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기록 ‘잃어버린 성지’] <4> 예산 가야사지
[현장기록 ‘잃어버린 성지’] <4> 예산 가야사지
  • 예산=박봉영 기자
  • 승인 2019.05.31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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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위 노린 정치적 야욕이 천년고찰 불태웠다
흥선대원군은 천년고찰을 폐사시키고 금탑이 있던 자리에 부친의 묘를 쓰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렇게 사라진 사찰이 천년을 이어온 예산 가야사다. ‘천자가 나는 자리’라는 이유로 남연군묘로 바뀌어버린 가야사터는 정치적 야욕의 희생양으로 역사에 남았다.

천자 나는 자리 명당 지목
천년고찰 가야사 불태우고
금탑 자리에 왕족 묘 조성

3층 석탑·석등 보덕사 보존
도량중심 아닌 한켠에 세워
교훈 전하다…선사의 기지

숭유억불을 국시로 삼은 조선 600년은 불교에 있어 암흑의 시기다. 대신 위축된 불교는 민초의 삶 속으로 녹아들었다. 왕실과 사대부의 핍박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그 중 천년고찰을 불태우고 왕족의 묘를 쓴 사건은 19세기 당시 시대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횡포이자 만행이다. 숭유억불 시대가 아니었다면 가능한 일일까.

외세로부터 나라를 보호하지 못한 고종 임금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야욕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그는 직계적손이 왕위를 잇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조선 후기 상황에서 왕위를 노렸다. 이른 바 명당에 조상의 묘를 쓰면 왕을 배출할 수 있다는 풍수 지관의 말에 사찰을 폐하고 그 자리에 부친의 묘를 썼다. 충남 예산 덕산면에 있는 남연군묘가 그 현장이다. 남연군묘는 가야사를 불태우고 탑이 있던 자리에 조성됐다. 

남연군묘가 있는 자리가 원래 가야사 절터였다는 것은 여러 역사서를 통해 확인된다. 남연군묘가 조성되기 전 발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는 가야산에 가야사(伽倻寺)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 망이·망소이 난 때 가야사를 점령했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시대에도 존재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가야동으로 불리는 이 지역은 99개의 사찰이 있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예산군지>에 따르면 이하응은 남연군의 무덤 자리를 찾기 위해 지사(地師)인 정만인에게 부탁했다. 정만인은 전국을 두루 살핀 뒤 가야사의 탑이 있던 자리를 ‘만대천자지지(萬代天子之地, 만대에 걸쳐 천자가 나는 자리)’로 지목했다. 금탑으로 불린 가야사 탑은 고려 나옹화상이 건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남연군의 묘를 경기도 연천에서 이 곳으로 이장했다. 탑을 파괴할 때 백자 2개와 단차 2덩이, 사리 3과가 나왔다고 이건창의 시문집 <명미당문집>에 남아있다.

가야사 3층석탑과 석등은 가야사를 떠나 인근 보덕사에 있다. 일제가 강점기 당시 반출하려던 것을 보덕사 스님이 막아 옮겨놓은 것이다.

지난 5월22일 가야사터를 찾았다. 가야산의 동쪽에 위치한 가야사 절터는 가야산 석문봉을 배산으로 넓게 형성된 골짜기 구릉이다. 풍수지리 명당의 요건인 주산과 덕산, 안산, 임수 등을 두루 갖췄다. 남연군묘에 올라서면 앞으로 펼쳐지는 풍광이 시원하기 이를데 없다. 제7교구본사 수덕사와 서산 개심사, 문수사, 보원사지 등이 모두 가야산이거나 가야산 줄기에 위치한다. 

1963년 첫 발굴조사가 이뤄졌을 때 석축대와 초석 등의 건물지 일부가 확인됐다.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세차례의 추가 발굴조사도 진행됐다. 이 조사에서 중정을 중심으로 한 8동의 건물지와 담장지가 확인되고 석조불상 8점과 청동불두 1점, 가량갑(加良岬) 명문기와, 치문 조각, 당초문·귀목문 암막새, 연화문·귀목문 수막새 등의 유물이 출토됐다. 

이때 남연군묘의 제각시설도 확인됐는데, 가야사지를 파괴하고 조성된 것이 증명됐다. 기록물로만 존재하던 천년고찰 폐사와 왕족 묘 조성이 유적을 통해 확인된 사례였다. 그러나 현재 사찰로 남아 있지 않은 까닭에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가야사터 전체 사역은 확인할 길이 없다. 200년의 세월은 절터인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너무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몇차례 진행된 발굴조사는 부분적으로 이뤄져 전체적인 발굴조사로 이어지지 못했다. 게다가 이미 농지로 개간된 상태여서 지속적인 노력이 따르지 않는한 가야사의 실제 규모를 확인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지금의 가야사터는 남연군묘가 된 구릉 주변으로 사찰의 것으로 추정되는 석재와 기와조각이 널려 있다. 남연군묘가 법당과 탑의 자리에 조성됐으니 가야사의 중심이었을 것이다. 남연군묘를 중심으로 100m 거리의 밭에서도 석재와 기와편을 쉽게 볼 수 있다. 가야사의 사역이 꽤나 넓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760년경 제작된 해동지도에는 가야사(흰색 원)가 표시돼 있다.

남연군묘와 300m 가량 떨어진 곳에 석불이 남아 있다. 미륵불로 불리는 민불 형식의 관세음보살상이다. 덕산도립공원의 임도를 따라 굽이굽이 걷다보면 실제거리 보다 훨씬 멀게 느껴진다. 이 돌부처님의 방향은 골짜기가 형성된 북쪽을 향해 있다. 가야사가 불타버리자 그 모습이 보기 싫어 돌아섰다는 전설이 훗날 생겨났다. 

이하응은 가야사를 불태운 자신의 업보를 소멸하기 위해 인근에 사찰을 지었다. 그곳이 보덕사다. 보덕사는 가야사터에서 2km 떨어진 산등성이에 지은 사찰로 가야사에 비한다면 규모는 크지 않다. 

보덕사는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처다. 수덕사 견성암에서 오도한 경희스님의 문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앞이 확트인 가야사터와 달리 깊은 산중으로 느껴질만큼 우거진 숲 속 도량이다. 가야사지에서 보덕사까지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다. 덕산도립공원관리사무소가 있는 곳까지 내려와 보덕사 방향으로 다시 오르는 고즈넉한 산길이다. 

보덕사에는 가야사 3층석탑과 석등의 부재가 남아 있다. 가야사 3층석탑은 원래 5층석탑이었으나 2개층이 멸실됐다. 이도 일제가 강점기 때 일본으로 반출하려던 것을 보덕사에 있던 스님이 지켜내 남게 된 것이다. 일본으로 반출됐다면 가야사는 조선 왕족에 의해 파괴된데 이어 일제에 의해 훼손되는 아픔까지 겪어야 했을 것이다. 어쩌면 반출 사실 조차 모른채 망국의 아픔을 간직한 석탑으로 남았을 수도 있다. 

가야사 3층석탑은 원래 있어야할 자리를 떠나 보덕사에 남았으나 도량의 중앙에 자리잡지 못했다. 석축을 쌓아올린 끝자락에 비켜서있다. 보덕사 터가 비좁은 이유도 있겠지만 왕족의 탐욕에 의해 사라진 가야사지를 기억하기 위해 원래 있었던 것처럼 보이려하지 않은 선사들의 기지가 담겨 있다. 보덕사 한켠을 지키고 있는 가야사 3층석탑의 교훈을 불교는 오래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역사는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오늘날의 남연군묘를 소개하는 대부분의 기록물은 이를 찬탈의 아픈 역사로 소개하고 있다. 비록 과거의 일이지만 조선 왕족이 자신의 야욕과 영달을 위해 천년고찰을 폐사시키고 묘자리를 쓴 만행은 오래도록 기록으로 남아야 한다.

가야사터 주변의 길과 밭에는 수많은 기와 조각과 그릇 조각들이 널려 있다.

[불교신문3491호/2019년6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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