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잔, 그것들은 아주 골칫거리로구먼”

“백잔은 고구려의 골칫거리고 
신라는 우리 고구려의 동생이니 
형이 아우를 지켜주는 것은 
당연한 일 … 우리 고구려가 
백잔과 왜구로부터 
신라를 보호해 주겠소”

볼모로 온 신라왕자 실성은 
바닥에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 

전쟁터에서도 왕은 
시간이 날 때마다 부처님께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부처님을 의지했기에 
살육의 광기 속에서 
승리에 도취하지 않고 
전투를 치를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불상 앞에 엎드린 
고구려 왕의 등이 흔들렸다

고구려에 온 신라의 왕자 

말갈을 압박하여 백제를 공략한 태자 담덕의 전략은 탁월했으나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었다. 전열을 정비한 백제는 고구려를 재차 공격했다. 즉위 이후 줄곧 연나라와 백제, 양국의 공세와 전쟁에 시달려온 왕은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병석에 누운 왕은 태자 담덕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태자가 정사와 전쟁에 관여한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였기에 신하들은 감히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태자가 왕위를 이어받고 난 이듬해 정월,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신라에서 화친을 청하며 신라 왕의 동생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것이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네.”

태자는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숙인 신라의 왕자를 향해 위엄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옵니다. 고구려 같은 대국과 화친을 하여 영광입니다.”

몇 번씩 연습하여 입 밖으로 낸 말이지만 떨림은 어쩔 수가 없었다. 염소처럼 떨리는 목소리에 억양에는 신라의 사투리까지 섞여 신하들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혹시 무슨 실수라도 한 것일까 싶어 실성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아, 그대의 잘못이 아니네. 고구려와 신라, 두 나라가 오랫동안 교류가 없다 보니 말은 통하지만 서로 말투가 다른 것이 신기하여 웃은 것이네. 그래, 왜구들이 기승이라고?”

“그렇사옵니다. 신라의 해안은 왜구로 인해 평안할 날이 드물고 최근에는 백제가 왜구와 화친을 하여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백잔, 그것들은 아주 골칫거리로구먼. 백잔은 고구려의 오랜 골칫거리이니, 이제부터 신라는 우리 고구려의 동생이요. 형이 아우를 지켜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우리 고구려가 백잔과 왜구로부터 신라를 보호해 주겠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실성은 바닥에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태자와 실성의 나이는 비슷했으나 두 사람의 위치와 그릇은 전혀 달랐다. 

“그대도 어엿한 신라의 왕족이요, 남아이니 왕궁보다는 병영에서 군사훈련을 받으며 경험을 쌓도록 하시오. 나중에 신라에 돌아가서도 훨씬 도움이 될 것이오.”

“태자 전하! 그것은 아니 될 말씀이옵니다.”

“다시 한번 생각하시옵소서.”

태자의 말에 신하들은 깜짝 놀라 반대하였다. 볼모라고는 하지만 타국의 왕족에게 병영을 노출시킨다는 것은 너무나 파격적인 호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장 놀란 것은 실성이었다. 인질의 신분으로 왔으나 그래도 왕족이니 험한 대접을 받지는 않으리라 생각했던 실성은 병영으로 가라는 태자의 명에 기함했다. 태어나서 서라벌 밖에 나와 본 것은 이번에 처음이었다. 이것으로 평생 할 고생과 액땜을 다 했다고 생각했는데 고구려의 태자는 아예 직접 전쟁을 겪어보라는 것이 아닌가. 

“실성, 그대의 뜻은 어떠한가? 대답하시오.”

실성은 눈앞이 캄캄했으나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쟁 전야

봄이 되자 백제와 가야, 신라로 떠났던 스님들이 돌아왔다. 태자는 왕궁의 문 앞까지 나가서 스님들을 맞이했다. 남루한 차림에 지팡이를 짚은 스님들은 태자의 지극한 예배와 공경을 받았다. 이러한 광경을 자주 목격하다 보니 고구려의 백성들 사이에서는 점차 스님들을 보면 차림새와 상관없이 최상의 예로 맞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문화가 되었다. 왕궁 안으로 들어가 내불당에서 간단히 예배를 마친 스님들은 곧바로 내전으로 향했다. 병색이 완연한 얼굴의 왕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올렸다. 

“어서 앉으십시오. 참으로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왕께서 마음을 많이 써주신 덕분에 무사히 잘 다녀왔습니다.” 

왕과 스님들은 서로 수척해진 얼굴을 마주 보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고도령은 준비해 놓은 차를 얼른 올렸다. 왕은 자꾸 나오려는 눈물을 차와 함께 삼키며 말했다. 

“스님, 이제 어디 멀리 가지 마십시오. 제자가 뵙고자 할 때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이제 날도 따뜻해졌으니 그동안 늘 마음은 있었지만 하지 못했던 일을 해야겠습니다.”

“어떤?”

왕의 얼굴에 마치 아이 같은 초조함과 불안함이 드러났다. 

“그동안 받은 은혜가 참으로 큰데 왕을 위해 해드린 것이 없습니다. 왕께서 허락하신다면 역대 선조들의 사직을 세우고 종묘를 수리하는 일을 승가에서 돕고 싶습니다.”

스님의 말이 끝나자 왕은 눈물을 흘렸다.

“항상 청하고 싶었으나 차마 먼저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부처님의 법에 맞게, 부처님의 법에 따라 역대 선조들의 사직을 세워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종묘를 수리하여 백성들이 근본을 잃지 않게 한다면, 제자는 편히 눈을 감을 것입니다. 태자는 이 두 가지 일이 끝나면 반드시 승가에서 이 일의 책임을 맡았음을 알리고 불교를 숭앙하는 교지를 내리도록 하라.”

“그리하겠습니다.”

“제자는 이제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남은 과업은 모두 태자에게 맡겼습니다. 스님들께서는 우리 태자가 성군이 되고, 전륜성왕이 되도록 부디 잘 보필하고 또 잘 기도해주십시오.”

“왕께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리하겠습니다.” 

스님들의 대답을 들은 왕은 눈물이 그렁한 얼굴로 활짝 웃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을 앞둔 5월, 왕은 세상을 떠났다. 잘 정비된 종묘에 위패와 신주를 모셨고, 승려는 밤낮으로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염불을 했다. 태자는 부왕의 시신은 고국양 땅에 안장했다. 봄부터 부왕의 장례가 끝날 때까지는 태자가 즉위한 이래 가장 고요한 나날이었다. 부왕의 혼이 기쁜 마음으로 극락에 도착했을 무렵, 왕은 마침내 벼려온 칼을 꺼내 들고 백제를 공격했다.

관미성 전투

즉위 후 귀족들의 사병제도를 철폐하고 병력을 통일시킨 왕의 군대는 용맹했고 병사들의 사기는 드높았다. 병사들은 주인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전쟁터에서 사망한 병사들은 귀족처럼 사찰에서 장례를 치러주었고, 남은 가족들의 생계는 국가에서 책임졌다. 일개 병졸이라도 공을 세우면 신분이 달라지기도 했다. 

18살의 왕은 4만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여 10개가 넘는 성을 빼앗고 곧바로 거란의 본토를 공략했다. 거란이 고구려의 변방을 노략질하고 백성들을 붙잡아갔기 때문이었다. 

왕의 대군이 몰려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거란의 군대는 달아났다. 붙잡혔던 고구려의 백성들은 무사히 귀환했다. 두 차례 승리를 거둔 왕은 말에서 내릴 틈도 없이 그대로 백제의 관미성을 공략했다. 왕의 군대가 관미성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들은 고도령은 승리의 소식이 전해지기 전까지는 나오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내불당으로 들어가 기도를 시작했다. 초문사와 이불란사의 스님들도 마찬가지였다. 국내성에 남은 노인과 아녀자들도 아침저녁으로 고구려 군대의 승리를 부처님께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백제의 북방기지 및 해상기지 역할을 해온 관미성은 사면이 가파른 절벽에다 바다에 둘러싸인 난공불락의 철옹성으로 한번도 함락된 적이 없는 천혜의 요새였다. 관미성 전투는 장장 20일 넘게 계속될 정도로 치열했다. 왕은 일곱 방향으로 성을 공략한 끝에 마침내 관미성을 함락시켰다. 관미성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승리의 함성이 국내성을 뒤흔들었다. 고구려 왕과 군대의 기세에 놀란 백제의 왕은 믿을 수 없는 현실을 잊고자 사냥에 빠져 있다가 조카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왕의 군대가 개선하는 날, 백성들은 모두 거리에 나와 환호성을 질렀다. 거듭된 전투로 초췌할 만도 한데 병사들의 얼굴은 마치 주몽신의 군사처럼 환하게 빛나는 것 같았고 왕의 얼굴은 눈이 부셔서 감히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환호하던 백성들은 왕이 지나가자 자신도 모르게 엎드려 절을 했다. 위풍당당한 개선 행진이었다. 

전륜성왕처럼 빛나는 왕이 왕궁으로 들어오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내불당으로 가서 부처님께 예배를 올린 것이었다. 전쟁터에서도 왕은 시간이 날 때마다 부처님께 기도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최소한의 살생으로 부디 백성들이 평안하게 살 수 있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부처님을 의지했기에 살육의 광기 속에서 승리에 도취하지 않고 전투를 치를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 

불상 앞에 엎드린 왕의 등이 흔들렸다. 전쟁터에서 죽은 아끼던 병사들과 장수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한번 속시원하게 울 수도, 슬퍼할 수도 없었다. 불상 앞에서 무거운 투구를 벗은 왕은 전쟁의 신에서 잠시 19살 청년이 되었다. 흔들리는 왕의 등을 바라보는 고도령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고구려가 승리했기에 잠시 잊었을 뿐 전쟁은 본디 참혹한 것이었다. 

[불교신문3492호/2019년6월5일자]

글 조민기 | 삽화 견동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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