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익 포용한 열린 민족주의자

인간은 시대의 산물임과 동시에 시대를 이끌어 가는 주체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역사의 주체임과 동시에 객체이다. 바람직한 삶은 이러한 두 가지 모습을 모두 수용하는 전제 아래 보다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펼쳐나가는 것이다. 시대 상황이 어려울 때는 이런 주체적인 자세를 갖추는 일이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 시대는 민주자본주의 시대이자, 가상공간이 확대되고 있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 시대이다. 기존의 가치체계가 일정하게 살아있으면서도 그것으로 온전히 살아낼 수 없는 시대이고, 또한 새로운 대안이 아직 마련되지 않은 시대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편으로 당혹스러워 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기 나름의 대안을 찾으면서 힘겹게 삶을 유지해가고 있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 찾기에 힘들어하던 우리는 최근 월드컵을 통해 자연스럽게 고양된 민족 의식과 애국심을 새삼 경험하면서 한민족이라는 공감대를 몸으로 느끼고 있다. 수 천년의 역사를 함께 해온 사람들이 타 민족을 배척하지 않으면서도 서로를 한민족으로 느낄 수 있는 경험을 했다는 사실이 벌써 꿈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굴절된 역사적 상황에서 현대를 맞아야 했던 우리의 선대들은 그런 경험을 숨죽이며 해야만 했다. 그 과정을 주도하던 사람들은 형언하기 어려운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런 선각자 중에서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이는 현상윤이다. 일제 침략기에 바로 그 일본 명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그것을 항일의 바탕으로 활용해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한다. 귀국 후에 중앙중학교에서 교사를 하면서 교장이었던 장덕수와 협력하여 이 운동을 준비했고, 천도교와 기독교계가 참여하게 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33인에 서명하고자 했으나 어린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 때문에 참여하지 않고, 그 후 일본 경찰이 체포한 주모자 48인에 속해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옥고를 치르는 과정에서 폐결핵을 얻어 교사직도 사임하고 고향에 내려간 그는 철인적인 노력으로 건강을 회복한 후에, 다시 중앙중에 복귀하여 교장을 지내고 보성전문으로 옮겨 교장을 지냈다. 광복이 되고 보성전문이 고려대학교로 개편되면서 초대 총장이 되었다. 총장이면서도 매주 교양 강좌를 통해 직접 학생들을 가르쳤고 이 강의록을 정리하여 〈조선유학사〉를 발간했다. 좌우 대립으로 혼란스럽던 상황 속에서 이념과 관계없이 교수로서의 능력이 있다면 보호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구현하고자 노력했고, 그러면서도 고려대가 민족 대학으로 자리잡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한국 동란기에 북으로 끌려간 현상윤은 그곳에서도 굽히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피력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 후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기록을 현재로서는 발견하기 어렵다. 민족 동란의 와중에서 민족을 상징하던 한 지성인이 스러진 것이다. 그의 삶이 보여준 실천적 지성으로서의 굳건함과 학자로서의 치밀함, 그리고 교육자로서의 소신은 이 시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사표로 엄중하게 다가온다. 특히 학자로서의 현상윤은 서구 학문의 거센 물결 속에서도 우리의 유학, 특히 성리학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여 당시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는 지표로 삼고자 한 점에서 돋보인다.

그의 대표저서라고 할 수 있는 〈조선유학사〉에서 조선 유학의 주류는 성리학이라고 규정지은 후에, 조선 유학이 조선사상사에 미친 공(功)과 과(過)를 지적하고 있다. 우선 공은 소인이 되지 말고 군자가 되어야 한다는 군자학을 권장한 점과 인륜도덕을 숭상하고 청렴절의를 존중하는 풍토를 만들어낸 것을 꼽고 있고 과로는 모화사상과 당쟁, 가족주의의 폐해, 계급 사상, 문약, 산업능력의 저하, 복고사상 등을 꼽고 있다. 이러한 조선유학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현재적 관점에서 보아도 그다지 틀리지 않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물론 조선유학의 공보다는 과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는 점은 비판받을 여지가 있지만, 현상적으로 그것을 부정하기는 어려운 것이 또 다른 현실이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유학자들을 살피면서도 그 역사적인 흐름을 놓치지 않는 장점을 보여주고 있다. 서경덕에서 이언적, 이황, 조식, 이항, 김인후, 기대승, 이이, 성혼, 장현광에 이르는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들을 그들 자신의 주장을 직접 고찰하는 방식으로 살핀 후에는 조선 후기 유학자들이 보여준 명분론에 근거한 당쟁과 모화사상적 한계를 비판하고 있다. 또 유학이 조선문화에 남겨놓은 발자취를 두 가지로 요약하여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인륜도덕이 남긴 발자취이고 다른 하나는 철학사상에 남겨놓은 발자취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우리만의 독특한 업적이 많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사상가로서의 현상윤의 공헌은 교육자로서의 위상과 밀접한 연계성을 지니면서 우리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기고 있다. 교육자로서의 자취는 공사구분이 엄격했던 조선의 마지막 선비정신이 살아 있는 듯한 청초함으로 남아 있다. 또한 일제와 미군정을 거치면서 문화적 식민지가 구축되어 가던 열악한 상황에서 보인 민족주의적 교육자로서의 자세는 우리의 주체성을 살릴 수 있는 바탕이 되어 있다. 고려대가 민족대학으로서의 역할을 해냈다고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초석은 현상윤에 의해 마련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의 민족으로서 타 민족을 포용하면서도 우리의 정체성은 유지해야 한다는 시대적 소명을 부여받고 있다. 내적으로는 민족 통일을 이뤄야 하고, 외연을 확대하여 세계라는 경계를 장애없이 넘나들어야 하는 과제를 부여받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현상윤이라는 한 인물의 족적은 많은 사고와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지성의 샘이다. 스스로 우파적 민족주의자이면서도 좌파 지식인의 활동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는 점에서 진정한 자유주의자로 평가받을 수 있다. 진정한 자유주의자는 타인의 자유를 특별한 이유없이 억압하지 않는다는 신념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열린 민족주의자의 전형으로 평가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정체성이란 본질적으로 타자를 상정할 수밖에 없는 개념이다. 타자라는 거울에 비추어보면서 자신의 고유성을 확인해 나가는 것이 곧 정체성 확인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식민지 상황과 참혹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온몸으로 기꺼이 감내해냈던 한 지성인의 모습을 그려보면서 우리는 자신이 현재 갖고 있는 그 거울이 무엇인지 되묻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굴절된 거울 밖에 갖고 있지 못한지도 모른다. 자신을 제대로 비춰볼 수 없는 거울을 갖고 그것이 곧 나의 모습이라고 단정지으면서 공허한 나르시시즘에 빠지거나 과장된 자학에 빠지는 극단을 달리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는 시점이다.

*제자 윤사순 교수가 말하는 현상윤

- 현대 지성사 속에서의 위상은?
“실천 영역에 초점을 맞추어 세 부분에서 평가해 볼 수 있다. 우선 독립운동가였다. 3·1운동에 적극 가담해 옥고를 치렀고, 그 후에는 교육자로서 민족운동을 펼쳤다.
두 번째로는 교육자로서의 역할이다. 고려대 총장 시절에는 이념 대립의 와중에서 고통을 겪는 교수들의 안위를 그가 가진 이데올로기와 관계없이 최선을 다해 지키려고 노력했다. 또한 그 분은 공사구분이 엄격해 문교부에 방문하는 일 외에는 출퇴근시에도 총장 전용차를 이용하지 않았다.
세 번째로는 문학가로서의 삶이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시와 소설, 수필, 평론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글을 남기고 있다. 1910년대 당시 조선 문단에서 이광수, 최남선과 견줄만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의 문학 활동에 대한 재평가는 필요하고 현재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다.”

- 동양철학자의 입장에서 유학자로서의 현상윤, 또는 〈조선유학사〉의 저자로서의 현상윤 선생을 평가해달라.
“장지연 선생이 조선 유학에 관한 정리를 시작했지만 아직 학문적 체계를 제대로 갖추지는 못했는데, 현상윤 선생에 와서야 비로소 학문적 체계를 갖춘 유학사상에 관한 정리가 이뤄졌다. 특히 〈조선유학사〉는 단순한 역사적 관점에서의 정리에 그친 것이 아니라 철학적 깊이를 전제로 해서 이루어진 체계적인 저술이다. 또한 조선 유학이 우리 문화와 사상사에 끼친 공과 과를 비판적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점과 그 비판이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아도 거의 정확하다는 점도 중시되어야 할 부분이다.”

- ‘고려대 정신’에 끼친 영향은?
“현상윤 선생은 고려대에 민족주의적인 정신을 심어주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직접 교양 강의를 통해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자 했고 철학과를 창설해 국학 연구의 중심이 되도록 했다. 물론 보성전문 시절부터 이상은, 김경탁과 같은 국학자가 있어 그런 바탕이 마련되어 있기는 했지만, 현상윤 선생이 중심에 서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한 교수들의 개성을 최대한 존중하여 개방적이면서도 학구적인 대학 분위기를 만드는 데도 기여했다.”

- 현상윤 선생의 삶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교훈은?
“이 시대는 건전한 의미의 선비 정신을 살려야 할 때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현상윤 선생은 선비로서의 모습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또한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포용정신도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이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정신을 되살려야 하는 시대이다.”

박병기 / 전주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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