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들의 극락왕생을 빌미로 날 위협하는가?”

왕자의 탄생 

백제가 물러간 후 고구려의 백성들은 실로 오랜만에 편안한 겨울을 보냈다. 겨울이 지나 강이 녹고 버드나무에 물이 오를 무렵, 국내성에서는 경사가 있었다. 왕자가 태어난 것이다. 왕자가 태어난 지 꼭 한 달째 되는 날, 담덕은 고구려의 모든 사찰에 곡식을 내렸다. 스님들은 왕자의 건강과 장수를 발원하는 기도로 왕의 은혜에 답했다. 한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라 왕자 실성은 축하를 건넨다는 명분으로 왕궁을 찾아왔다.

“경축 드리옵니다. 왕자님이 태어나신 것은 고구려의 복이자 신라의 복입니다.”

“고맙소. 왕자가 자라면 그대의 모국 신라를 아껴주라, 가르치겠소.”

“망극하옵니다.”

담덕의 말에 잠시 실성은 수치심을 느꼈으나 이내 활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군사들과 지내는 것은 어떻소? 고구려의 정예병들과 함께 생활하는 것은 그대에게도, 그대의 모국에도 대단한 기회를 주는 것이니 경험한 것을 잊지 마시오.”

“인질에 불과한 저에게 기회를 주신 것에 늘 감사한 마음이옵니다.”

“말투가 많이 바뀌었소. 군대생활이 그대에게 도움이 되었나 보오. 그래도 이왕 국내성에 왔으니 며칠 머물다 가시오.”

“그리 배려해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마침내 원하는 것을 얻어낸 실성은 환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병영이 아닌 궁에서 머물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었다. 며칠 사이 잘 먹고 잘 잤더니 살이 뽀얗게 오른 실성은 얼굴이 훤해진 것이 마치 신라의 귀공자로 돌아간 것 같았다. 비단 방석 위에 앉아 아침저녁으로 향기로운 차를 마시고 있자니 계림의 월성에 있는 것 같았다. 장수들은 그가 험하고 거친 군대에서 생활하는 것이 왕의 큰 배려이자 은혜라고 했다. 하지만 만약 고구려에서의 생활이 이렇게 힘겨울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절대로 인질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히 실성은 속내를 감추는 일에 능숙했고 몸은 적당히 약했고 머리는 적당히 약았다. 덕분에 그는 고구려의 장수들과 군사들에게 인심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속마음은 늘 신라 왕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했다.

“아, 신선놀음이 따로 없네. 계속 이렇게 지내면 얼마나 좋을까. 인질 처지에 감히 바랄 수도 없구나.”

짧은 휴가를 만끽하면서도 실성은 불안한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실성의 불안은 곧 현실이 되었다. 추수가 끝날 무렵, 백제의 총공격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실성은 군대로 돌아갔고, 담덕은 5000의 군사를 보내 백제를 막고 남쪽에 성을 쌓아 전쟁에 대비하도록 했다. 그러나 백제는 끈질기게 고구려를 침략했다. 마침내 담덕은 직접 출전을 결정했다. 담덕의 출전이 결정되자 군사들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다. 담덕은 이를 놓치지 않고 백제의 기세를 완전히 꺾어놓을 계획이었다. 출전에 앞서 담덕은 왕자를 품에 안았다. 걸음마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왕자는 갑옷을 입은 부왕을 보자 눈이 동그래졌다. 

“거련아, 이리 오너라. 얼굴을 보자꾸나. 아비는 백제가 다시는 고구려의 영토를 넘보지 못하게 그 기세를 꺾을 것이다. 아비가 전쟁터에 있는 동안 무럭무럭 자라거라. 아니다, 너무 빨리는 말고 천천히 자라거라. 행여 네가 아비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까, 네가 자라는 모습을 눈에 담지 못할까 벌써 아쉽구나.”

담덕의 품에서 내려온 왕자는 의젓하게 서서 울지도 않고 부왕을 배웅했다. 왕자의 배웅을 받은 7000의 정예병은 뜨거운 감정을 느끼며 승리하지 못한다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 해, 고구려는 패수에서 백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고구려의 칼날 아래 떨어진 백제군의 수급은 무려 8000이 넘었다. 놀란 백제왕은 병력을 정비한 후 군사를 이끌고 바다를 건넜다. 하지만 하늘은 고구려의 편이었다. 폭설에 발이 묶긴 백제군은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오늘 왕께서 
백제를 멸하고자 하신다면 
위례성은 사라지고 극락정토가 
백제의 수도가 될 것입니다 
한 마디만 여쭙겠습니다

오늘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백제의 백성들이 
극락정토에 가게 되면 
먼 훗날 고구려의 백성들이 
극락에 왔을 때 
더불어 지낼 수 있겠습니까?”

담덕은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한껏 자신을 낮추었음에도 
담덕의 자비를 얻지 못한 
백제 왕은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그의 감정을 자극하고 있었다


백제와의 전쟁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나 담덕은 이번 기회를 놓치면 백제가 다시 재침하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은 어느 한쪽이 국력을 회복하는 순간, 반복되어왔다. 왕은 수십 년간 계속되어온 전쟁의 뿌리를 끊어내고자 했다. 겨울이 끝나자마자 담덕은 백제를 향해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지금까지 백제가 먼저 침공을 하면 막아냈던 것과 달리 고구려가 선공을 펼친 것이다. 백제는 고구려가 아리수(한강)를 쉽게 건너지 못하리라 생각했으나 담덕은 직접 선단을 거느리고 강을 건넜다. 

당황한 백제군은 수도 위례성으로 퇴각했다. 백제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위례성을 사수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으나 이미 승기를 잡은 고구려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백제의 왕은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지키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항복을 선언했다. 

“대왕이시여, 백제는 이제부터 고구려의 신하가 될 것을 약속합니다. 그 증표로 백제의 백성 일 1000명을 고구려에 바치옵고 비단과 면포 1000필을 바치옵니다. 부디 지난날 어리석음을 용서하시고 자비와 아량을 베푸소서.”

백제의 왕이 담덕 앞에 무릎을 꿇자 군사들과 백성들은 절을 하며 고개를 땅에 박았다. 흐느끼는 통곡은 산을 울렸고 이마에서 흐르는 피가 눈물과 섞여 피눈물이 아리수를 적셨다. 많은 전장을 누벼온 장수들과 군사들조차 그 처참한 광경을 차마 마주 보지 못했다. 하지만 담덕의 얼굴은 냉정했다. 고구려가 승리하지 않았더라면, 저들의 예상처럼 아리수를 건너지 못하고 또 후일을 도모할 시간을 주었다면 지금 통곡하며 흐느끼는 이들은 위례성의 백성이 아닌 평양성과 국내성의 백성들이었을지도 모른다.

“백제의 왕은 진정 그리 생각하는가?”

고개를 깊이 숙인 백제 왕의 뒤통수 위로 담덕의 근엄하고 냉철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백제 왕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나이는 그가 더 많았으나 막상 패배한 몸으로 고구려 왕 앞에 서자 마음이 위축되었다.

“백제가 살고 죽는 것은 오직 대왕의 자비에 달려 있습니다. 백제와 고구려는 같은 아버지를 둔 형제의 나라이니 자비를 베푸소서.”

“내 편이 아니라면 남보다 못하고 적보다 비열한 것이 같은 아버지를 둔 형제다. 그대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주몽신께 제를 올리면서 무엇을 빌었는가? 고구려를 멸하게 해달라고, 백제가 주몽신의 뜻을 이어받은 유일한 나라가 되게 해달라고 빌었을 테지.” 

백제 왕과 장수들, 군사들과 백성들의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백제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나라이옵니다. 백제의 백성들은 부처님의 제자입니다. 오늘 왕께서 백제를 멸하고자 하신다면 위례성은 사라지고 극락정토가 백제의 수도가 될 것입니다. 대왕께 한 마디만 여쭙겠습니다. 오늘 이곳에서 목숨을 잃은 백제의 백성들이 극락정토에 가게 되면, 먼 훗날 고구려의 백성들이 극락에 왔을 때 더불어 지낼 수 있겠습니까?”

담덕은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한껏 자신을 낮추었음에도 담덕의 자비를 얻지 못한 백제 왕은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그의 감정을 자극하고 있었다. 

“부처님의 위신력을 빌려, 감히 고구려 백성들의 극락왕생을 빌미로 나를 위협하는가?”

백제의 왕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머리를 숙였다.

“그런 뜻이 아니옵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본디 형제이기에 백제의 건강한 남녀 1000명을 고구려의 백성으로 바치겠노라 맹세하는 것입니다. 고구려의 충실한 신하이자 백성이 될 것을 서약하는 것이옵니다. 왕께서는 부디 헤아려주시옵소서.”

담덕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숨이 멎을 것 같은 침묵이 계속되었다. 백제의 존립을 위해 자존심을 던져버린 왕을 보며 백제의 백성들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틀어막았다. 감히 소리를 낼 수조차 없었다. 

“입으로는 백성을 위한다 말하며 백성만 희생시켜 위기를 모면하려 하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그대가 진정으로 고구려의 신하가 되길 원한다면 저 가여운 1000명의 백성들 외에 왕족과 대신 10명을 함께 바쳐라. 자원하는 자는 지금 즉시 앞으로 나오라. 백제 왕족과 귀족들의 충성심은 과연 어떨지, 과연 백성보다 크고 강할지 아니면 있기는 한 것인지 궁금하구나.”

담덕의 말이 떨어지자 백제의 왕족과 귀족들의 눈이 동시에 굴러갔다. 어찌 처신해야 좋을지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의논할 시간을 주랴? 거짓 왕족과 거짓 귀족을 내세운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두 식경 후, 고구려에 갈 왕족과 귀족 10명이 정해졌다. 아리수 이북의 58개 성과 700여 개의 마을은 모조리 고구려의 영토로 병합되었다. 담덕은 새로 얻은 이 지역을 ‘하평양(下平壤)’이라 명하고 남하 정책의 기지로 삼았다. 관미성에 이어 아리수 이북을 병합함으로써 백제의 북진은 완전히 차단한 것이다. 담덕은 이것이 백제와의 마지막 전쟁이 되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치욕을 감내하며 위기를 넘긴 백제는 고구려를 향해 복수의 칼을 갈기 시작했다.  

[불교신문3496호/2019년6월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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