증과 싸웠지만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숨을 거뒀다. 그러나 불암산 유격대의 존재와 활약상은 그 덕분에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전해졌다. 
 

지난 6일 현충일 불암사에서 열린 천도재에 참석한 육사 생도와 일면스님이 함께 한 모습.
지난 6일 현충일 불암사에서 열린 천도재에 참석한 육사 생도와 일면스님이 함께 한 모습.

끌려가는 주민들 대거 구출 

불암산 유격대가 전쟁 초 수개월간 적진 가운데서 살아남아 혁혁한 전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불암사 스님들 덕분이었다. 불암사 주지 윤용문스님과 석천암 김한구 스님이 적극적으로 유격대를 도왔다. 대장인 김동원 생도가 불교신자로 주지스님과 친분이 있었다. 김한구 스님은 은신처를 일러주고 식수와 음식을 제공했다. 적 치하에 떨어진 불암사였지만 밤에 은밀히 유격대를 지원했다.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가 결성돼 전투를 벌일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주지스님과 사찰 주민들의 적극적 지원 덕분이었다. 

불암산과 불암사, 석천암은 유격대의 나라 사랑과 굳건한 군인 정신이 서려있는 호국의 현장으로 오늘날 까지 전해온다. 전쟁사 전문가들에 따르면 장교로 임관할 사관생도가 병사로 전투에 참전한 사례는 흔치 않다고 한다.

미국 남북전쟁 시 남군과 제2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군 등에서 극히 일부 사례가 있을 뿐이며 일본군은 미군 본토 상륙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사관생도와 후보생을 전장에 내보내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생도병으로 유격대를 만들어 전투에 나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산화한 불암산 유격대는 전쟁사에 유래를 찾기 힘든 역사를 남긴 영웅들이다. 

북한군의 기습공격으로 국군의 전열이 흐트러진 상황에서 후방으로 후퇴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서울 시민들과 아군이 철수할 시간을 벌고 적이 장악한 후방을 교란할 목적으로 후퇴를 거부하고 불암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유격전을 벌인 이들은 여전히 불암산에 살아 숨쉰다.
 

천도재에 참석한 생도들.
천도재에 참석한 생도들.

끝내 유격대 전원 전사

해마다 6월6일 불암사에서 영가를 천도하는 위령재를 지낸다. 재를 주관하는 일면스님은 조계종 군종교구 초대 군종교구장으로 군과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 불암산 유격대의 전설 같은 무용담도 불암사에 처음 왔을 때부터 들어 잘 알고 있다. 당시 전투 흔적도 목격했다고 한다.

일면스님은 “1970년대 처음 불암사 왔을 때 윤용문스님으로부터 불암산 유격대 이야기를 들었으며 당시 까지 기둥에 총알 자국이 남아 있는 등 전쟁의 상흔을 간직하고 있었다”며 “호국 영령들을 천도하는 위령재를 지내는 것도 그같은 인연이 있어서”라고 말했다. 

이날 위령재에 육사 생도 10여명도 주지법사 인솔아래 참석했다. 육군사관학교 군법당 호국화랑사 주지 효찬스님과 불자 생도들이다. 생도들은 69년 전 선배 생도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며 정성을 다해 영령들에게 인사하고 호국간성으로 자랄 것을 다짐했다. 일면스님은 생도들에게 단주와 책을 선물하며 훌륭한 군인으로 성장할 것을 당부했다. 
 

불암산 유격대원들이 은신했던 동굴.
불암산 유격대원들이 은신했던 동굴.

올 6월19일 새 현판식 거행

육사의 박석봉 교수부장, 나종남 전쟁사 박사도 참석했다. 나종남박사는 불암산 유격대를 발굴하여 육군사관학교 50년 역사에 기록한 주인공이다. 박석봉교수부장은 일면스님에게 오는 19일 오후 4시 불암산 유격대를 기리는 현판과 내용을 새로 조성하여 이를 기념하는 식을 거행한다고 보고했다.

새 안내판은 새로 밝혀진 내용을 보완했으며 불암산 유격대 개요와 함께 전사자 명단, 전투일지, 전투 상황판이 들어간다. 현판식에는 육사교장, 남양주 시장도 함께 참석해 자리를 빛낸다. 박부장은 “생도들의 호국 정신을 잊지 않고 해마다 위령재를 모시는 일면큰스님과 불암사 신도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불암사 위 석천암 주변에는 당시 유격대원들이 은신했던 동굴이 남아있다. 동굴 앞에 내 건 안내판은 불암산과 불암사가 호국 도량임을 보여준다. 휴일을 맞아 많은 등산객이 위령재를 지내는 사찰을 오가고 표지판이 걸린 동굴 앞을 지나쳤다.

어느 누구도 무슨 재를 지내는지 어떤 내용을 담았는지 살펴보지 않았다. 어쩌면 전쟁을 기억하지 않기 위하여 그토록 엄청난 희생을 치렀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름 모를 호국영령의 희생 덕분에 지금의 평화를 누린다는 사실을 적어도 6월 호국보훈의 달에는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불암산 유격대원들의 활약상을 담은 안내판.
불암산 유격대원들의 활약상을 담은 안내판.

남양주=박부영 상임논설위원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3496호/2019년6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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