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읽는 한국禪사상사] <60> 한국의 다성, 초의
[인물로 읽는 한국禪사상사] <60> 한국의 다성, 초의
  • 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 승인 2019.06.14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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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다도·다선일미 정립한 ‘영원한 다성’

유학 도교 등 당시 학문 통달
범서도 능통, 禪敎 모두 정통
시(詩)·서(書)·화(畵) 뛰어나
다산에게 유학ㆍ시학 배우고
추사 김정희 형제와도 친분
수많은 유학자들과 깊은 교류
“선에 전념하는 것과 교학에
전념하는 것은 다르지 않다”
중도사상 입각, 선교일치 입장
“차는 군자와 같아 삿됨 없어”
일지암 중건…철학 사상 정립
동다송 등 수많은 저서 남겨
초의선사가 중건하고 머물며 ‘다도’를 정립한 해남 대흥사 일지암 전경.
초의선사가 중건하고 머물며 ‘다도’를 정립한 해남 대흥사 일지암 전경.

차(茶) 한잔에 쓰고·떫고·시고·짜고·단, 5가지 맛이 다 들어 있다. 어느 선사는 <전다훈(煎茶訓)>에 “첫 잔은 달고, 두 번째 잔은 쓰며, 세 번째 잔은 시다”고 한 것처럼, 사람이 한평생을 살면서 다양한 경험을 하며 살아가듯 차는 인간의 삶과 닮아 있다.

중국인들은 “차를 통해 벗을 만난다”고 하며 인간관계의 개선책으로 차를 즐긴다. 또 “아침에 차맛이 좋으면 날씨가 좋다”고 했는데, 봄철 맑은 고기압권일 때는 차맛도 좋고 날씨가 저기압에다 비 오는 날은 차맛도 떨어진다. 또 그날의 컨디션이나 기분 상태에 따라서도 차맛이 좌우된다.

차와 인생

다양한 면에서 차와 인생은 닮아 있다. 육우(727~808?)는 <다경>에서 “덕이 있는 사람이 마시기에 가장 적당한 것이 차”라고 할 정도로 차 마시는 것 자체를 양생(養生)과 관련시키고 있다. 우리나라 최치원은 “차를 얻었으니 근심을 잊게 되었다”고 했다. 

원래 차는 사찰에서 스님들이 수행하면서 마셨고, 신도들과 함께 음용하면서 차가 발달하는 기회가 됐다. 차는 오감(五感)으로 마신다. 귀로 찻물 끓이는 소리를 듣고, 코로 향기를 맡으며, 눈으로 다구와 차를 보고, 입으로 차를 맛보며, 손으로 찻잔의 감촉을 즐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온 교감을 통해 차를 만나기 때문에 선(禪)과 함께 발달된 것이다. 

‘다반사(茶飯事)’는 밥 먹고 차 마신다는 일상적인 용어로 쓰이고 있으며, ‘끽다거(喫茶去, 차나 한잔 마셔라)’ 등 차와 관련된 공안이 많이 있다. 정성스럽게 잘 만들어진 차와 좋은 물, 차를 끓이는 여러 가지 일을 ‘다도(茶道)’라고 했고, 차를 마시는 행위와 수행(禪)을 하나라고 보면서 ‘다선일미(茶禪一味)’가 저변화됐다.

고려 때의 이규보는 “한 잔의 차로 곧 참선이 시작된다”고 할 정도였다.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부터 다도가 발달되어 일반화된 반면, 우리나라는 조선 후기에 다도 관련 서적이 처음 나왔고 다도가 정립됐는데, 바로 초의선사에 의해서다. 

초의선사 행적 

초의 의순(草衣意恂, 1786~1866)은 전남 나주 사람으로 속성은 장(張) 씨, 자(字)는 중부(中孚), 법명은 의순, 호는 초의, 별호가 일지암이다. 모친이 큰 별이 품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잉태했다. 5세 무렵, 강가에서 놀다가 깊은 곳에 빠졌는데 건져준 분이 스님이다. 다시 살아났으니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는 스님의 권유로 출가 인연이 됐다.

16세에 나주군 다도면 덕룡산 운흥사에서 벽봉 민성(碧峰珉聖) 문하에 출가했다. 19세에 영암 월출산에 올라 산세에 감격하던 중 바다에서 떠오르는 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는다. 이후 대흥사의 완호 윤우(玩虎倫佑, 1758~1826)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초의라는 법호를 받았다. 

초의의 법맥을 보면, 편양언기 - 풍담의심 - 월담설재 - 환성지안 - 호암체정 - 연담유일 - 백련도연 - 완호 - 초의이다. 

초의는 불학 이외에도 유학과 도교 등 당시 학문에 통달했고, 범서(梵書)에도 능통했다. 초의는 선과 교에 모두 정통했으며, 시(詩)·서(書)·화(畵)에도 뛰어났다. 곧 내전과 외전 모두에 두루 뛰어난 면모를 갖추었다. 또 예술방면에도 뛰어나 탱화를 잘 그렸는데, 현재 대흥사에 보관되어 있는 영정신상은 초의가 금어(金魚)가 되어 그렸거나 증사가 되었던 작품이다. 초의는 유독 관음상 그리기를 좋아했는데, 대흥사 유물관에 사십이수십일면관세음보살상 두 점이 현존한다. 

다산(茶山) 정약용이 강진에서 유배생활(1801~1818)을 했는데, 초의는 이때 다산에게 유학과 시학을 배웠다.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가자, 다산의 제자들과 함께 다신계(茶信契)를 만들었고, 다산이 절목(節目)을 손수 써주었다. 또한 추사 김정희와 그의 동생 김명희, 김상희와도 친분이 있어 시문을 나누었고, 이외 당시 수많은 유학자들과 교류가 깊었다. 

41세에 초의는 일지암(一枝庵)을 중건했다. ‘일지’란 <한산시집>에 나오는 시구이다. 뱁새가 나뭇가지 하나에만 골라 앉듯이 납자는 ‘나뭇가지 하나면 족하다’는 무소유사상에서 비롯된다. 즉 초의는 청빈한 삶을 갈망했다고 볼 수 있다. 초의는 이곳에서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정립했고, 우리나라 최초로 다도를 정립했다. 

55세 무렵, 초의는 헌종(1834∼1849 재위)으로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초의대선사(大覺登階普濟尊者艸衣大禪師)’라는 시호를 받았다. 호를 받게 된 사연은 헌종이 소치(小痴, 許鍊, 1809~1892)에게 ‘초의라는 승려의 지행’에 대해 물었고, 소치는 초의를 “덕 높은 고승이요, 내외전에 정통한 승려”라고 추켜세웠다. 고려 말 이후 ‘선사와 대선사’ 법계가 사라진지 몇 백 년 만에 초의가 대선사 법계를 받은 것이다.

추사가 유배로 제주도에 머물 때 3~4차례 유배지를 방문했고, 한번은 그곳에서 반년을 함께 있기도 했다. 추사가 서울에 머물 때도 그를 방문해 2년 정도 머물며 우의를 다졌다. 실은 추사와 초의는 동갑내기이다. 추사 김정희가 71세에 서울 관악산에서 숨을 거두자, 초의는 그의 묘소에 찾아가 제문을 낭독하고 눈물 흘리며 애도했다. 이 무렵부터 초의는 사람과의 인연을 멀리했다. 시를 짓거나 차 마시는 일보다 깊은 선정에 드는 일이 많았다.

만년에 초의는 산문 밖 출입을 금하며 은둔한 것으로 보인다. 봉은사에서 <화엄경> 목판을 간행할 때 증명법사로 참석한 뒤 곧바로 암자로 돌아왔으며, 또 해남 미황사에서 ‘무량회’를 열었을 때도 모임의 주선(主禪) 자리에 응해 참석하고 일지암으로 곧 바로 돌아왔다. 

어느 날, 초의는 시자를 불러 일어나더니 서쪽을 향해 가부좌를 하고 홀연히 입적했다. 법랍 65세요, 세납 81세이다. 스님이 입적한 지 오래도록 방안에 기이한 향기가 가득하며 안색이 평상시와 같았다고 한다. 대둔사 제13대 종사 가운데 마지막 종사에 해당한다. 

선사가 입적한지 5년 무렵, 부도와 탑비를 대흥사에 모셨다. 송파거사(松坡居士) 이희풍(李喜豊) 선생이 초의대사탑명(艸衣大師塔銘)을 찬술했고, 병조판서를 지낸 의금부사 신헌(申櫶, 김정희의 제자)이 ‘사호보제존자초의대종사의순탑비명(賜號 普濟尊者 艸衣大宗師意洵 塔碑銘)’을 지었다.

다산 정약용의 지도를 받아 <대둔사지> 편찬을 담당했으며, <일지암시고>, <일지암문집>, <다신전>1권, <동다송>1권, <선문사변만어>, <초의선과>, <초의집>, <초의시고>2권, <진묵조사유적고>, <문자반야집> 등의 저서가 있다. 

대흥사 경내에 있는 초의선사 부도탑.
대흥사 경내에 있는 초의선사 부도탑.

선사상 

앞서 ‘백파긍선 선사’ 편에서 서술했듯이 초의는 <선문사변만어>를 저술해 백파 긍선과 선논쟁을 펼쳤는데, 조사선, 여래선, 의리선에 있어 선의 경지를 구분함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또한 선교(禪敎)에 있어서도 “선에 전념하는 것과 교학에 전념하는 것은 다르지 않다”고 했는데, 선교일치적인 면이 드러나 있다.

초의의 행적(事的)인 면에서나 선사상인 면을 추론해볼 때, 초의의 선은 중도(不二) 사상에 입각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탑비명을 쓴 신헌은 초의의 인물됨을 “세간에 처하되 더럽지 않으며 출세간에 처하되 깨끗하지도 않네(處世非染 出世非淨)”라고 표현하고 있다. 

신헌이 쓴 탑비명에 이런 내용이 전한다. “선사가 백파의 잘못된 곳을 지적하며 내 의견을 물었다. 내가 ‘스님도 그릇된 곳이 있습니다’라고 하자, 선사가 웃으면서 말했다. ‘백파스님과 나의 잘못, 모두가 허물이 되지 않는다. 그릇된 곳이 곧 깨닫는 곳이다’라고 하셨다.” 초의 자신이 백파에게 오류라고 지적하면서도 그 허물을 상대에게 돌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느 승려가 마조에게 ‘즉심시불’의 뜻을 물었을 때, 마조는 “네가 알지 못한다고 하는 마음(卽汝所不了心)”이 곧 부처의 경지라고 했다. 곧 ‘번뇌를 일으키는 그 자리가 보리(菩提)’라는 의미이다. 초의는 오류를 일으키는 그 자리가 깨달음의 자리라고 보고 있음을 볼 때, 초의의 선적(禪的) 대기대용(大機大用)을 엿볼 수 있다. 

다선일미 

우리나라 다도 역사 1000년에 처음으로 다도를 정립한 저서가 초의의 <동다송>이다. 스님의 비문에 “스님의 풍체는 범상(梵相)으로 위엄이 있고, 여든이 넘어서도 가볍고 건강하기가 마치 소년의 모습과 같았다”고 한다. 스님께서 오랫동안 차를 즐겨 마신데서 온 다인의 모습으로 사료된다. 

초의가 36세에 저술한 <다신전>은 차에 대한 모든 것이 실려 있다. 즉 차를 따는 시기와 요령, 차 제조법, 차 보관법, 물 끓이는 법, 차 마시는 법 등 22개 항목으로 나누어 알기쉽게 만들어진 책이다. 이어서 52세에 <동다송>을 저술했다. <동다송>은 해거도인 홍현주가 부탁하여 저술한 것인데, 동국에서 생산되는 차에 대한 모든 것을 게송으로 지었다는 뜻이다. 모두 31구(句)의 송(頌)으로 되어 있는데, 차의 기원, 차나무의 생김새, 차의 효능, 제다법, 우리 차의 우월성 등을 언급하고 있다. 또 각 구마다 주(註)를 달아 자세한 설명을 첨가해서 알아보기 쉽도록 해놓았다.

<동다송>은 한국 차의 성전으로 높이 추앙받고 있지만, 초의가 지은 친필 저서는 현존하지 않는다. 초의는 “차는 군자와 같아 그 품성에 삿됨이 없다”고 하였고, “차를 마시되 법희선열식(法喜禪悅食)한다면 얼마든지 마셔도 좋다”고 했다. 선사는 우리나라 다도와 다선일미를 정립한 영원한 다성이다. 

[불교신문3495호/2019년6월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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