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의 종주 백파가 당대 禪 정통성 정립하다”

고창 선운사에 봉안돼 있는 백파긍선스님의 진영.

제1구 조사선, 제2구 여래선
제3구는 의리선이라 재해석 
임제3구는 ‘온총삼구’로 분석

선문염송집 선문염송설화 등 
방대한 禪자료 판석 결과물- 

초의 ‘선문사변만어’ 필두로
끝없는 발전적 논쟁 이어가며
불교학ㆍ신행 발전토대 다져

어느 승려가 파릉(巴陵, 운문문언 제자)에게 물었다. “조사선과 여래선은 같은 겁니까? 다른 겁니까?” “닭은 추우면 나무에 오르고, 오리는 추우면 물에 들어간다.” 파릉은 이론적인 설명을 하지 않고, 선문답을 했다. 추운 상황은 똑같지만, 추위를 피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각기 다르다. 목표지점은 하나요, 각각의 길이 다름을 제시할 뿐이다.

선종사는 대략 여래선-조사선-문자선-간화선ㆍ묵조선-염불선으로 나뉜다. 시대상으로 선(禪)을 이해하기 위해 방편으로 나누고, 학문적으로도 분류하고 있다. 다른 것은 논쟁의 문제가 없지만, 여래선과 조사선의 구별이 난제요, 근자에도 문제시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120년간 이 점에 첨예한 논쟁이 있었다. 그 논쟁의 발단이 된 것은 백파가 편찬한 <선문수경(禪文手鏡)>이다. 

백파 긍선(白坡亘璇, 1767~852)은 속성이 이(李) 씨, 전북 고창 출신, 별호는 구산(龜山)이다. 백파는 12세에 선운사 시헌(詩憲) 장로를 은사로 출가했다. 초산 용문암에서 안거 중에 심지(心地)가 열렸다. 지리산 영원암의 설파 상언(雪坡尙彦, 1707~1791)에게 입문해 서래종지(西來宗旨)를 전해 받았으며, 화엄교학도 함께 공부했다. 26세에 백양산 운문암에서 강사로서 개당(開堂)했다. 한편 구암사 설봉 거일(雪峰巨日)의 법통을 이었다. 백파 긍선의 법맥을 보면, 환성지안-호암체정-연담유일-설파상언-백파로 이어진다.

백파는 구암사에서 선강법회(禪講法會)를 개최할 때, 팔도의 납자들로부터 선문(禪門) 중흥의 종주(宗主)로 추앙받았다. 45세 무렵, ‘진제(眞諦)는 문자 밖에 있다’고 하면서 교학을 버리고 참선에 전념했다. 또한 <정혜결사문>에서도 “나는 어려서 출가해 공부해 왔으나 온통 다른 이의 보석만을 세었을 뿐, 나 자신은 반 푼어치도 없었다”고 할 정도로 사교입선의 뜻이 굳건했다. 

이후 청도 운문사에서 선풍을 드날렸으며, 선 관련 주석서인 사기(私記)를 다수 남겼다. 백파는 화엄ㆍ율ㆍ선에 모두 조예가 깊었다. 조선 철종 3년에 세수 86세, 법랍 75세로 화엄사에서 입적했다. 저서도 <정혜결사문> <수선결사문> <법보단경요해> <선문오종강요사기> <선문염송집사기> <금강경팔해> <선요기> <작법귀감> 등 다수가 있다. 추사 김정희는 백파를 비판했지만, 선사 입적 후에 ‘화엄종주 백파대율사 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라는 비문을 지었다. 

‘선문수경’의 세 가지 의의 

백파는 임제의 3구에 입각해 선문(禪文)을 판석했다. <선문수경> 첫 머리에 “삼세제불과 역대 조사, 천하의 선지식이 남긴 언구는 이 3구(三句)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백파는 이 3구를 선종 5가(위앙·임제·운문·조동·법안)에 비교하고, 삼처전심을 분류하는 등 독자적인 선론을 전개했다. <임제록> ‘시중’에서 “만약 제1구에서 깨달으면 조불의 스승의 되고, 제2구에서 깨달으면,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며, 제3구에서 깨달으면 자신도 구제하지 못한다”라고 했다. 

백파는 제1구는 조사선, 제2구는 여래선, 제3구는 의리선이라고 재해석했다. 백파는 임제 3구를 온총삼구(蘊總三句)라고 하면서 각각 분석했다.

첫째, 제1구를 삼요(三要), 즉 대기대용(大機大用)·기용제시(機用齊施)라고 보았으며, 이 도리를 얻으면 부처와 조사의 스승이 된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이를 조사선의 근기라고 보았다. 여기서 백파는 우리나라 ‘진귀조사설’을 소개하고 있다.

제2구는 삼현(三玄), 즉 체중현(體中玄)·구중현(句中玄)·용중형(用中玄)으로 보았는데, 이 도리를 얻으면 인천(人天)의 스승이 된다고 했다. 이를 여래선의 근기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제3구는 유(有)·무(無)·중(中)을 희롱하는 것으로, 의리선에 해당하는데 곧 자기 자신조차도 구제할 수 없다고 보았다.

둘째, 3구 원리에 의해 선문 5가를 분류했다. 즉 제1구는 임제종ㆍ운문종에 해당하며, 제2구에는 조동종ㆍ법안종ㆍ위앙종이 해당하며, 제3구에는 하택종·북종·우두종이라고 분류하면서 3구에 의한 선문판석을 시도했다.

셋째, 백파는 제1구의 조사선과 제2구의 여래선을 교외별전의 격외선으로, 제3구를 의리선으로 분류했다. 그러면서 여래선과 의리선을 같은 것으로 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넷째, 삼처전심 가운데도 영산회상염화미소ㆍ사라쌍수곽씨쌍부는 제1구에, 다자탑전분반좌는 제2구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다섯째, <금강경>의 ‘범소유상(凡所有相)’은 제3구, ‘개시허망(皆是虛妄)’은 제2구,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則見如來’)는 제1구에 배대했다. 여섯째, 유식 3성에 있어서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을 제3구, 의타기성(依他起性)을 제2구, 원성실성(圓成實性)을 제1구에 배대했다. 

백파의 <선문수경>은 조선 후기의 선을 대표하는데, 세 가지 의의가 있다. 첫째로 송대(宋代) 이후 공안을 염롱(拈弄)한 선사들의 염(拈)·송(頌)·거(擧)·평(評)과 찬(讚)·화(話)·창(唱)·화(和) 등을 판석(判釋)한 책이다. 이 책자는 진각 혜심의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 구곡 각운의 <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 등 방대한 자료들을 섭렵하여 선을 판석한 결과물이다.

둘째로 화엄의 종주 백파가 당대 선의 정통성을 정립코자 임제의 3구를 기준으로 여러 견해를 펼쳤다는 점이다. 기존의 선은 의리선=여래선, 격외선=조사선 2종선이었는데, 백파는 의리선·여래선·조사선의 3종선의 구도를 세웠다. 셋째로 선교이론(禪敎理論)을 전개했는데, <금강경>과 <육조단경>의 핵심 사상을 선구에 배대한 점이다. 

고창 선운사에 봉안돼 있는 백파긍선스님의 비문. 추사 김정희가 비문을 짓고, 명칭을 썼다. 추사의 글씨체와 백파스님 연구에 있어서도 중요한 자료이다.

선 논쟁…초의의 ‘선문사변만어’ 

백파가 <선문수경>을 발표하자, 대흥사 초의 의순은 <선문사변만어(禪文四辨漫語)>를 저술해 비판했고(1차 비판), 추사 김정희는 <백파망증십오조(白坡妄證十五條)>로 이의를 제기했다. 다음 부휴계 10대손인 우담 홍기(優曇洪基, 1822~1881)는 <선문증정록(禪門證正錄)>을 통해 백파를 비판한다(2차 비판).

다시 이어서 백파의 4대 법손인 설두 유형(雪竇有炯, 1824~1889)은 <선원소류(禪源遡流)>를 통해 백파의 사상을 두둔한다. 그러자 축원 진하(竺源震河, 1826~1926)가 <선문재정록(禪門再正錄)>을 발표하면서 백파를 비판(3차)한다.

초의는 <선문수경>에 문제점이 있다고 하면서 3종선 이론을 논박하며 네 가지(四辨, 조사선·여래선, 격외선·의리선, 살활의 기용, 진공·묘유)로 선리를 변론했다. 초의는 의리선과 격외선을 방편상의 분류로는 받아들이지만, 차별의 관점으로는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조사선과 여래선도 법을 전하는 주체의 차이가 있을 뿐 두 선은 우열을 가릴 수 없으며, 조사선만이 최고라고 보는 선법은 잘못이라고 비판한다. 즉 초의는 ‘조사선ㆍ여래선ㆍ의리선’이라고 나눈 단계는 언어 방편일 뿐이므로 3종선을 단계적으로 나눈 것은 오류이며, 평등하게 봐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교를 통해 선을 이해코자 하는 것이므로 선과 교는 불이(不二)의 관계로서 다른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러면서 초의는 조사선과 여래선, 백파는 선문의 5가를 각각 조사선과 여래선으로 배분하여 그 우열을 나누었는데, 5가는 결코 그 우열을 정할 수 없다. 격외선과 의리선, ‘격외’와 ‘의리’라는 말은 있으나 ‘격외선’과 ‘의리선’이라는 용어는 없음을 강조하고, 이들은 조사선과 여래선을 법의 입장에서 달리 부른 용어라는 점을 밝혔다.

살활(殺活)과 기용(機用), 즉 살인도와 활인검은 마치 본체와 작용의 관계와 같아서 결코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이다. 이에 여래의 삼처전심 중에서 분반좌(分半座)는 살인도(殺人刀)로서 그 성격이 오직 죽이는 용도로 쓰일 뿐 살리는 기능이 없고, 염화미소는 활인검(活人劍)으로서 살(殺)과 활(活)이 겸비되어 있다고 본 것에 대해 비판했다.

백파는 당대의 화엄학자요, 대선사로서 초의 입장에서는 감히 거론키 어려운 상대였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초의가 변론한 선사상은 근자에까지 인정받고 있다. 초의가 내세운 사상은 첫째는 방편적인 언어를 긍정하고 있다는 점, 둘째는 조선 후기 실학적인 관점에서 전개되었다는 점, 셋째는 흙덩이가 던져졌을 때, 흙덩이를 쫓는 것이 아니라 흙덩이를 던진 원 근원을 쫓고 있다는 점이다. 곧 선리의 근원을 면밀하게 짚었다는 점이다.

1세기 반에 걸친 대논쟁 의의 

조선 후기에는 백파의 선 논쟁 이전에 논쟁이 또 있었다. 대강백 대흥사 연담 유일(蓮潭有一, 1720~1799)과 송광사 묵암 최눌(默庵最訥, 1717~1790)의 심성(心性)에 관한 논쟁이다. 연담과 묵암은 운봉 대지(雲峰大智, 휴정의 문하)가 1687년에 저술한 <심성론(心性論)>을 주제로 논쟁을 펼쳤다. 두 번째는 앞에서 언급한 백파와 초의이다. 선 논변은 조선 후기 지성사의 한 면을 장식한 일대 사건이며, 시간상으로도 1790년에서 1926년에 이르는 약 1세기 반에 걸친 대논쟁이었다.

이능화는 <조선불교통사>에서 “임제 3구를 중심으로 벌인 논쟁이나 변증과 고증만을 내세운 보잘 것 없는 논쟁이다…문자·의리·지해에 사로잡혀 있다”고 혹평했다. 현대의 학자들 또한 이에 가세한 경우도 있다. 학자들의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긍정적인 면이 더 많다고 본다.

첫째는 선 논쟁이 있었던 18~19세기 초는 중국도 불교가 낙후되어 학문적 발전이 없는 답보상태였다. 이런 때, 백파가 선리를 정립하고, 이에 맞서 반박하고 비판했다는 점은 한국불교의 저력이 담겨 있다. 둘째는 조선시대에 불교가 수백 년 동안 억압을 받아 불교학이나 신행이 발전할 수 없었다. 이런 척박한 상황에서도 선 논쟁이 있었기 때문에 근자에 이르는 조계종의 연원이 되었다고 본다. 

[불교신문3493호/2019년6월8일자]

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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