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락교회 명지대학 수원성결교회 역사 보니…

일본종교시설 상당수가 교회로 
미군정 사찰마저 교회에 불하
기독교 계통 학교로 변하기도 
서울 경기 40개 적산 사원 중 
10곳도 안되는 곳만 사찰 유지
보수기독교는 정반대 주장 펼쳐

 

일본 천리교 자리에 세운 서울 영락교회 모습. 종단의 종교평화위원회를 비판하는 성명을 낸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만든 한경직 목사가 세운, 한국 최초의 대형교회다. 사진은 영락교회 홈페이지에서 내려받았다.

한국 현대 종교사 왜곡 성명

한기총은 지난 5월24일 발표한 성명에서 이승만 등 역대 3명의 장로 대통령이 불교 특혜 정책을 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성명은 “역대 우리나라 기독교에는 장로 대통령 세 분이 있었으나,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는 국가의 살림을 일본으로부터 빼앗아서 일방적으로 불교에 주었고,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는 군목을 절반으로 줄였으며,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는 공무원과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에 했던 성경공부와 신앙적 모임을 금지했었다. 

또한 황교안 총리의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에도 오히려 교회가 상대적으로 불교에 대하여 역차별 받아온 것이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교안의 개인 신앙을 가지고 사퇴운운하는 것은 그 뒤에 불교의 지휘부가 좌파의 세상으로 가려 하는 의도를 의심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기총의 이러한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국가의 살림을 일본으로부터 빼앗아서 일방적으로 불교에 주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거나 오히려 그 반대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국가의 살림을 일본으로부터 빼앗아 일방적으로 불교에 주었다’는 주장은 적산사찰 불하를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적산(敵産)은 패망하여 일본으로 도주한 일본인들의 재산을 말한다. 

해방 후 미군정은 이 적산을 한국인에게 불하하는데 종교시설도 해당됐다. 당시 귀속 재산으로 분류된 일본종교단체 재산은 천리교 신리교 등 교파신도 포교당 250여개, 일련종 조동종 정토종 등 일본 불교사원 120여개, 일본기독교회의 교회 54개, 학교 유치원 의료기관 사회사업기관 등 다양했다. 

이러한 종교 재산에 대해 군정청은 “일본 종교 재산은 조선의 동등한 종교기관에 이양된다”는 방침을 명시했다. 일본 기독교회 재산은 남한의 기독교회가, 일본불교 재산은 남한의 불교계가 접수할 수 있도록 한다는 원칙을 미군정청이 문서로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당시 문교부가 종단에 보낸 공식 문서에도 미군정청의 이같은 적산 불하 원칙이 명시돼 있다. 

적산 불하 원칙 어긴 미군정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상당수의 불교 사찰이 기독교로 넘어가 교회로 바뀌었다. 오늘날 서울을 비롯한 여러 도시의 대형 교회는 일제강점기 사찰 천리교회 신사 등 일본 종교시설 위에 들어섰다. 미군정청의 방침대로 사찰은 불교에 교회는 기독교회에 불하했다면 오늘날 종교 지평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미군정의 종교시설 불하 원칙은 이승만 정부의 제1공화국에서도 그대로 진행됐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 대통령 시절 국가의 살림을 일본으로부터 빼앗아서 일방적으로 불교에 주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정반대다. 

일본 적산 종교 시설 중 기독교로 넘어간 시설은 전국적으로 상당한 수다. 서울 동자동 천리교 본부는 한국인들에게 양도돼 한국천리교회 재단을 설립하고 법적 등기까지 마친 상태에서 한국기독교회로 이양되었다. 당시 월남하여 조선신학교를 운영하던 한경직, 김재준 목사가 신학교 부지를 물색하던 중 천리교유지재단이 있음을 알고 미군정과 교섭을 통해 한국천리교 본부를 접수했다. 

송창근 목사는 동자동 천리교 본부를 인수하여 바울교회(현 성남교회)를 설립했고, 서울 본부가 있는 저동에는 한경직 목사가 베다니교회(현 영락교회)를 설립했다. 장충동 천리교 서울본부를 인수한 김재준 목사는 야고보교회(현 경동교회)를 설립하고 조선신학교를 개설했는데 이는 오늘날 한신대학교다. 

이들 교회는 그 사실을 자랑스럽게 소개한다. 영락교회의 경우 “공산주의의 박해를 피해 월남한 27명의 성도들이 한경직(韓景職) 목사를 중심으로 모여 창립예배를 드리다. 교회이름은 베다니 전도교회라 하고, 일본천리교 경성분소의 신전을 개조하여 예배장소로 사용하다”는 교회 연혁을 소개하고 있다. 

대구동부교회 자리는 원래 천리교 경상교회였다. 마을 주민들이 천리교회 건물을 동사무소와 마을 공회당으로 사용하려 했으나 대구 동부교회 설립자인 손계웅이 미군정 당국의 도움을 받아 이 건물을 접수했다. 이외 경북 아천감리교회, 의정부교회, 인천중앙교회, 인천성산교회, 김천교회, 대전중앙교회, 반야월교회, 서소문교회 등이 천리교나 신도 종교시설을 인수해 교회로 바꾼 사례에 해당한다. 1948년 남산에 있던 조선 신궁 자리에는 기독교 박물관이 개관됐다. 

일본 불교의 사찰도 상당수가 기독교회로 넘어갔다. 1946년 8월26일 조선불교중앙총무원이 경기도 관재청장에게 보낸 ‘일본불교적산 사원 상황에 대한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불교계가 접수한 서울 경기 지역 40여개의 일본불교 적산 가운데 10곳도 안되는 시설만 불교로 넘어오고 4곳이 기독교 교회로 바뀌었다. 하왕십리 본각사, 부천 소사역 앞 소사포교소, 창사정 묘심사 등이다. 불교 사찰은 이외 고아원, 피난소, 일반 주거지 등 다른 용도로 바뀌었다. 

지방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속출했다. 오늘날 조계종 총무원에 해당하는 조선불교중앙총무원이 1948년 조사한 ‘경상북도 소재 전 일본불교 사원과 교회에 대한 조사’에 따르면 경북에 소재한 일본불교 적산 사찰 33개소 가운데 3곳이 교회로 넘어갔다. 성결교회가 된 상주군 청성사, 가톨릭 교회가 된 안동 진종본원사, 장로회 소속 교회로 바뀐 포항 진종본원사 본당이 이에 해당한다. 

수원성결교회는 원래 대각사라는 절이었다. 당시 수원성결교회 목사였던 박용현 목사를 소개하는 글에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박용현 목사는 1946년 9월에 수원성결교회에 부임했다. 수원교회는 대각사라는 일본불교의 붉은 벽돌건물사찰이었는데 내부는 한 아름이 넘는 육송기둥을 8개나 세운 복잡한 적산건물이었다. 박 목사는 우선 교인들을 동원하여 내부를 헐어내고 기둥을 목재소에서 제재하여 마루를 깔아 교회다운 건물로 리모델링한 후에 불하받았다. 이곳에서 그는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새롭게 일궜으며 성도들을 위해 헌신했다.”(목양일념으로 사역한 박용현 목사 편)

전주성결교회는 대지가 416평에 이르는 일본 본원사 소속 쌍전사를 불하받아 지었다. 금산군 보석사 주지가 “일본불교사원은 조선불교가 인수함이 옳다”며 항의했으니 교회로 넘어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고 한다. 이외 군산중앙교회, 조치원교회, 천안교회, 춘천중앙교회, 홍성 성결교회, 완도제일교회, 이리제일교회, 부천제일교회, 원주제일교회 등이 이 사례에 속한다. 

일제강점기 박문사 자리에 들어선 신라호텔과 주변 전경. 불교신문 자료사진

학교 군에 빼앗긴 사례도 

군대나 학교로 넘어갔다가 빼앗긴 사찰도 있다. 박문사 동본원사와 같은 서울 시내 사찰이 주로 이에 해당한다. 박문사는 초기에 조선불교학생동맹의 승려들이 접수해서 기숙사로 사용했던 것인데 군대가 사용한다는 이유로 미군정에 의해 소개(疏開)명령이 내려졌다가 후에 삼성에 매각되어 현재 신라호텔이 들어섰다. 

동본원사는 불교혁신세력이 접수하였다가 1948년 국민대학관(국민대학교 前身) 교사로 사용되면서 관리권을 잃었다. 한국불교가 접수하여 관리하고 있던 성동구의 게이죠 삼 여자고등학교(Keijo Third Girl’s High School)와 용곡여고는 미 24군단의 명령에 의해 기업과 군대에 넘어갔다가 1948년 불교혁신세력 가운데 하나인 조선불교청년당이 욱정(현재 명지대학교 자리)에 있는 호국사를 접수하여 국화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어떤 연유인지 개신교 측에 이전돼 가정여학교가 들어섰고 지금의 명지대학교가 되었다.
 

■ 적산은…

일본인 남기고 간 재산
해방 후 富 축적 기반

적산(敵産)은 귀속재산(歸屬財産)이라고도 하며, 미군정 법령에 의해 미군정에 귀속된, 국 · 공유재산 및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 축적된 재산을 말한다. 토지나 가옥 등의 부동산, 각종 기업체, 그와 관련된 차량 외 기계류 등이 있다. 

미군정은 적산을 미군정 소유로 귀속시켰다. 남한에 남아있던 공장 중 적산이 85%에 이를 정도로 남한 경제에 절대적 비중을 차지했다는 주장도 있다. 적산은 연고가 있는 사람이나 단체에 우선 배당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 일관성 없이 임기응변식으로 진행되거나 정치인, 관료 등과 결탁하여 암암리에 불하하기도 했다. 

적산 불하는 미군정에 의해 시작했지만 대부분은 이승만 정권 당시에 이루어졌다. 이승만 정권은 미군정의 불하 원칙을 그대로 승계했지만 정경유착이 극심했다.  

오늘날 대기업 중 상당수가 적산 기업 불하로 성장했다. 한 조사에 따르면 2700여 개 적산 불하 기업 중 2013년 현재 50여개가 존속한다고 한다. 적산 기업을 불하받아 대기업으로 성장한 기업 중에는 OB 맥주, 조선맥주, 한화, SK, 해태, 동양시멘트, 신세계 백화점 등이 있다.

※이 기사는 성관스님의 ‘일제와 미군정기의 종교정책이 불교종립학교에 미친 영향’ 박사학위 논문을 참조하였음을 밝힙니다. 

[불교신문3491호/2019년6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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