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온 수좌에게 냄비밥 손수 삶은 국수 나눈 큰스님...
찾아온 수좌에게 냄비밥 손수 삶은 국수 나눈 큰스님...
  • 문경=이경민 기자
  • 승인 2019.05.10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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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오신날 특집] 서암스님 유훈 깃든 곳, 문경 청화산 원적사

원적사 가는 길, 맞아도 좋을 만큼 봄비가 내린다. 문경 도장산과 청화산 자락을 흐르는 쌍용계곡을 따라 굽이굽이 산기슭을 오른다. 연한 푸른빛을 띤 옥계수 비경에 감탄하던 찰나, “한 발 이리 디디면 상주고 이리 디디면 문경이라.” 스님이 툭 던진 말에 어딘지 가늠하던 경계조차 허물어진다. 문경시에서도 한참을 가야 만날 수 있는 농암면, 시간이 멈춘 듯한 오랜 마을을 지나 산 깊이 들어가고 나서도 절집 흔적은 찾을래야 찾을 수 없다. 팻말 하나 없는 길, 누군가 남긴 자취에 의지해 가파른 경사를 몇 번이고 넘고 나서야 ‘청정수행도량이니 돌아가라’는 표지판과 마주한다. <택리지> 저자 이중환이 묘사한 ‘병화가 미치지 못하는 땅’, 청화산이 품은 원적사가 그제야 제 모습을 비춘다.

 

원효스님이 창건한 원적사는 서암스님 유훈이 깃든 곳이다. 문경시에서 한참을 들어가고 나서도 가파른 경사의 산 길을 올라야 만날 수 있다. 특별한 일 없는 한 산문을 열지 않는다.

기거하는 이를 셈하기도 민망할 만큼 원적사는 인적을 찾기 힘든 곳이다. 1년에 단 한번, 특별한 일 없는 한 부처님오신날 즈음 산문을 여는 까닭이다. 공양주 보살을 두지 말 것, 필요이상으로 사찰을 꾸미지 말 것. 산문을 열지 말고 수행에만 전념할 것.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는 오도송 하나만 남기고 떠난 서암스님이 입적한 지 17년, 50년 가까이 원적사에 주석하며 오롯한 수좌의 모습으로 살았던 스님 유훈이 아직도 곳곳이 남아 맴돈다. 

원적사를 찾은 지난 4월29일에도 주지 범린스님과 재가 수행자 1명만이 사찰을 지키고 있었다. 서암스님 10여 명 상좌 중 딱 중간이라던 범린스님은 출가 후 30년 가까이 적을 둔 데 없이 살았다. 초야에 묻혀 살던 스님이 원적사 주지 소임을 맡은 이유는 하나다. 은사 서암스님 가르침이 끊어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내 알고 보면 소가지가 더러운 놈이거든요. 어디 한 군데 정착을 못해요. 총림은 물론 제방 선원 안 가본 곳 없이 다니기도 많이 다녔고 전기도 전화도 하나 안 들어오는 토굴에서 살기도 많이 살았지. 주지 소임하고는 거리가 멀어. 그래도 원적사에서는 살아야겠대. 우리 노장 스님 아프실 때 상좌들이 돌아가면서 모셨거든. 그 때 우리 스님이 하신 말씀이 있어. ‘시봉하려고 중 됐나 공부하려고 중 됐지!’ 꾸짖으시면서 공부하라 공부하라 하셨지. 그래도 꼭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는 말은 몸소 실천하셨어. 인연 다하면 나도 걸망 지고 떠나야지.”

원적사는 사(寺)보다 선원(禪院)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곳이다. 건물이라곤 ‘대웅전’ 격인 ‘원적사’ 현판이 달린 법당 한채와 출가 수행자와 재가 수행자를 위한 수행처와 요사채 두채가 전부다. 법당 꾸밈도 소박하다. 본존불인 석가여래좌상과 원적사를 창건한 원효스님, 중창주 석교스님 진영만이 오롯하다. 

세속에 초연한 살림만큼 기거하는 이들 또한 여태 두 자리 숫자를 넘어본 적 없다. 간혹 서암스님 흔적을 찾아 멋모르는 이들이 문턱을 넘지만 수행처라는 이유로 돌려보내기 바쁘다. 찾아오는 이 없으니 법당엔 불전함 조차 놓여있지 않다. 초하루, 칠석, 백중 등 사찰 행사는 물론 법회 한번 열지 않으니 살림살이는 궁핍하기 이를 데 없다. 

원적사 주지 범린스님이 은사 서암스님과의 추억이 담긴 사진을 들여다 보고 있다.

“서울 사찰하고는 맛이 좀 다를 낀데.” 궁핍이 티라도 날까 공양을 내 주는 주지 범린스님 말에 멋쩍음이 묻어난다. 스님 걱정과 달리 세월이 켜켜이 쌓인 나무 밥상엔 원추리, 머위, 구기자, 두릅 등 햇나물과 새순이 가득하다. 꾹꾹 눌러 담은 고봉밥은 한 끼 채우기 족하고도 남는다. 

먼 길 온 손님 대접한다고 없는 살림에도 정성을 들인 덕이다. 지난 동안거 때 공부하러 들어왔다 청화산 맑은 기운에 떠날 생각을 않고 있다는 재가 수행자가 스님 부탁으로 간만에 품을 낸 상이다.  

평소엔 가죽나물과 고추장으로 충분히 요기를 한다던 범린스님은 그래도 “부족함이 없다”며 시원스레 웃는다. 식솔이 많지 않으니 불사가 크게 필요치 않고 과하게 탐하지만 않으면 끼니 때우는 것이야 어찌어찌 넘기며 산다는 것이다. 수입이라고는 부처님오신날 들어오는 ‘등값’이 전부. 겨울만 되면 한 달 100만원이 넘어가는 난방비에 허덕이면서도 법당 만큼은 따뜻하게 온기를 유지한다.

이번 겨울 내 안거 수행했던 재가 수행자가 찬물에 손등이 다 터지고 얼음장 바닥에 발이 꽁꽁 얼었다고 투정 섞인 말을 건넸지만 범린스님은 그저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 살림 쥐어짜기. 계속된 걱정에 범린스님은 “자발적 곤궁이니 괜찮다”고 했다. 그래도 시원치 않은지 ‘옛 말’이라며 몇 마디 건넸다. 

“옛 말에 고을 원님 셋이 굶어 죽어야 중이 하나 굶어 죽는다 했어요. 무슨 소린가 싶죠? ‘부처님 모시고 살면 어떻게든 산다’는 말이지. 풍족하게 살자고 중 된 거 아니잖아요. 출가 수행자가 가난을 불편해하면 말이 안 되지. 그래도 가끔 도반 스님들이 찾아오면 내 돈으로 밥도 사주고 하는데 뭐 그러면 됐죠. 치레 없이, 필요한 것만 갖고 살라는 우리 노장 스님 말씀이어라.”

군더더기 없는 사찰 모습 만큼이나 원적사 대중 살림은 서암스님 모습을 빼다 박았다. 조계종 종정, 원로회의 의장, 총무원장, 봉암사 조실 등 종단 중책을 맡으면서도 “이제 떠나야겠다” 마음먹으면 자리를 훌훌 털고 미련 없이 떠났던 서암스님이었다. 

50대 이른 나이 봉암사 조실로 추대됐을 때도, 총무원장을 2개월 만에 사퇴했을 때도 원적사로 돌아와 수행자의 모습을 결연히 지켰던 서암스님은 줄곧 “승려의 세계는 거울 속 같이 투명해야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그 가풍이 오늘날의 원적사를 만들었다.

쏟아지는 빗소리가 거세지니 절로 스산한 마음이 들었다. ‘산중 홀로 살이’가 무섭지도 않으시냐 묻자 스님이 같은 말을 또 한번 반복했다. “부처님 모시고 사는데 뭐가 무섭냐”고. 하긴, 멧돼지라도 내려올라치면 아랫마을에서 데려다 놓은 얼룩무늬 강아지 ‘문수’가 ‘으르렁’ 대며 쫓아내고 길이 험해 여간해선 사람 발길이 닿지 못하는 곳이니 무서운 일 없겠다 싶었다. 

불전함 하나 없는 곳이니 도둑 걱정일랑 저만치 던져도 되었다. 비가 많이 오거나 눈이 펑펑 내리면 가파른 경사 때문에 멀리 떨어진 마을까지 또 어찌 가나 싶었지만 스님의 “걸어가면 된다”는 명료한 대답이 돌아왔다. 서른 한 살 늦은 나이, “봉암사 밥맛이 좋아 출가했다”는 범린스님은 “원적사는 물맛이 좋아 사는 재미가 있다”며 연신 싱글벙글이다.

원적사 법당. 석가여래좌상 왼편으로 서암스님 진영이 자리하고 있다.

“가난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문제”라던 스님이 세속의 이야기를 꺼냈다. 시끄러운 세속과 떨어져 살아도 귀동냥으로 세상일은 다 듣는다던 스님은 “승과 속은 하나가 아니다”며 “승가에서 세속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들면 그때부터 잡음이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본디 출가 수행자란 ‘빌어먹고 사는 사람’이라는 스님에게 가난은 그리 버겁지 않아 보였다.

청담스님, 성철스님, 서암스님, 법전스님, 조계종 종정이 네 분이나 나온 곳, 원효스님이 창건한 천년고찰일 뿐 아니라 예로부터 ‘비학승천혈(학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자리)’이라 해서 깨달음을 빨리 얻을 수 있는 수도처 이름 난 곳, 원적사 자랑에 여념 없던 스님이 오랜만의 손님  맞이에 피곤한지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스님은 서암스님이 살아계실 적, 전기, 전화조차 들어오지 않던 원적사를 찾은 수좌 스님들에게 직접 냄비밥을 해먹이고 몇가닥 안되는 국수를 직접 삶아 내줬다고 은사 스님 자랑도 했다. 

범린스님은 매일 새벽2시30분, 새벽예불을 위해 눈을 뜨고 나서 2시간의 정진, 그리고 사시, 저녁 예불로 주어진 날들을 채운다. 스님은 점심 공양 때도 나물 가득한 밥상을 앞에 두고 몇 가지 반찬만 쓱쓱 비벼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깨끗이 비운 그릇엔 물을 부어 ‘후루룩’ 마시는 발우공양도 했다. 수행자의 삶이 몸에 베인 탓이다. 그간 원적사를 지켜온 스님의 매일을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서암스님이, 원적사가 지켜온 것은 아마도 그런 것 아니었을까.

[불교신문3487호/2019년5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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