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원에서 모든 생명 ‘공생의 숲’ 이루는 삶 영위

몽골 울란바토르 자나바자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전통회화 ‘몽골의 하루’.
몽골 울란바토르 자나바자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전통회화 ‘몽골의 하루’.

말 위에서 자라고 죽는 사람들

몽골사람들을 일컬어 “말 등에서 태어나 말 등에서 죽는다”고 한다. 유목민인 그들과 말은 떼어놓을 수 없이 하나로 묶여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걸음마보다 말타기를 먼저 배운다”는 과장된 표현조차 자연스럽다. 아이가 태어나 치르는 가장 큰 의식은 ‘머리 깎기’로, 네댓 살이 되었을 때 처음 머리를 깎아주면서 공동체구성원으로 인정하게 된다. 돌과 성년식을 합쳐놓은 것 같은 이 날이면 가족친지가 모여 축하잔치를 열고, 아이는 가장 바라던 조랑말을 선물 받아 말과 함께 본격적인 초원의 삶을 열어가게 되는 것이다. 

인구가 부족한 몽골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아이를 무척 귀하게 여겨, 업둥이가 들어오는 것을 경사로 여겼다. 업둥이를 보내고 받아들이는 풍습도 극적이다. 말의 안장 양쪽에 아이와 옷가지를 담은 바구니 두 개를 매달아 마을 쪽으로 떠나보내면, 이를 발견한 집에서 반기며 자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가장은 하늘에 절하고 사방에 마유주를 뿌리는 의식으로써 집안에 한 생명이 새로 태어났음을 천지신명께 고한다. 

이처럼 말과 함께 초원을 달리며 거침없이 살아온 그들은 삶의 마감도 말과 함께한다. 몽골의 전통장례는 티베트불교의 영향으로 풍장(風葬)으로 치러졌다. 시신을 들판에 버려두어 야생동물의 먹이가 되게 함으로써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장례법이다. 따라서 흰 천으로 싼 시신을 말에 실은 뒤 마을 반대쪽으로 달려가게 하여 말에서 떨어지는 그곳이 마지막 안식처이자 풍장의 장소가 된다. 생명을 실은 걸음은 마을 쪽으로, 죽음을 실은 걸음은 마을 반대쪽으로 달리며 말은 그들의 삶과 죽음을 거두어온 것이다. 

또한 늑대토템을 지닌 몽골사람들은 자신의 조상으로 신성하게 여기는 늑대가 고인의 시신을 남김없이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 며칠 뒤 찾아가서 늑대의 먹이가 된 것을 확인하면 고인이 좋은 곳으로 갔다고 믿었다. 몽골사람들의 일상과 생로병사를 파노라마처럼 그린 전통회화 ‘몽골의 하루’에도 시신을 취하는 늑대들의 모습이 생생히 담겨 있다. 사회주의혁명과 함께 풍장은 사라졌지만, 평생을 다른 생명을 취하며 살았으니 사후에는 남김없이 보시하여 자연으로 돌아가는 불교적인 죽음이다. 
 

울란바토르 간당사원의 법회에서 수테차를 마시는 스님들.
울란바토르 간당사원의 법회에서 수테차를 마시는 스님들.

사람으로 윤회하길 바라며

우리에게 보릿고개가 있었듯이 몽골에는 젖고개가 있다. 지난해 거둔 곡식은 바닥나고 보리는 채 여물지 않은 사오월이 우리네 ‘태산보다 높은 고개’였듯이, 몽골의 이 무렵 또한 힘든 시절이다. 유목민들은 주식이 고기요 유제품인데, 겨우내 저장했던 양고기는 바닥나고 초원엔 가축이 먹을 풀이 아직 나지 않아 젖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척박한 자연 속에서도 땅의 소유권에 얽매이지 않는 초원의 삶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걸림 없는 생명력으로 충만하다. 

몽골의 풍속화에는 늘 사람과 동물이 반반씩 등장하여 모든 생명은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실감나게 해준다. 그들은 특히 방목이 가능한 초식동물이자 추위에 강한 ‘말, 양, 소, 염소, 낙타’를 기르며 다섯 가지 보물로 아낀다. 이들 가축은 의식주 모두를 해결해주는 삶의 기반이 될 뿐 아니라 이동과 운송의 수단이요, 망망한 자연 속에서 희로애락을 나누는 동반자이다. 가축에게 먹일 풀을 찾아 계절마다 이동하며 살아가는 몽골사람들이기에 문화와 풍습의 중심에 동물이 놓일 수밖에 없다. 

그들이 쓰는 관용어에도 동물은 즐겨 등장하여, 화장실에 갈 때면 ‘말을 보러 간다’고 에둘러 말한다. 우리로 치면 ‘볼일 보러 간다’는 표현인 셈인데 그만큼 말을 돌보는 것이 일상화된 소중한 일임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손님이 남의 집을 방문할 때면 게르 앞에서 헛기침을 하며 ‘개를 불러들이시오!’라고 소리친다. 개를 키우든 아니든 개의치 않고 ‘밖에 사람이 왔소’라는 표현 대신에 쓰는 관용어인 셈이다. 

모든 가축의 고기를 주식으로 삼는 그들이지만, 아무리 힘든 시절에도 개는 식용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들개는 풍장을 할 때 늑대와 함께 부모와 조상의 시신을 먹는 동물일뿐더러 사람이 되기 직전의 존재라는 윤회관념을 지녔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가 죽으면 꼬리를 잘라서 묻어주는데, 이는 내생에 꼬리 없는 사람으로 태어나라는 뜻이다. 개는 사고팔지도 않을 뿐더러 때리거나 욕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대상이다. 손님이 찾아오면 작은 칼로 거침없이 양 한 마리를 잡아 대접하지만, 지켜야할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그들의 불심 또한 신성한 자연을 닮았다. 

부처님께 올리는 신성한 공양물

우리네 장맛처럼 몽골에서는 집집마다 수테차 맛이 다르다. 수테차는 찻잎을 달인 물에 동물의 젖을 넣고 끓인 차이다. 소금으로 간을 하기에 찻잎과 젖과 소금을 다루는 방식에 따라 비린 정도에 차이가 나고, 진하거나 묽기도 하며 간이 세거나 싱겁기도 한 것이다. 그들은 수시로 수테차를 마실 뿐더러 빵을 적셔 먹거나 차가운 고기를 말아먹기도 한다. 손님이 오면 수테차 한 잔을 내놓고 이야기가 시작된다. 티베트의 수유차와 함께 야채와 곡식이 부족한 유목민들에게 소중한 비타민공급원이자 영양식이다. 

수테차는 부처님께 올리는 신성한 공양물이기도 하다. 주부는 아침에 첫 수테차를 끓이면 맨 먼저 불단에 바치고 합장기도를 올린다. 이어 한 국자를 담아 게르 밖으로 나가서 해를 향해 기도한 뒤 허공에다 뿌린다. 부처님과 자연의 모든 신들께 신성한 공양물을 바치면서 오늘하루도 가족과 가축이 무사하도록 보살펴주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울란바토르의 간당사원에서도 스님들이 오전법회를 할 때 수테차를 마시는 의식이 따랐다. 동자승이 스님들의 자리마다 돌며 뽀얀 수테차를 그릇에 부어드리면, 두 손으로 소중하게 받쳐 든 채 염송을 하고 수차례에 걸쳐 의식의 일부로써 차를 마셨다. 일종의 사시공양 개념의 의식인 셈인데, 마지막에 그릇을 혀로 말끔히 핥는 모습은 한 점도 남김없이 씻어먹는 우리의 발우공양과 다르지 않다. 게르에서도 법당에서도, 부처님께도 천지신명께도 수테차를 올리며 그들의 소중한 양식의 의미를 더욱 깊게 다져가고 있다. 

수테차와 함께 가축의 젖으로 만드는 음료 가운데 아이락을 빼놓을 수 없다. 말젖을 발효시켜 만들기에 흔히 마유주(馬乳酒)라 부르나 그들은 술로 다루지 않는다. 말젖을 짜서 큰 가죽 통에 담아두고 나무막대로 저어 발효를 시키는데, 많이 저을수록 좋아 게르 입구에다 통을 두고 식구마다 오가며 휘휘 젓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그들에게 ‘아이락 휘젓는 소리’는 고향과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고, 지친 나그네에게 안식처와 같은 정서를 불러일으켜 문학작품에도 즐겨 등장한다. 

아이락을 나눌 때면 두 손으로 잔을 받은 뒤 무명지로 술을 찍어 하늘과 땅, 그리고 자신의 가슴이나 이마에 튕기곤 한다.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시절, 은반지로 독을 검증하는 데서 비롯됐다는 이 풍습은 하늘과 땅과 선조에게 감사를 올리는 평화의 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전통공연 ‘투멩 에흐’에서 마두금을 연주하는 악사들.
전통공연 ‘투멩 에흐’에서 마두금을 연주하는 악사들.

공생의 숲, 초원의 삶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세 줄도 너무 길다.” 두 줄로 된 몽골 현악기 마두금(馬頭琴)을 일컬어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연주를 들어본 이라면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두금은 이름 그대로 말머리 모양의 장식을 달고 말총을 꼬아 현과 활을 만드는데, 현의 두 줄은 각기 숫말과 암말의 꼬리털을 써서 음양의 조화를 이룬다. 죽은 말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전설을 지닌 데다, 이름도 ‘말(馬)의 소리’라는 뜻의 ‘모린 후르’이니 그야말로 온전히 말을 위해 생겨난 악기인 셈이다. 

정복자 칭기즈칸의 유럽원정은 그들이 타고 달린 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몽골기병의 말은 몸집도 왜소하고 다리도 짧은 재래종이지만 특유의 지구력과 생존력으로 놀라울 만큼 짧은 시간에 세계의 반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말은 그들의 위대한 역사를 함께 만든 존재이자 현실적 삶을 지탱하는 근원이 되기에 ‘인마동체(人馬同體)’라는 용어까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마두금에 담긴 바람소리, 말 달리는 소리, 간절한 기도소리처럼 대초원의 삶은 말의 신화와 함께 이어지고 있다. 

말이 모든 것을 주는 최상의 동물이라면, 가축을 해치며 황야를 누비는 늑대야말로 최대의 적으로 삼을 법하다. 그런데 몽골사람들은 늑대를 신성시하며 스스로 ‘늑대의 후손’이라 칭한다. 드넓은 초원에서 먹잇감을 향해 질주하는 늑대 떼의 강인한 야생성은 가장 두려운 것이지만, 오히려 거친 자연 속에 살아남아야 하는 그들의 정령으로 삼아왔다. 그런가하면 새끼 양과 염소들이 살고 있는 게르 안으로 뱀이 들어오면, 아이락 한 방울을 머리에 뿌려 축수한 다음 조심스럽게 들어 초원에 풀어놓는다. 그들에게 해를 끼치는 어떠한 야생동물도 적으로 삼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귀중한 생명으로 여기는 것이다. 

옅은 어둠이 깔리면 저마다 흩어져 초원을 수놓던 말떼와 양떼와 소떼가 평온하게 집을 찾아든다. 몽골초원에서는 모든 생명이 공생의 숲을 이루며 온전히 불교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간당사원에서 징을 치는 동자승들. 그림=구미래
간당사원에서 징을 치는 동자승들. 그림=구미래

[불교신문3496호/2019년6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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