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듣는 사자후] <40> 정무스님 - 1983년 4월24일자 ‘에세이법문’
[다시 듣는 사자후] <40> 정무스님 - 1983년 4월24일자 ‘에세이법문’
  • 김형주 기자
  • 승인 2019.06.14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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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솔천 내원궁…우리 거기서 다시 만나자”
정무스님은 화성 용주사에 이어 안성 석남사에도 ‘부모은중경탑’을 건립했다. 2008년 스님을 인터뷰 했던 석남사 곳곳의 한글 주련(柱聯)에도 ‘우주는 한 집안/ 중생은 한 가족/ 서로 원망 말고/ 은혜만 갚아라’ 같은 ‘효(孝)’와 ‘보은(報恩)’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불교신문 자료사진
정무스님은 화성 용주사에 이어 안성 석남사에도 ‘부모은중경탑’을 건립했다. 2008년 스님을 인터뷰 했던 석남사 곳곳의 한글 주련(柱聯)에도 ‘우주는 한 집안/ 중생은 한 가족/ 서로 원망 말고/ 은혜만 갚아라’ 같은 ‘효(孝)’와 ‘보은(報恩)’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봄이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여니 뜨락의 백목련이 꽃을 피웠다. 꽃이 피니 봄이 오는 것인가, 봄이 오니 꽃이 피는가. 목련 옆에는 라일락이 봉오리를 맺고 있다. 며칠 있으면 진한 향기를 뿜으며 화려한 개화(開花)를 하겠지. 목련과 라일락이 서 있는 밑에는 이름 모를 풀꽃의 새싹이 돋아나고 있다. 풀꽃은 굳이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뿌리를 내릴 만큼의 땅만 있으면 그것으로 자족(自足)한다. 옆에 덩치 큰 꽃나무가 땅을 조금 많이 차지했대서 결코 시기하지 않는다. 꽃나무도 생존(生存)을 위한 최소공간만 확보하면 더 이상은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그들은 결코 자신의 행복을 위해 대지(大地)를 독점하는 따위의 투기(投機)를 하지 않는 것이다. 풀꽃은 풀꽃대로 꽃나무는 꽃나무대로 자신의 영역을 지키면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우리는 다시 한 번 신묘(神妙)한 자연의 섭리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세상에는 항하사수(恒河沙數)와 같은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다. 사람과 사람은 서로 상자상의(相資相依)의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누구도 단독자(單獨者)로서는 존재할 수 없다. ‘너’와의 ‘관계’에 의해서만 ‘나’는 온전하게 존재 할 수 있다. 너와의 관계를 어떻게 맺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윤택하기도 하고 피곤해지기도 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맺는 관계가 언제나 편안한 것만은 아니다.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의 관계는 이해(利害)가 엇갈리고 대립과 갈등이 수없이 반복된다. 떡 하나를 놓고 누가 먼저 먹느냐고 으르렁 대기도 하고 두 남자를 놓고 한 여자가 미묘한 줄타기를 하기도 한다. 세계의 정치체제는 동서(東西)의 이데올로기 대립에서 남북(南北)의 빈부(貧富)문제로 옮겨가기도 한다.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관계와 관계 세상은 실로 중중무진연기(重重無盡緣起)의 바다이다.

누구에게나 ‘관계의 바다’를 어떻게 헤엄치느냐는 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어떤 사람은 어릿광대가 줄타기 하듯 아슬아슬한 곡예(曲藝)를 연출하며 잘도 출세의 일직선을 달리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중간에서 실족(失足)하거나 아니면 아예 줄타기를 포기하는 일조차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도 세속적인 욕망이 전제된 관계란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늘 불편과 불안(不安)이 상존(常存)하기 마련이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고른 화음(和音)을 내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여러 가지 대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본질적인 것은 관계 속의 인간이 ‘관계의 원리(原理)’를 잊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관계의 원리란 한마디로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사는 곳이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은 ‘나’와 ‘남’이 모여서 이루어진다. 

나와 남은 언제까지나 하나가 될 수 없는 이질적(異質的)인 존재들이다. 서로 다른 존재끼리 사는 곳이기 때문에 한 존재가 무엇을 독점하면 반드시 다른 존재로부터 강한 반발을 받게 된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자신이 주장하는 만큼 남도 인정해야 하고, 소유하는 만큼 주어야 한다. 이 평범한 관계의 원리(原理)를 무시하고 나만 잘나고 나만 잘 먹고 나만 잘살려고 할 때 불협화음(不協和音)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 관계의 원리가 철저히 무시되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더불어 살기를 원치 않고 혼자만 살려고 발버둥 친다. 혼자만 살려고 아우성 칠 때 관계의 원리는 부서지고 약육강식(弱肉强食)의 힘의 원리가 이 사회를 지배하게 된다. 

사람들은 왜 관계의 원리를 무시하고 더불어 살아가기를 거부하고 있는가. ‘더불어 살면 손해 본다’는 현상적 인식은 이 질문에 대한 바른 대답일 수 없다. 남은 더불어 살려고 하지 않는데 나만 그렇게 산댔자 손해라는 생각은 중생들의 뿌리 깊은 미망(迷妄)일 뿐이다. 

사물의 진상(眞想)을 바로 인식하지 못한 채 무명(無明)에 근거한 소유욕(所有慾)이야 말로 세간의 오탁(五濁)을 만들어내는 원흉이다. 많은 사람들이 관계의 원리에 의해 더불어 살아야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되어 지지 않는 것도 이 끝을 모르는 소유욕 때문이라는 부처님의 지적은 경청할 가치가 있다. 인간은 언젠가는 죽어야 할 숙명적 유한(有限)의 존재다. 아무리 세계의 보화(寶華)를 다 모아도 그것은 언제까지 나의 것일 수 없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라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내가 가진 것을 남과 나누어 가지면서 더불어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현실 인간이 구름만 먹고 사는 초월적(超越的)인 존재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다툼과 갈등을 극복한 새로운 인간지평(人間地平)을 열 필요가 있다. 이 지평을 열어가는 일에 내가 먼저 동참하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풀꽃과 꽃나무가 자기의 세계를 지키면서도 서로 조화롭게 사는 것처럼 인간의 삶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한마당. 여기에 초청된 사람은 더불어 사는 법을 터득한 사람뿐이다. 도둑이나 비신사(非紳士)는 출입금지 구역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마리 미꾸라지가 시냇물 흐려놓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한 사람의 도둑도 버릴 수 없다. 

일체중생이 부처가 되고 이 세상이 불국토가 되어야 하는 소이연(所以然)이 여기에 있다. 

불교신문 1983년 4월24일자 2면에 실린 정무스님의 에세이법문 ‘더불어 사는 法’. 스님은 “이름 모를 풀꽃은 풀꽃대로 꽃나무는 꽃나무대로 자신의 영역을 지키면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다시 한 번 신묘한 자연의 섭리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며 불국토로 가는 길을 비유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불교신문 1983년 4월24일자 2면에 실린 정무스님의 에세이법문 ‘더불어 사는 法’. 스님은 “이름 모를 풀꽃은 풀꽃대로 꽃나무는 꽃나무대로 자신의 영역을 지키면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노라면 다시 한 번 신묘한 자연의 섭리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며 불국토로 가는 길을 비유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 정무스님은 …

1931년 전북 군산에서 태어난 정무스님은 전북대 농과대학 수의학과를 졸업했다. 1958년 군산 은적사에서 전강스님을 은ㆍ계사로 사미계를, 1965년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으며 김제 흥복사,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 등에서 참선수행에 매진했다. 1968년 영주포교당 주지 이후 대구 정법회 거사림 지도법사, 조계종 중앙종회의원, 화성 용주사 주지 등의 소임을 역임하며 가람수호와 포교활성화에 크게 공헌해 1977년에는 종정표창, 2007년에는 포교대상을 받기도 했다. 

스님은 영주포교당에서 신도수련회와 대학생 수련회를 개최한 것을 계기로 재가불자들을 위해 ‘은혜를 갚는 사람이 되라’ ‘세상의 주인으로 사는 법’ ‘평생공부’ ‘마음공부’ 등의 포교 책자를 엮어 배포했다. 신도수련회를 위해 정한 새벽 4시 예불을 봉행한 뒤에는 1시간동안 참선삼매, 대중공양, 청소, 울력, 공부 등 총림 대중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을 늘 유지하는 가운데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상담’이었다. 

효 사상으로 청소년의 심성을 치유해야 한다고 늘 강조했던 스님은 1971년부터 1983년까지 제2교구본사 용주사 주지로 재임하면서 선원을 외호하고, 신도수련회와 대학생불교학생회 수련회를 시작했다. 포교자료집을 자체적으로 발간해 배포하는 등 신도교육에도 열의가 높았다. 여분의 보시금이 생기면 대학생불교학생회에 쾌척하며 후학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정무스님은 또한 항상 수행자의 본분을 강조하고 실천했다. 1963년 김제 흥복사에서 5하안거를 지낸데 이어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 등 전국의 선원을 찾아 참선수행을 했다. 특별한 일이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3시 기상, 4시 예불, 5시 참선, 6시 공양, 7시 청소, 9시~11시 면담 및 공부, 11시 헌공… 오후8~9시 공부, 10시 취침’의 일과표를 방에 붙여놓고 철저하게 정진을 했다. 평생 방 청소와 빨래를 남에게 미룬 적도 없이 검소한 승복을 입으며 생활을 했다.

스님은 2011년 9월29일 안성 석남사에서 “내가 이 세상에 인연 따라 왔다가 바르고 정직하게 열심히 살다 간다. 도솔천 내원궁에서 우리 거기서 만나자”는 열반송을 남기고 원적에 들었다. 

정리=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불교신문3495호/2019년6월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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