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 초 발간되는 성형외과 학술지를 접할 때면 목차부터 훑어보게 된다. 흥미로운 제목이 있으면 초록을 보고, 더 상세히 알고 싶으면 원문을 다운받아 서론, 재료 및 방법, 결과, 고찰 순으로 읽는다. 

국제적인 데이터베이스에 실린 학술지는 대부분 심사과정을 통하여 타당한 자격을 갖춘 논문만 게재한다. 그 중에도 해당 분야에서 유명한 저자의 논문은 권위를 갖고 많은 이들에게 읽히며, 학술대회에서나 다른 논문에 인용되고는 한다. 

물론 ‘공자님의 말씀’이라도 되는 것처럼 비판 없이 쉽게 받아들여질 우려가 있기는 하다. 

유명한 저자의 논문이라도 그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없는 경우도 흔하다. 영어실력이 부족한 경우도 있지만, 그 보다 저자가 자신의 수술방법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누락하는 바람에 읽는 독자가 그 방법을 재현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다.

발표 논문에 대해 질문이나, 비판, 혹은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생기면 독자는 교신저자(corresponding author)에게 편지를 쓰거나, 해당 학술지 편집인에게 ‘편집인에게 보내는 편지(letter to editor)를 보낼 수 있다. 나도 편지를 보낸 적이 여러 번 있다. 대부분 친절하고 솔직한 답변을 받아서 궁금증이 해소되었지만, 비판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거나 동문서답을 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저자와 독자의 소통이 가능한 지식의 수련 과정처럼 마음 수련도 깨달은 분과 배우는 자가 소통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붓다가 영원히 세상에 머물 수 있었다고 기록한 <대반열반경>을 다시 열어보았다.

만약에 “아난다여, 여래는 일 겁(劫) 이상도 이 세상에 머무를 수 있느니라”고 붓다께서 세 번이나 자신의 입멸(入滅)을 암시하셨을 때, 아난다가 미혹에서 벗어나 “머물러 주십시오”하고 세 번만 간청했다면 붓다는 아직도 인도에 살아계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나 아난다는 이렇게 들었다”고 시작하는 불경 대신 붓다께서 직접 설법하시는 동영상을 지금 유튜브로 볼 수 있었을지 모른다. 붓다는 홈페이지에 질문과 응답란을 개설하시어, 나같은 우매한 중생이 수련 중 의문점을 여쭈면 직접 답장 주실 수도 있을 터이다.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자신을 ‘의지처’로 삼는 어려운 길 대신 붓다께 ‘의지’하며, ‘저자와의 만남’으로 깨달음을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대승 소승, 5교 9산, 교파의 소의경전도 필요 없을지 모른다. 장경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빠져 죽는 일도 없을 것이다.

건져도 건져 내어도 
그물은 비어있고 
무수한 중생들이 
빠져 죽은 장경바다 
돛 내린 뱃머리에 졸고 
앉은 사공아

- 조오현 <만인고칙> 중 일부

그러나 아난다의 미혹으로 인하여 ‘붓다와의 만남’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영원히 죽지 않고 평안에 이른 세계에 머무는 붓다는 다시 이 세상에서 고통스러운 삶의 바퀴를 굴릴 이유가 없다. 그는 완전한 존재로서 그 곳에 머물고 있으며, 강을 사이에 두고 나는 피안의 언덕을 바라보며 깨달음을 갈구하는 마음의 수련을 홀로 해 나가야 한다.

[불교신문3488호/2019년5월15일자]

황건 논설위원·인하대 성형외과 의사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