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이시여, 혹시 아육왕 이야기를 아십니까?”

393년, 고구려 국내성 

백제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관미성을 확보한 후 국내성으로 개선한 왕은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자주 찾았다. 어느 날 부름을 받고 입궁한 아도는 왕의 얼굴에서 그가 깊이 감춰놓은 근심을 보았다. 왕의 다부진 두 어깨 위에는 스스로 짊어진 것이 너무 많았다. 할아버지 고국원왕의 한과 백부 소수림왕의 염원, 아버지 고국양왕의 아픔 그리고 고구려의 운명까지 왕은 기꺼이 짊어지고 있었다. 태산처럼 서 있는 자신만만한 모습이었지만 아도의 눈에는 언제라도 무너질 것 같이 위태로워 보였다. 

“왕이시여, 혹시 아육왕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아도는 속내를 터놓지 못하는 왕을 위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부처님이 아닌 왕의 이름에 왕은 흥미를 보였다. 

“아육왕이라, 그런 이름을 가진 왕이나 황제가 있습니까?”

“아육왕은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에 태어난 천축의 왕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여러 나라에 사신과 함께 승려를 파견하고 오직 법과 자비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가 다스리는 동안 나라는 번창했고 백성들은 행복했습니다. 아육왕은 ‘신들에게 사랑받는 자’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지요.”

“대단히 훌륭한 분이었군요.”

또 현실에서는 만날 수 없는 완전무결한 영웅인가 싶어 왕은 무심하게 대꾸했다. 아도는 왕의 마음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육왕의 아버지에게는 왕비와 후궁이 아주 많았고 자식도 많았습니다. 아육왕은 장남이 아니었으나 능력이 빼어났고 야망도 강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늙고 병들자 서둘러 왕위를 차지한 후 어머니가 다른 형제 아흔아홉 명을 죽였다고 합니다. 후계자로 지명되지 않았으니 왕위에 위협이 되는 형제를 모두 제거한 것이지요. 잔인하며 용맹하기 그지없던 그는 항복하지 않는 나라를 정복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켜 10만명의 병사를 살육하고, 15만명을 포로로 팔아치운 적도 있었습니다.”

왕은 눈을 크게 뜨고 귀를 기울였다. 그토록 포악한 임금이 어떻게 부처님의 자비로 나라를 다스려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또 신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었는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아육왕은 왕위를 차지했고 전쟁에서도 승리했으나 패배자가 된 것 같았습니다. 계속되는 살육과 숙청, 전쟁의 참혹함을 겪은 아육왕은 권력을 손에 넣었다는 기쁨보다 알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을 느꼈다고 합니다.”

아도의 말에 왕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부처님께 귀의하고 나서야 비로소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나 길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천하가 두려워하는 아육왕을 부처님께 인도한 사람은 도가 높은 스님이나 명성이 높은 스승이 아니라 어린 사미였습니다.”

“어찌 그럴 수가 있소?”

왕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아육왕은 왕위를 차지했고
전쟁에서도 승리했으나
패배자가 된 것 같았습니다

계속되는 살육과 숙청
전쟁의 참혹함을 겪은 아육왕은
권력을 손에 넣었다는 기쁨보다
알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을 느꼈다고 합니다”

아도의 말에 왕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부처님께 귀의하고 나서야
비로소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나
길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천하가 두려워하는 아육왕을

부처님께 인도한 사람은
도가 높은 스님이나
명성이 높은 스승이 아니라
어린 사미였습니다.”

“어찌 그럴 수가 있소?”


왕의 운명 

“사실 그 어린 승려는 아육왕의 조카였습니다. 선왕이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던 첫째 왕자의 아들이었죠. 아육왕은 알지 못했으나 그가 이복형을 죽였을 때, 이복형의 아내는 아이를 가진 몸이었습니다. 그녀는 아육왕의 눈을 피해 천민들이 사는 곳으로 도망을 쳤고, 그곳에서 아이를 낳아 길렀던 것이었죠. 몇 년 후 우연히 아이를 만난 승려는 아이의 운명을 알고 출가를 시켰습니다. 어린 승려와 아육왕의 만남은 우연처럼 보였지만 실은 운명이었던 것입니다.”

“정말 놀랍소. 놀랍소.”

“우연히 길에서 어린 승려를 만난 아육왕은 그를 궁으로 데려와 원하는 자리에 앉으라고 권했습니다. 그러자 어린 승려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왕의 자리인 황금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 모습을 본 아육왕은 이 어린 승려야말로 궁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으로 승복하였습니다. 그 어린 승려의 혈통과 신분을 전혀 모른 채 말이지요.”

“만약 어린 승려의 아버지가 왕위를 이었다면, 어린 승려는 태자의 자리에 있었을 테니 아육왕이 그렇게 생각한 것도 틀린 것은 아니오.”

“그렇습니다. 사실 어린 승려에게 아육왕은 삼촌이자 아버지의 원수였지요. 하지만 그는 아육왕에게 증오의 마음을 품거나 복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아육왕을 부처님께 귀의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어린 승려가 공양을 마치자 아육왕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예배하며 삼보에 귀의할 것을 맹세했습니다. 그 후 아육왕은 믿음이 깊은 불제자가 되어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나라를 다스렸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듣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리는군요. 헌데 저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아도는 빙그레 웃으며 왕의 눈을 바라보았다.

“왕께서는 친족의 피를 한 방울도 묻히지 않고 정당하게 왕위에 오르셨습니다. 풀어야 할 원한과 업보도 없습니다. 왕께서 칼과 창을 들고 전쟁에 나서는 이유는 약한 나라를 짓밟고 빼앗기 위해서가 아니라 장차 전쟁이 없는 고구려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아닙니까?”

왕은 아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아도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상처와 죄책감으로 너덜너덜해졌던 마음이 조금씩 아물어가는 것 같았다. 아도는 강한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백제의 왕은 삼촌인 선왕을 시해하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죄책감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욱 고구려와의 전쟁에 집착할 것이고 승리하려 들 것입니다. 진나라가 멸망한 후 들어선 위나라와 연나라 역시 은원 관계가 복잡하고 서둘러 패권을 장악하고자 하는 형국입니다. 즉, 전쟁은 왕께서 막고자 한들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일부러 일으키시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의 시대와 상황이 이러합니다. 그러니 부디 너무 고통스러워하거나 자책하지 마십시오. 왕께서 살육을 즐기고 힘을 과시하기 위해 전쟁에 나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은 저도 알고 부처님도 알고 장수들과 군졸들과 백성들 모두 알고 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승려들은 세상을 떠난 영혼들이 극락에 갈 수 있도록 부처님께 기도할 것입니다.”

아도의 자비 어린 한 마디 한 마디는 왕의 구멍 난 가슴을 따뜻하게 채워주었다. 선왕이 왜 힘든 순간마다 아도와 순도를 찾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날 왕은 오랜만에 편히 잠을 잘 수 있었다. 

평양에 세워진 9개의 사찰

그해 여름, 왕은 백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소식을 듣고 평양으로 향했다. 백제와의 전쟁이 잦은 국경의 남쪽은 항상 불안했다. 더구나 관미성을 빼앗긴 백제가 두 손 놓고 있을 리도 없었다. 백제에 다녀온 승려들이 전해준 소식에 의하면 새로 즉위한 왕은 정월이 되자마자 주몽왕의 사당에서 제를 지내고 이어서 남쪽 제단에서 천지신명에게 제를 지내며 고구려에 복수할 것을 다짐했다고 한다. 백제도 불교를 숭앙하고 승려를 존경하는 분위기가 강했기에 고구려의 승려들은 전쟁 중에도 수시로 국경을 넘었다. 고구려의 평화와 전쟁의 승리 뒤에는 승려들의 보이지 않는 깊은 헌신과 부처님의 가피가 있었다. 

“이곳입니다.”

승려 혜성이 이마에 솟은 땀을 닦으며 왕에게 말했다. 지난 3년 동안 혜성은 왕의 명을 받아 사찰을 건립할 장소를 찾아 평양 곳곳을 돌아다녔다. 왕은 혜성과 함께 큰 마을과 작은 마을, 낮은 언덕과 깊은 산골짜기를 빠짐없이 돌아다녔다. 평양의 백성 중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한 이가 없을 정도였다. 왕은 대장장이와 목수들도 만나보았고, 불상을 조각하고 그림을 그리는 화공들도 만나보았다. 그 사이 알곡은 부지런히 영글었고, 평양 수비군의 사기는 드높아졌다.

“스님께서 보여주신 곳들이 모두 좋습니다. 평양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국내성으로 돌아가기 전, 왕은 혜성에게 활짝 웃으며 말했다. 혜성은 그때 왕의 미소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보름 후, 왕은 평양에 9개의 사찰을 건립하겠다는 교지를 반포했다. 혜성은 그 책임자 중 한 명이었다. 

그해 가을, 추수가 끝나자 예상대로 백제의 대군이 평양성을 공격했다.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백전노장이자 왕의 외숙이자 최측근인 진무가 1만의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을 에워쌌다. 하지만 평양성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군사들은 관미성이라는 천혜의 요새를 이용해 전면전 대신 수성전을 펼쳤다. 고구려군이 성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 백제군이 아무리 사기가 높은들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게다가 풍년이었으니 수성전에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날마다 솥을 걸고 밥을 지어 나르는 아녀자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고, 군사들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 날씨가 겨울로 접어들자 초조한 것은 백제군이었다. 마침내 백제는 별다른 소득 없이 군사를 철수시킬 수밖에 없었다. 물러나는 백제군을 보면서 평양성의 백성들은 환호했다. 때를 맞춰 완공된 9개의 사찰에서 일제히 종을 울려 퇴각하는 백제군을 전송했다.글 조민기 

[불교신문3494호/2019년6월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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