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 특집] 화엄사 노전(爐殿) ○○스님

 

평생 부전살이로 받은 보시금을 모두 승려복지기금으로 내놓은 화엄사 노전 스님은 보잘 것 없는 출가생활이지만 줄 것이 있어 행복하다며 환희 웃는다. 이 생에 받은 시은(施恩)을 다음 생에라도 갚고 싶다며 누군가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다. 스님은 끝내 이름을 밝히는 것을 원치 않았고 얼굴이 나오는 사진은 마다했다.

시은으로 살아온 출가생활
몇 푼 안되는 보시금 모아
잠시도 망설이지않고 희사

“다음 생이라도 시은(施恩)
갚을날 있었으면 좋겠다…
법명은 밝히지 말아달라”

부전(副殿)은 법당에서 향과 초를 올리고 마지, 불공, 염불, 재를 올리는 소임이다. 공식적인 소임이라기보다는 노전(爐殿), 지전(知殿)이라는 직함을 낮추어 부르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선원 방부에서도 볼 수 있는 노전과 지전은 큰 사찰에서는 꼭 필요하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노전과 지전 외에 이보다 낮은 부전이라는 소임이 생겨났다.

화엄사 노전 스님은 몇차례 인터뷰 요청을 거절했다. 그래서 무작정 만나러 가기로 했다. 사시사철 아름다운 지리산, 이맘 철 지리산은 골마다 봄기운 가득한 연두빛에 새 생명의 기운이 돋아난다. 지난 4월26일 노전 스님을 만나러 가는 길, 여전히 인터뷰를 승낙하지 않았다.

종무소에서 스님의 방을 안내 받아 찾아간 방, 3평 남짓의 방엔 조그만 냉장고와 가지런히 정돈된 옷걸이, 화장실, 벽장 속 이불장과 옷장이 전부였다. 스님은 소매 끝이 다 헌 옷을 입고 있었다.

한사코 인터뷰를 거부하는 스님에게 차 한잔 달라고 했지만 스님은 “한 것도 없는데 부끄럽다”며 밖으로 줄행랑을 치고 마루에서 서성였다. 서울에서 멀리 지리산까지 왔다는 말과 굳이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에 조금 누그러진 스님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분명 실례가 되는 일이었는데도 스님은 한번도 인상을 찌뿌리거나 화를 내지 않았고 웃는 얼굴이었다. 스님은 가만히 있어도 웃는 것처럼 보이는 ‘웃는 상’이었다. 어쩌다 출가를 하게 됐냐는 질문에 옛 생각을 떠올리는 듯 했다. 이 쯤 되면 반은 넘어온 것이다.

1971년 9월, 17살 때의 일이다. 서울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지리산이 가장 가까운 구례구역에서 내렸다. 배운 것 없이 고향 전남 화순을 떠나 객지생활에 지쳐있었고 가난은 더욱 힘들어 기차에 몸을 실었다. 구례구역에서 반나절을 꼬박 걸어서야 중학교 시절 수학여행을 다녀온 친구들이 말해주던 지리산 대화엄사에 도착했다. 출가생활의 시작이다.

당시 화엄사 주지는 도광스님이었다. 행자생활을 마치고 사미계를 받던 날, 도광스님은 가장 가까이 지내던 도반 도천스님이 있는 충남 금산 태고사로 그를 보냈다. 사제의 연이 맺어졌다. 도광스님과 함께 단짝 선객으로 이름을 날리던 도천스님은 어렵게 자리잡은 화엄사를 떠나 쓰러져가는 태고사를 손수 일구며 두문불출했던 큰어른이었다. 

명성을 듣고 찾아온 납자들에게도 함께 밭을 갈아야만 거량의 기회를 주곤 했다. 아흔의 노구에도 밭을 일구던 도천스님은 세파에 물들지 않은 선한 얼굴로 후학과 불자들을 마주한 천진도인으로 이름이 높았다.

노전 스님의 얼굴에서 도천스님의 선한 얼굴이 보였다. 3년여 은사 스님을 시봉하던 스님은 누구나 그렇듯 선방을 찾았다. 순천 송광사와 문경 봉암사, 강진 백련사 선원에서 안거를 난 뒤 문득 자신의 길은 참선과는 맞지 않다고 여겼다. ‘이 길을 가리라’ 다짐하며 내딛었던 수행길에서 좌절을 느끼고는 방황이 시작됐다고 한다. 이름 있는 큰스님들을 찾아 문하에서 경전을 공부하기도 했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여전히 길을 찾는 방랑의 수행자 신세가 됐다.

화엄사 노전이라는 직함은 부전살이를 오래 한 뒤에야 얻었다. 처음에는 인연 있는 스님을 찾아갔고 시간이 흐른 뒤에는 어디든 필요로 하는 곳에 머무르며 부전으로 살았다. 사찰에서 중요 소임을 맡거나 후원을 받지 않는다면 수행자들의 삶은 빈곤하다. 부전살이도 그랬다. 몇푼 안되는 부전 보시금으로 생활했다. 노전 스님은 이 때도 웃는 상이었을까? 묻지 않았지만 그랬을 것이다. 60이 넘은 나이에도 천진무구한 얼굴을 가진 것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부전살이에 큰 불만을 갖지 않았다. 출가수행자가 모두 같은 길을 가는 것은 아니다. 평생 선방을 다니며 화두를 붙드는 납자가 있고, 경전에 몰두하는 학자의 길을 가는 학승이나 강사가 있듯 저마다 자신에게 맞는 길을 걷기 마련이다. 하찮아 보일 수도 있는 부전살이였을텐데도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는게 너무나 행복했다. 지금도 행복하다”며 스님은 또 웃었다.

하나를 묻고 둘을 답하는 동안 취재수첩을 꺼냈다가 이내 다시 집어넣었다. 펜을 꺼내면 스님은 말문을 닫았다. 녹음도 불가능했다. 스님의 이야기를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곱씹었다. 또 걱정이 앞섰다. ‘이렇게 완강한데 사진은 어떻게 찍어야 하나.’

노전 스님이 지난 3월 희사한 승려복지기금은 2억1000만원. 적지 않은 금액이다. 다시 화엄사에 주석한지 15년, 얼마 안되는 보시금을 모아 이렇게 큰 돈을 마련하는 것조차 어렵게 여겨졌다. “그 큰 돈을 어떻게 모았느냐”는 질문에 악착같이 모았다고 했다. 

한푼이라도 쓸까봐 정기예금을 들었고 절대로 해지하지 않았다. 지금은 기운이 남아 있어 뭐라도 할 수 있기에 시줏밥 축내는 신세는 아니지만 좀더 나이가 들면 더 이상 절에 머무는 것이 눈칫밥 신세가 되리라 생각했다. 그땐 단칸방이라도 얻어야 하고 병원도 다녀야 할 일이었다. 그러려면 어떻게든 모아야 했다.

얼마 전 잘 알고 지내던 스님의 입적 소식을 접했다. 기도와 포교에 힘썼던 그 스님의 갑작스런 죽음은 출가생활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 스님의 입적 보다 입적 이후 벌어진 일이 충격적이었다. 

출가 후 평생을 속가와 인연을 끊고 살았건만 미처 종단등록 절차를 밟지 못한 그 스님 명의의 건물과 통장이 속가로 넘어갔다. 법적 상속인을 내세운 속가 사람들의 무례한 태도에 속수무책이었다. 참 많은 일을 겪었고 참 많은 말을 들었다. 그 중엔 이와 비슷한 일도 있었지만 이번처럼 크게 와 닿지는 않았었다.

이 일을 겪은 후 노전 스님은 의료, 주거, 연금, 장례까지 교구가 전담하는 시스템을 마련하고 있는 화엄사에 그동안 모아온 노후자금을 내놓았다. 종단과 사찰에 승려복지시스템이 없을 때 노후자금이 필요할는지 몰라도 지금은 굳이 그럴 이유가 없었다. 교구장 덕문스님과 몇차례 대화를 나누고는 평생 모은 돈을 승려복지기금으로 희사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잠시 대화가 끊겼다. 평생 모은 노후자금을 내놓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고 묻고 싶었으나 차마 묻지 못했다. 노전 스님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았다”면서 “오히려 내가 줄 것이 있다는 것이 정말 기뻤다”고 했다. 이땐 웃지 않았다. 그 기쁨이 다시 살아나 먹먹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일이 남았다. 사진 찍는 일이었다. 기도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다고 정중히 요청했다. 똑같이 거절했다. 설득과 거절이 반복되기를 10분여, 노전 스님은 “내세울 것 하나 없고 부끄럽기만 하다. 다음 생에라도 시은(施恩) 갚을 날이 있었으면 좋겠다”며 가사장삼을 수했다. 노전 스님은 끝내 법명을 거명하는 것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불교신문3487호/2019년5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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