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세 강정수 할아버지와 93세 문인수 할머니 부부 이야기

1945년 8월 히로시마 핵폭탄
떨어졌을 때 현장에 있던 한국인
천신만고 끝에 귀향한 이후
인생 황혼기 무렵부터
원폭피해자들 도일치료 도와
신심 깊은 할머니는
매일 신묘장구대다라니 사경

강정수 할아버지와 문인수 할머니.

경북 영천 임고면의 수성리라는 산골 마을에 가면 20여 년 동안 남몰래 원폭 피해자들을 도와온 올해 101세의 할아버지와 그 곁에서 평생을 함께한 93세의 할머니가 있다. 독실한 불자 강정수 할아버지와 문인수 할머니 이야기다.

지난 6월10일 만난 노부부는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떨어졌을 때 현장에 있었다. 영천 고경에서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학교장 추천으로 홀로 도일(渡日)한 할아버지는 양잠, 얼음 배달, 공장 노동자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며 고국의 부모님 댁에 돈을 부쳤다.

20대 중반 자동차 회사에 취업했을 무렵, 생계를 위해 일본행을 택한 아버지를 따라 현지에 정착해 있었던 할머니를 만나 혼인했다. 행복도 잠시, 1945년 8월6일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 떨어졌다. 이날 원자폭탄이 투하돼 7만 여 명이 즉사했으며 10㎢ 지역이 초토화되고 도시의 90%가 파괴됐다.

할머니는 당시의 지옥 같았던 상황을 “눈에 큰 불덩이 같은 것이 들어오더니 사방이 캄캄하고 1초가 1시간처럼 느껴졌다”고 회상했다. 전차 선로는 엿가락처럼 휘고 거리에는 시체들이 가득했단다. 한 살 난 아들까지 세 식구는 무사히 살아남았고 천신만고 끝에 귀향했지만, 이듬해 아이가 천연두로 세상을 떠났다.
 

뒤 돌아볼 여유 없이 바쁘게 산 인생이었다. 인생의 황혼기 무렵 우연히 접한 원폭 피해자들의 안타까운 소식에 이들을 돕기로 원을 세웠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 부산지부와 함께 일본 정부가 발급한 피폭자 건강수첩을 소지한 이들을 대상으로 도일치료를 도왔다. 이 수첩이 있으면 현지에서 돈을 들이지 않고 진료 받을 수 있었다.

일어가 능통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20년 가까이 이들을 돕는 일에 모든 시간을 쏟아 부었다. 그도 그럴것이 할아버지 또한 피폭자로 일본에서 폐암수술을 받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사연은 지난해 일본 잡지에도 소개됐다.

이 인연으로 할아버지는 한국원폭피해자협회 부지부장을 지냈다. 나가사키(長崎)의 유아이(友愛) 병원으로 거의 매달 데리고 가, 원인모를 통증부터 암 환자까지 다양한 증상을 앓고 있는 이들의 상황을 정확히 통역하고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에 할머니는 “셀 수 없이 많다”고 했다. 할아버지도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할아버지가 100세를 넘기면서 이 활동은 더 이상 할 수 없게 됐지만, 부산지부에서는 부부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류병문 협회 부산지부장에 따르면 2000년대 초반부터 최근까지 3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병원으로 실어날랐다고 말했다.

두 분 다 신심 깊은 불자다. 특히 할머니는 새벽3시 일어나 오전5시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며 하루를 시작한다.
 

할머니가 쓴 신묘장구대다라니 사경 일부.

자식들은 타지로 다 떠나고, “마음을 의지할 곳이 없었다”는 할머니는 관세음보살 정근을 하며 108염주를 100번씩 돌리고, 신묘장구대다라니 사경을 하고 있다. 70대 중반 무렵인 2002년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고 있는 기도다.

할머니가 수줍게 펼친 노트에 정갈하게 줄 맞춰 선 글자들은 보는 사람의 눈시울을 뭉클하게 했다. 또박또박 써 내려간 글씨는 한 자 한 자 마음에 새기듯 눌러쓴 것처럼 보였다.

예전처럼 절에 나가지 못해 시작한 기도지만, “내가 앉은 자리가 절터요 내 마음이 부처님 마음”이라는 생각으로 기도하는 할머니다.

문 할머니의 소원은 “정신이 살아있을 때까지 부처님에 의지해 사경을 하는 것”이다.

두 시간에 걸친 인터뷰가 끝나고 다리가 불편한 할머니를 대신해 할아버지가 배웅에 나섰다. “들어가시라”고 소리쳐도 들리는지 안 들리는지 할아버지는 멀어지는 차를 향해 계속 손을 흔들었다.

영천=홍다영 기자 hong12@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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