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쓰는 화두-'한국불교'] <49> 역대 정권의 기독교 편향(中) -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기독편향 정책
[함께 쓰는 화두-'한국불교'] <49> 역대 정권의 기독교 편향(中) -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기독편향 정책
  • 박부영 기자
  • 승인 2019.06.07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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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선거도 개신교파 항의로 일요일 피해 월요일

기독교 반대로 원래 날짜 변경
미군정 한국인 관리 60% 교인
당시 국내 기독교인 0.5% 불과 
불교는 반대로 차별대우 받아
“하나님 은총, 邪敎 심판” 주장
불교를 차별하고 기독교를 지원하는 정부 정책은 이미 해방 후 미군정 시절부터 시작돼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08년 종교차별을 금지하는 법 제정을 촉구하는 대구 경북 불자들의 대회 모습. 불교신문 자료사진

미군정 하에서 실시된 불교 사원의 ‘시설 전환’은 불교계 항의에도 아랑곳 않고 진행됐으며 미군정에 이어 이승만 정권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이러한 사실이 종단 기록관에 문서로 고스란히 보관돼 있다. 1947년 9월19일 조선불교중앙총무원장 김법린은 군정청재산관리관에게 “당연히 불교계에 이양되어야 할 일본 불교적산이 하등의 연고 없는 단체 또는 개인에 의해 불법점거 또는 부적당하게 이양되어 있으며 이미 점유중에 있거나 임대차계약 완료된 재산까지도 다른 곳으로 이양되어 있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낸다. 

총무원은 3년여 뒤인 1950년 2월에도 같은 내용의 공문을 보낸다. 이 공문에 따르면 해방직후 불교계가 관리하던 40여개의 일본불교 사원 가운데 30여개가 불교로 이관되지 않고 교회 피난소 사회사업기관 등에 이양됐다. 미군정에 이어 이승만 정권에서도 적산 종교시설의 교회화가 지속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이승만 정권도 기독편향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의해 진행된 적산 종교시설의 기독교화는 10년 뒤 엄청난 결과를 만들었으며 이는 오늘날 한국 기독교를 만든 발판으로 작용했다. 

1956년 9월24일자 ‘기독공보’에는 ‘변모된 일본신사 절간 터들’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해방 후 일본신사(神社)나 일본사원(寺院) 자리가 예수교 예배당 혹은 교회 학교로 변모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인 동시에 기독교의 승리이며, 한국교회의 광영이며 사교(邪敎)에 대한 역사적 심판의 한 단면인 것이다.

남산에 있던 조선신궁별관 자리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신학교와 기독교 박물관이, 남산 북쪽 기슭 경성신사 자리에 숭의여자중고등학교가, 또 그 아래 절간 자리에는 정동교회 대한신학교가 점유하고 있으며, 더 그 아래 옛날 천리교(天理敎) 자리에는 한국제일의 근대식 건물을 자랑하고 있는 영락교회가 위치하고 있는데….”

정부의 공식 방침과 달리 일본의 종교재산이 왜 기독교 측에 넘어갔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미군정의 군인과 미국을 도왔던 한국인 고위관리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다는데서 그 원인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미군정 고위관리들은 기독교 원칙에 따라 기독교 국가화 하여 소련 등의 공산국가에 맞서는 점령지 건설 원칙을 남한에도 적용하려 했다.

이같은 원칙은 1947년 군정장관 대리 헬맥의 “건국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기초로 하여야 한다”는 연설에서 잘 드러난다. 미군정을 돕는 정부의 한국인 국장급 관리는 기독교인이 60%가 넘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미군정이 자문을 구하는 고문단도 대부분 기독교인이었다. 

미군정 도운 한국인도 기독교인

강인철(한신대) 교수의 박사논문 ‘한국기독교회와 국가 시민사회’는 미군정 당시 한국인 고위관리의 종교를 이렇게 분석한다. “미군정 초기의 고문정치(顧問政治)에서 개신교 신자들은 군정 최고 책임자 주변에 포진하여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 중장의 통역 겸 비서실장을 지낸 이묘목, 군정장관 비서장과 민정장관 보좌관을 지낸 이교선은 핵심적인 사람들이고, 윤보선, 전용선 목사, 이매리 양주삼 목사 등이 중앙행정기관에서, 김광현 목사, 정기원 김정기 등은 지방행정기관에서 고문으로 활약했다.” 

이 논문에 따르면 미군정이 임명한 11명의 행정고문 중에서 목사 3명을 포함한 6명(55%)이 개신교 신자다. 또한 행정을 책임지는 각 부처 국장에 임명된 한국인 13명 가운데 7명(54%)이 개신교 신자였으며 이들 전원이 미국 유학출신자들이었다. 초대 차장 44%, 초대 처장 33%,가 미국유학 출신 개신교 신자였다.

1946년 미군정의 최고위직에 임명된 한국인 50명 가운데 35명이 기독교 신자였다. 이 논문은 “해방 당시 개신교 신자 인구대비 비율이 대략 0.52% 정도라고 할 때 위에 든 일련의 수치가 얼마나 기형적인 가를 쉽게 알 수 있다”고 했다.  

물론 불교 자체의 잘못도 있다. 당시 남한 불교계 지도자들은 해방 이후 급변하는 사회 정세에 맞춰 개혁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소장파와 주류에서 소외된 세력은 혁신을 주장했지만 좌파에 경도돼 미군정과 신뢰를 쌓는데 실패했다. 적산을 인수하는 문제로 서로 다투다 목사에게 빼앗기는 일도 있었다. 

교육 뿐만 아니라 복지 의료사업 등 다양한 사회구제 사업이 미군정의 기독교 편향 정책으로 인해 좌절을 겪었다. 이는 향후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를 역전시키고 오늘날 세계 최대 기독교 사회로 만드는 바탕이 되었다.

성관스님은 논문 ‘일제와 미군정기의 종교정책이 불교종립학교에 미친 영향’에서 “미군정과의 우호적인 관계 그리고 군정청 및 정부 행정기관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결합하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관련 적산 처리과정에서 불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한 기독교회는 교회 설립의 물적 토대를 형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복지사업과 교육사업을 추진할 재원을 마련하게 된 셈이다. 이는 결국 해방 이후 새로운 사회구조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기독교가 종교적 우위를 확보하는 물적 토대를 형성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기독교 편향 정책은 적산 불하 뿐만 아니라 전방위적으로 일어났다. 미군정은 해방 직후 기독교 인구가 인구의 2~3%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크리스마스를 국경일로 지정했다. 일제시대 일본불교가 전담했던 형무소 교화사업도 목사만 참여시키는 등 기독교 일방정책을 폈다.

형목제도는 불교 항의를 받아 스님도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했지만 종교 선택권을 죄수들에게 일임해 결국 기독교가 형무소 교화 사업을 전담하게 했다. 이에따라 목사가 형무소 정식 공무원 신분을 획득, 전국 18개 형무소 교무과장직을 맡았다. 신설된 법무부 형정과 초대 과장도 목사에게 돌아갔다. 개신교가 독점하던 형목은 1961년에서야 타종교에도 개방됐다. 

기독교 선교도 국가차원에서 진행됐다. 1947년 3월부터 기독교회는 오늘날 KBS 전신인 서울방송을 통해 기독교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게 했다. 각 종교단체가 주1회 10분씩 편성됐으나 미군정은 다른 종교단체에서 시간을 채우지 못하거나 한 달 다섯 주(週)면 기독교가 그 시간을 사용할 수 있게 했다. 

미군정의 친기독교 정책은 이승만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크리스마스 공휴일과 형목제도는 그대로 계승됐다. 가장 결정적인 기독교 혜택은 1951년 전쟁 중에 도입한 군종제도였다. 전투에서 죽어가는 군인들을 어루만지고 위로하는 군종에서 불교만 빠졌다. 기독교와 천주교만의 군종제는 엄청난 결과를 불러왔다. 군종제도가 실시되고 불과 3년만인 1954년 군장병의 종교 분포가 개신교 20%, 천주교 4%, 불교 6%, 유교 12%, 기타 7%, 무종교 51%로 나타났다. 

성관스님은 논문에서 국군의 기독교인 비율이 5%에서 불과 5년 사이 15%까지 늘어났다고 밝혔다. 강인철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정규 장교로 임명된 목사들과 군종장교단이 구성된 것은 미국의 피선교지 가운데 한국이 처음이었다. 

한국전쟁 기간 중 17만 명에 달하는 공산군 포로 가운데 6만여 명이 한 미 양국 목사들에 의해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승만 정권은 전쟁으로 파괴된 YMCA,회관 재건축을 지원하고 기독교 방송국 인가 특혜를 주었다. 또한 한국 전쟁 이후 해외 원조가 교회를 통해 들어오면서 한국기독교의 성장 토대가 됐다. 

이러한 정책은 기독교 인구의 폭발적 증가를 낳았다. 미군정 당시 전체 인구의 2~3% 불과하던 기독교 인구는 전체 인구의 7.5%를 차지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1941년 30여만명이던 개신교 신자수가 1950년 약 130만 명으로 늘어나 10년 사이에 4배의 성장을 보였다. 

기독교인 10년새 4배 성장 

제도 뿐만 아니라 각종 의식이나 행사 등에서도 이미 기독교 편향이 심각하게 진행됐다. 이후 한국사회를 혼란에 빠트린 공공영역에서의 종교편향, 대통령 장차관 등 정부 지도자의 노골적인 기독의식 등은 이미 미군정 시절부터 일어났다. 제헌의원을 뽑는 선거일은 원래 1948년 5월9일이었지만 NCC를 비롯한 각급 개신교 교파 단체들 항의에 따라 다음날로 바뀌었다. 

공휴일 공무원 시험 금지 등 정부 일정을 기독교 의식에 맞출 것을 요구하는 기독교측 주장이 대한민국의 헌법을 제정할 제헌국회의원 선거부터 시작된 것이다. 서울대 초대 총장 안스테드 목사는 학장회의 서두에 기도를 제의하여 물의를 일으켰으며, 이승만은 제헌국회를 회순에도 없는 기도로 시작해 논란을 일으켰다.

대통령 취임도 기독교 방식으로 진행됐다. 1950년 9월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환도식(還都式)에서 맥아더는 참석자들에게 기립할 것을 요구하고 주기도문을 바쳤다. 이승만은 해마다 성탄절 메시지를 발표하고 국회에서 성대한 성탄 파티가 열렸다. (강인철의 논문에서) 

불교는 차별 정책 

이처럼 기독교는 크리스마스 공휴일, 군목 파견, 기독 방송국 개설 등 수많은 혜택을 부여하면서도 불교를 향해서는 정반대 정책을 폈다. 미군정은 불교의 자주적 활동을 막고 불교를 국가 통제 아래 두어 불교계가 악법으로 규정했던 사찰령을 그대로 존속시켰다. 미군정은 일제 시대 한국인을 차별하던 각종 악법을 폐지하면서 사찰령은 존속시켰다. 불교계의 폐지요구에도 오불관언이었다. 

종단차원의 폐지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불교계가 주도해 사찰재산을 보호하는 대체법을 의원입법 형식으로 통과시켰는데도 미군정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유는 불교계 재산이 늘어나는 것을 우려해서였다.

종단 기록관에 남아있는 문서에 따르면 헬믹 군정장관대리는 사찰재산에 일본불교사원의 재산도 포함될 수 있어 사찰령 대체 입법화를 우려했다. 재산이 불교계에 넘어가는 것을 우려하던 미군정은 유교에 대해서는 일제 때 제정된 ‘향교재산관리규칙’을 폐지해 국가재산으로 간주하던 향교 재산을 유림 공동재산으로 돌려주었다. 

군목과 함께 스님들을 군종장교로 임관해야한다는 불교계 요청도 무시됐다. 한국전쟁 당시 군인들의 대부분 불교신자였지만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해도 불교의식을 치를 수 없었다. 스님들은 개인적으로 친분있는 부대장을 찾아가 장례의식을 치를 정도로 차별받았다. 군승은 기독교보다 18년 뒤인 1968년에야 도입됐다. 역사가 이러한데도 한기총은 이승만 대통령이 불교 특혜정책을 폈다고 주장한다. 

※이 기사는 성관스님의 ‘일제와 미군정기의 종교정책이 불교종립학교에 미친 영향’, 강인철의 ‘한국기독교회와 국가 시민사회’ 박사학위논문을 참조하였습니다. 

[불교신문3493호/2019년6월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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