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령아, 아이 걱정은 말고 어서 기력을 찾거라”

만남

고구려에 도착한 첫날, 아도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은 스승 도안대사가 했던 말과 어젯밤 순도스님과 나눈 대화로 가득했다. 핼쑥해진 얼굴로 알현을 위해 궁으로 향한 아도는 궁녀들의 뜨거운 시선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창백한 아도의 피부는 검은색 승복과 대조를 이루어 더욱 도드라졌고 삭발한 머리 덕분에 반듯한 이마와 그린 듯한 눈썹, 오뚝한 콧날이 더욱 돋보였다. 아도가 지나가자 궁녀들은 얼굴을 붉히며 귓속말을 했다.

“지난번 스님과는 전혀 다른 분이 오셨네.”

“그러게, 정말 미남이다. 젊은 분이 오셨네.”

“저 얼굴로 염불하는 모습을 보면 그 자리가 곧 극락이겠다.”

“목소리는 어떨지 궁금하지 않니?”

궁녀들은 아도가 한 번이라도 돌아보길 기대하며 쉴 새 없이 속닥거렸다. 하지만 아도의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묵묵히 앞만 보고 걷던 아도는 익숙한 향을 맡고 걸음을 멈췄다. 대전과 달리 아담한 전각이 자리 잡은 후원은 고요했다. 향내음을 따라 전각 안으로 들어간 아도는 불단 위에 놓인 불상을 보고 얼른 합장하고 고개를 숙였다. 예배를 마친 아도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폈다. 

‘이곳이 내불당이라는 곳이로구나.’

호화롭지는 않아도 정갈한 불당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꽃과 향로가 놓인 불단에는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어머!”

주전자를 들고 들어오던 순령은 불당 안에 누가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기척을 듣고 뒤를 돌아보던 아도와 순령의 시선이 만났다. 그 순간, 아도의 복잡했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아도라고 합니다.”

아도가 먼저 합장을 하며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잠시 멍하니 있던 순령은 얼른 주전자를 내려놓고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왕후 마마의 명으로 불당을 관리하고 있는 순령이라고 합니다.”

순령은 아도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아도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머릿속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들었다.

순도는 눈을 감을 채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고 
또 외울 뿐이었다. 

새 생명이 태어났으나 
한 생명은 떠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엄중한 이치란 말인가 

순령은 해동의 땅에 
부처님 가르침이 전하는 
거름이자 뿌리요 
어머니의 역할을 하고 떠났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알고 
아도와 순령을 고구려에서 
만나게 하신 것일까? 

아도는 이레 동안이나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열하루째 되던 날 … 

새로운 탄생

보름 뒤 사신들은 진나라로 돌아갔고 아도는 남았다. 아도는 아침이면 입궁하여 내불당에서 염불과 기도, 법문을 했고 저녁이면 성문관으로 돌아왔다. 반대로 순도는 낮에는 성문관에서 경전을 연구하며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 법문을 했고 밤에는 궁으로 들어가 왕과 왕후를 만나서 국정에 대한 자문을 했다. 순도가 신경 써야 할 일은 불법(佛法)과 국사 말고도 하나 더 있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자 순령의 배도 점점 불러왔다. 왕후의 배려로 순령은 궁 밖에서 지내고 있었다. 순령은 시간이 날 때마다 아도와 순도가 가져온 경전을 베껴 썼다. 

1년 중 밤이 가장 긴 동짓날, 순령의 진통이 시작되었다. 은밀하게 출산을 준비해왔으나 막상 진통이 시작되자 순령은 겁이 났다. 다행히 왕후가 미리 보내준 노련한 산파가 있어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초저녁부터 한밤이 될 때까지 진통은 점점 심해졌고 아이는 나올 기미가 없었다. 삼경이 지날 무렵 왕후가 의술을 아는 궁녀와 함께 순령을 찾아왔다. 왕후는 마치 누이처럼 순령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같은 시간 아도와 순도는 초조한 마음으로 내불당에서 부처님께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응애 응애”

긴 밤이 지나고 새벽이 밝아올 무렵, 마침내 아이가 힘찬 울음을 터트렸다. 

“수고했다, 순령아. 정말 고생 많았다.”

왕후는 눈물을 글썽이며 땀에 젖은 순령의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보거라, 참으로 예쁜 딸이란다. 아빠를 닮아 벌써 콧날이 우뚝한 것이 정말 예쁘구나.”

순령은 젖 먹던 힘을 다해 조심스럽게 아이를 안았다. 그리고는 정신을 잃었다. 

영원한 이별

“어찌 된 일이냐? 산모가 이리 정신을 잃다니!”

당황한 왕후가 소리를 지르자 궁녀가 얼른 순령의 맥을 짚었다. 한참 동안 맥을 짚던 늙은 궁녀는 어두운 얼굴로 왕후에게 고했다.

“출산하면서 피를 많이 흘린 데다 진통이 너무 길어 기혈이 모두 약해져 있습니다.”

“그래, 그래. 많이 힘들었을 테지. 어서 하혈을 멈추게 하고 기혈을 보하는 약을 지어 오거라.”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만 회복을 장담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궁녀의 말에 왕후는 잠시 말을 잊었다.

“그 말은 무슨 뜻이냐?”

“송구합니다.”

궁녀는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응애 응애”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 어서 유모를 찾아보게.”

산파의 연락을 받고 온 유모가 아기에게 젖을 물렸다. 잠시 후 왕후는 배불리 젖을 먹고 새근새근 잠이 든 아기를 품에 안았다. 

“순령아, 아무 걱정하지 말거라. 아이 걱정은 말고 어서 기력을 찾거라.” 

“마마”

“순령아, 정신이 드느냐? 이보게, 산모가 눈을 떴네.”

날이 밝아오자 왕후는 무거운 마음으로 차마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을 돌려 궁으로 향했다. 왕후는 궁에 도착하자마자 내불당으로 갔다. 순도가 산송장 같은 얼굴의 아도를 부축하고 앉아 왕후를 맞았다. 

“어찌 되었습니까?”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났습니다. 어여쁜 딸입니다.”

왕후의 목소리를 들은 아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왕후는 아도의 눈을 차마 마주보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부처님께서 순령이를 많이 어여쁘게 여기셨나 봅니다. 순령이는…. 곧 부처님 곁으로 가게 될 것 같습니다. 아도스님, 늦기 전에 어서 가서 순령이를 만나보세요. 스님 얼굴을 봐야 순령이가 마음 편히 눈을 감을 것입니다.”

아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길로 궁을 나갔다. 휘청거리면서도 단호한 걸음으로 순령과 아이를 만나러 가는 아도의 뒷모습을 보면서 왕후는 끝내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순도는 눈을 감을 채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고 또 외울 뿐이었다. 새 생명이 태어났으나 한 생명은 떠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엄중한 이치란 말인가. 순령은 해동의 땅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전하는 거름이자 뿌리요 어머니의 역할을 하고 떠났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알고 아도와 순령을 고구려에서 만나게 하신 것일까? 

궁을 나간 아도는 이레 동안이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열하루 째 되던 날, 아도는 아기를 안은 산파와 함께 궁으로 돌아왔다. 아도는 품에 작은 항아리 하나를 안고 있었다. 순령의 유골이 담긴 항아리였다. 

[불교신문3486호/2019년5월8일자]

글 조민기  삽화 견동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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