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불화] <9> 돈황 막고굴
[동아시아 불화] <9> 돈황 막고굴
  • 김정희 원광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 승인 2019.06.12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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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조각 벽화…인류사에 빛나는 사막박물관”
중국 중앙亞 실크로드 관문
초기 석굴 불전·본생도 주류
활력 넘치는 선 강렬한 색채
당나라 때 가장 많은 석굴개착
벽화 내용 풍부 경변상도 다양
동서교역과 문화교류의 거점이었던 돈황에는 화려한 문화가 꽃피었다. 사진은 막고굴 275굴 본생도로 북량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동서교역과 문화교류의 거점이었던 돈황에는 화려한 문화가 꽃피었다. 사진은 막고굴 275굴 본생도로 북량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돈황…. 듣기만 해도 마음이 설렌다. 돈황을 떠올릴 때 누군가는 노을지는 아름다운 사막의 숨막히는 모습을 상상하고, 누군가는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속의 황량하고 광활한 사막이나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을 떠올릴 지도 모른다. 

실크로드 남로와 북로가 만나는 곳 돈황(敦煌)은 타클라마칸사막의 타림분지 동쪽 끝, 중국 감숙성의 명사산에 위치한 오아시스이다. 연평균 강수량이 32.9mm에 불과한 것을 보면 돈황은 가히 사막도시라 할 만하다. 고대 돈황은 ‘크고(焞) 융성한(煌)’ 곳이라는 뜻에 걸맞게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실크로드의 관문으로 고대의 동서교역·문화교류 및 중국의 서역 경영의 거점이었던 곳이지만, 지금은 감숙성 최대의 목화 및 과일의 생산지이자 중국을 대표하는 석굴사원인 돈황석굴로 더 유명하다. 

돈황 시에서 남동쪽으로 25km 쯤 달리다보면 고운 모래로 가득한 사막에 다다른다. 바람에 굴러다니는 모래 소리가 관현악기소리처럼 들린다 하여 명사산(鳴砂山)이라 불리는 이곳은 인도를 오고 가는 상인들, 불교를 배우러 인도로 가는 승려들, 비단을 싣고 가는 낙타들의 끝없는 행렬이 이어지던 오아시스였다. 

366년의 어느날, 낙준(樂僔)은 명사산 기슭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꿈에 물소리가 나서 잠에서 깨어났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맞은편 삼위산에서 황금 불빛 속에 부처님의 모습이 보이고 꿈에 보았던 물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서둘러 그곳으로 가보니 절벽이 나타났고, 이에 낙준은 바위를 뚫어 석굴을 파고 수행을 시작하였다.(重修莫高窟佛龕碑, 698년) 이곳이 바로 돈황석굴, 즉 막고굴(莫高窟)이다.

사실 돈황에는 막고굴(莫高窟)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막고굴 외에 유림굴(楡林窟), 동천불동(東千佛洞), 서천불동(西千佛洞) 등 여러 석굴사원이 있지만 이 가운데 막고굴이 가장 규모가 크기 때문에 보통 돈황석굴하면 막고굴을 가리킨다. 막고굴에는 4세기부터 원대(1206~1368)까지 1000년에 걸쳐 조성된 다양한 조각과 벽화가 남아있어 ‘사막의 박물관’이라고도 불리운다. 

428굴의 열반도, 북주시대 조성.
428굴의 열반도, 북주시대 조성.

막고굴이 처음 개착된 시기는 4세기 중엽경이지만 현존하는 석굴 중 가장 오래된 곳은 북량이 돈황을 지배한 421~439년경에 조성되었다. 이 시기의 석굴은 후진불감식(後陳佛龕式)이라 하여 방형 또는 장방형의 석실 정면 벽에 감실을 마련하고 본존불로 미륵불과 보살상을 봉안하는 경우가 많은데, 좌우 벽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과 일대기를 그린 불전도와 본생도가 주류를 이룬다. 

즉, 벽의 중간에 불전도나 본생도를 배치하고 아래에는 공양자, 윗부분에는 천계(天界)를 배치하는 3단 구조를 갖고 있다. 이곳에 표현된 본생도는 비둘기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허벅지 살을 떼어준 시비왕이야기라던가 배고픈 호랑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마하살타왕자이야기 등 보시와 희생을 주제로 한 본생도가 많다. 인물은 강렬하고 거친 채색의 명암법을 사용하였으며, 코, 입 등에 흰색으로 악센트를 강조한 것이 실크로드적인 색채가 농후하다. 

자유분방하고 활력이 넘치는 선과 강렬한 색채는 마치 프랑스의 야수파 화가 루오(Georges Rouault Henri, 1871~1958)의 거친 붓질을 연상케 한다. 불, 보살, 비천, 본생도 등에 보이는 역강한 힘은 257굴의 남쪽 본존불, 260굴, 248굴 등 북위시대 석굴의 벽화에서도 잘 표현되어 있다. 6세기 전반인 서위대(西魏代)에 이르면 불상의 복제(服制)와 문양, 채색법 등에서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비천(飛天)의 얼굴에는 중국식의 선염법(渲染法)이 사용되고, 일천(日天)·월천(月天)·마혜수라천(摩醯首羅天)·비슈누천(毘瑟紐天) 등과 같이 인도 신화속의 천신이 표현되는 등 중국과 실크로드의 영향이 함께 나타난다. 

북주대를 지나 수대에는 부처를 중심으로 한 설법도가 대폭 증가하고 거대화하는 경향을 보이는 반면, 불전도, 본생도 같은 고사화(故事畵)는 천장부분으로 옮겨져 중요성과 의미가 점차 퇴색되었다. 대신 경전을 도상화한 변상도(變相圖)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물의 형태는 이전 시기의 장대하고 거친 형태에서 벗어나 점차 풍만하고 세련된 용모로 변하였으며, 필선이 부드럽고 원만해지는 한편 색채도 강렬한 입체감을 벗어나 부드럽고 온화한 평면적 색채로 변했다. 302굴(584년), 305굴(585굴)의 벽화는 서위 이래의 전통이 남아있지만 390굴의 수하설법도(樹下說法圖)에 이르면 수 양식이 크게 진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465굴의 설법도, 원나라 시대 조성.
 465굴의 설법도, 원나라 시대 조성.

돈황석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시기는 당나라 때이다. 이 시기에는 가장 많은 석굴이 개착되었으며, 벽화의 내용도 풍부해져서 불·보살의 독존상을 비롯하여 아미타경변상, 법화경변상, 관무량수경변상, 미륵경변상, 유마힐경변상, 약사경변상 등 다양한 경변상도가 조성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아미타불과 미륵불, 약사불 등의 정토를 치밀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표현한 정토변상도가 압도적으로 많다. 217굴, 320굴 등 성당기의 벽화는 화려하고 장대한 극락정토의 구성과 육감적인 사실성의 강조 등에서 난숙한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존상이나 인물은 풍만하고 양감있는 사실주의 양식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활발하면서도 유연한 선과 명쾌하고 부드러운 색채 또한 풍만한 형태와 더불어 사실주의 회화의 진수를 보는 듯하다. 220굴의 유마경변상도(維摩經變相圖)에서 유마상과 제왕상은 당 태종이 염립본(閻立本, 601~673)에게 그리게 한 역대제왕도(歷代帝王圖)의 인물과 흡사한 뛰어난 묘사력을 보여주고 있어서 돈황화가 중앙 화단 못지않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티베트가 돈황을 점령했던 8세기 후반~9세기 중엽에는 단독 존상의 수는 서서히 감소하고 밀교상(密敎像)이 대폭 증가했으며, 아육왕탑서상(阿育王造塔瑞像) 같은 불교적 내용을 다룬 서상도(瑞像圖), 거대한 고승상(高僧像)이 출현하는 등 변화가 보인다. 865년 장회심(張淮深)이 조영한 156굴은 만당기에 조영된 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굴이다. 

남벽 하부에 그려진 장의조출행도(張議潮出行圖)는 하서지역의 절도사를 지낸 장의조(張議潮, 799∼872)가 군사를 거느리고 토번국(吐蕃國, 7세기초~846년)을 몰아내고 하서지역을 수복한 장면을 그렸다. 홍포를 입고 백마에 올라앉은 장의조가 다리를 건너가는 장면과 그를 호위하는 군사들, 군악대, 의장대 등 100명이 넘는 거대한 행렬은 당시 귀족생활의 일단을 보여주는 한편 사실적인 행태묘사가 아주 뛰어난 실존인물을 그린 역사화로 돈황의 벽화 중 걸작으로 꼽힌다. 

오대와 송, 서하, 원대에도 돈황에는 꾸준히 석굴이 개착되었다. 오대(五代, 10세기)에는 경변상도에서 수묵화적인 요소와 함께 정경(情景)이 증가하면서 설화도가 다시 성행하였으며, 다종다양한 사회상도 그려져 당시 이 지방의 사회생활과 역사 연구에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준다. 서하(西夏, 11~13세기)시기에는 17개의 석굴이 새로 개착되었는데, 눈꺼풀을 훈염법(暈染法)으로 처리하고 토홍색(土紅色)의 두 선만으로 눈꺼풀의 윤곽을 묘사하는 등 송의 화풍을 답습한 양식과 살찌고 건장한 인체 표현과 길고 풍만한 얼굴에 작은 입술 등 티베트 점령기의 베제클릭벽화 양식을 함께 보여준다. 

원대에는 티베트 밀교화의 영향을 받아 돈황벽화의 내용이 더욱 새로워졌다. 보살의 얼굴과 팔다리에는 세련된 철선묘(鐵線描), 역사(力士)의 근육표현에는 정두서미묘(釘頭鼠尾描)를 사용하는 등 선묘가 다양해진 것도 특징이다. 명대와 청대에는 석굴이 새로 개착되지는 않았으며 기존의 석굴을 증·개축하고 수리하는 정도에 그쳤다. 이 시기의 벽화는 내용이 조잡하고 기술도 저하되어, 4세기부터 원대에 이르기까지 1000여 년간 꾸준히 이어졌던 벽화 미술은 그 맥을 잇지 못하고 막을 내리고 말았다.

‘하늘을 나는 새 한 마리 없다. 땅을 달리는 짐승 하나도 없다. 오직 앞서 간 사람의 해골 뼈로 이정표를 삼을 뿐’(법현, 法顯)이라던 타클라마칸 사막의 ‘아득한 모래 땅(流沙)’에서 꽃핀 실크로드의 불교벽화는, 2500년의 불교역사상 가장 찬란한 미술품이자 인류사에 빛나는 가장 위대한 미술품이라 할 수 있다.  

밖에서 본 돈황 막고굴.
밖에서 본 돈황 막고굴.

[불교신문3494호/2019년6월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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