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읽는 한국禪사상사] <57> 화악문신과 정암즉원
[인물로 읽는 한국禪사상사] <57> 화악문신과 정암즉원
  • 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 승인 2019.05.01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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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남방에서 ‘육신보살’을 만나고 돌아왔네”

글자 전혀 몰라 출가 후에도 
농기구 보부상 떠돌던 ‘화악’ 

화엄경 한 구절에 크게 발심
주경야독…선지식 만나 깨쳐
산림법회 열자 1천여명 몰려

학덕이 뛰어나 제자들이 
구름같이 몰려드는 ‘정암’

자비=일, 보시=업으로 삼아 
어떤 물건이든 좋다면 다줘
날 저물면 호랑이가 외호도

부처님 재세시에도 승가에는 천민이나 여인이 있었다. 모든 존재는 평등하기에 부처님은 교단에 들고자 하는 어느 누구든 받아들였다. 어느 누구, 어떤 존재이든 성불할 수 있는 본성(불성)이 구족(具足)돼 있기 때문이다. 한 발 더 나아가 학문이 뛰어나다고 해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글자를 모르는 무지한 사람도 당연히 성불한다. 이를 여실히 드러낸 선사가 육조 혜능(六祖慧能, 638~713)이다.

시절인연

혜능은 영남(현 중국 광동성) 사람으로 홀어머니를 모시고 땔나무를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나무꾼이었다. 어느 날 나무를 해 집으로 돌아가던 중, 주막집에서 잠깐 쉬었다. 마침 방에서 한 승려의 <금강경>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 응당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구절에 시절인연이 닿아 출가를 결심한다. 이렇게 경전 한 구절에 정각을 이룬 수행자들이 많다. 

사리불 존자는 조카인 디가나카 비구가 경전 독송하는 소리를 듣고 그 의미를 새기다가 선정에 들어 깨달았다. 중봉 명본(中峰明本, 1263~1323)은 금강경 독송 중 ‘여래를 짊어진다(荷擔如來)’ 구절에서 깨달음을 얻었고, 만공(1871~1946)은 <화엄경>의 ‘법계의 성품을 관하니, 오직 이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든다(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구절에서 ‘만법귀일(萬法歸一)’ 화두를 타파했다. 

혜능이 호북성(湖北省) 황매(黃梅) 오조 홍인을 찾아가 “영남 사람인데, 법을 구하고자 왔다”고 하자, 홍인은 이렇게 말한다. “그대는 오랑캐 땅에서 온 하천한 신분인데, 어찌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사람에게는 비록 남북이 있을지언정 불성(佛性)에 어찌 남북이 있겠습니까? 스승님과 오랑캐가 다르지 않은데, 어찌 불성에 차별이 있겠습니까?”

바로 이 점이 불교의 핵심이다. 모든 존재는 누구나 시절인연이 도래하면 성불할 수 있는 것이다. 점수(漸修) 측면이 아니라 돈오(頓悟) 의미. 우리나라에도 혜능과 같은 인물이 있는데, 화악 문신(華嶽文信, 1629~1707)이다. 선사는 해남 대흥사에 상주했던 인물로 대흥사 13대 종사 가운데 세 번째에 해당하며, 법맥으로는 서산 휴정의 소요파 문도이다. 

‘육신보살’ 화악 문신

화악은 전라도 색금현(塞琴縣, 현 해남) 화산방(花山坊)의 김(金) 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집안이 가난해 사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지만, 글자를 모르니 경전과 담을 쌓고 살았다. 당연히 사찰의 부목이나 다름없이 일만 했다. 그러다 나이가 들자, 화악은 호구지책으로 농기구 보부상을 시작했다.(조선시대는 스님도 경제활동을 함) 곧 낫, 호미, 괭이, 보습 같은 농기구를 잔뜩 짊어지고 이 절 저 절 다니며 행상을 한 것이다. 

정약용의 <다산시문집>에 화악의 비명(碑銘)이 전하는데, 다산 정약용이 선사의 비명을 쓰게된 동기를 이렇게 밝혔다. ‘선사가 호매(豪邁)하되 어린 시절 불우했던 것이 매우 슬프고, 이를 극복해 큰 선지식이 된 것에 감명을 받아 비명 쓸 것을 허락했다’고 할 정도이다. 

그러던 어느 날, 화악은 해남 대흥사 상원루 부근에 이르렀다. 그는 많은 짐을 짊어지고 다니다보니, 지치고 힘들어 누각 밑에서 잠깐 쉬었다. 마침 누각 위에서는 야단법석이 열리고 있었다. 당시 화엄의 대가인 취여 삼우(醉如三愚, 1622~1684)선사가 승려들과 신도들을 모아놓고, 화엄종지를 강의하고 있었다. 

삼우는 해운 경열(소요태능 제자)에게서 법을 받았다. 삼우는 평소에 얼굴빛이 붉고 윤택해 ‘술 취해 있는 사람(醉如子)’이란 뜻으로 ‘취여’라는 별호도 갖게 되었다. 삼우는 담론을 잘 해서 듣는 이로 하여금 마력에 빠져들게 할 정도였다고 한다. 

화악이 화엄의 경(經) 구절을 듣는 순간 ‘쿵’하며 심중에 와 닿았다. 화악은 옆의 동료 행상에게 농기구를 다 건네주며, 앞으로 자신은 장사를 하지 않고 정진할 것이라고 말한 뒤 누각 위로 성큼 성큼 올라갔다. 화악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삼우스님에게 다가가 절을 한 뒤에 참회하며, 눈물을 비 오듯 흘리며 흐느꼈다. 

주위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이라며 화악을 끌어내려 했지만, 삼우스님은 주위 사람들을 저지했다. 화악은 ‘자신은 본래 승려이고, 대사의 법문 한 구절에 깨달은 바가 있어 대사 밑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의지를 밝혔다. 마침 이때 대흥사는 불사가 한창이었는데, 그는 낮에는 도끼질과 벽 바르는 일 등 부목이나 다름없이 일했다. 밤에는 솔방울을 주어다가 부엌에 불을 밝힌 뒤에 경전을 읽었다. 

이와 비슷한 선사로는 수월(1855~1928, 경허선사 제자)과 송나라 때 석두 자회(石頭 自回)가 있다.

석두는 대수 원정(1065~1135) 문하에 출가했지만, 부목이나 다름없었다. 

석두는 출가 전 직업이 돌을 깨고 다듬는 석공(石工)이었던 터라 출가해서도 불사에 동참했다. 석두 또한 문자를 알지 못해 사람들이 법당에서 <법화경> 독송하는 소리를 듣고 따라 외웠다. 그러던 차에 스승이 석두의 모습을 보고, 이런 화두를 주었다. ‘오늘 돌 부딪치는 소리, 내일도 돌 부딪치는 소리 속에서 생사(生死)가 오고간다. 그대는 무엇을 쪼개고 다듬고 있는가?’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단단한 돌이 쪼개지지 않아 힘껏 망치를 내리쳤는데, 돌과 망치가 부딪치면서 불꽃이 튀었다. 그 순간 석두는 불꽃을 바라보며 크게 깨달았다. 

화악이 낮에 일하고, 밤에 간경한지 3년이 지나 공부가 일취월장했다. 그는 경전에 어느 정도 혜안을 얻었음을 느끼고, 수년 동안 운수행각을 하며 정진했다. 이렇게 행각하며 선지식을 찾아다니면서 서래밀지(西來密旨)를 물어 정각을 이루었다. 화악은 40세가 되어 다시 삼우선사를 찾아가 입실 제자가 되어 법을 받았다. 이때 받은 호가 ‘화악 문신’이다. 

이런 소문이 전국에 퍼지자, 화악에게 공부코자 승려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왔다. 선사가 대흥사에서 화엄산림법회를 열자, 전국 각지에서 1000여명의 승속이 모였다. 

혜능이 <육조단경>을 설하면서 자신의 지난날의 행적과 자성(自性)의 종지를 언급했듯이 화악도 ‘지난날 자신의 행상부터 시작해 발심하던 이야기를 들려주며, 누구든지 확고한 신심을 갖고 원력을 세워 열심히 정진하면, 깨달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화악은 <화엄경>의 도리를 마치 강물 흐르듯이 설했다. 마침 이 대중 속에 묘향산에서 온 월저 도안(月渚道安, 1638~1715)이 있었다. 월저 또한 화엄종장으로 풍담 의심(서산-편양언기-풍담-월저)에게서 법을 받은 선사이다. 이 때 화악은 법을 설해 마친 뒤에 ‘나의 법문은 이것으로 마치고, 내일부터는 묘향산에서 온 월저스님이 이 법회를 주관할 것’이라고 했다. 

대중들이 한결같이 ‘월저스님은 아직 미흡하다’며 선사께서 산림법회를 모두 해줄 것을 간청했지만, 선사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화악이 이런 말을 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법, 내가 다 알고 하는 일이니, 그대들이 늙은 나를 언제까지 쉬지 못 하게 할 참인가?”

다음 날부터 화악보다 9세가 적은 월저가 상당(上堂)하여 열흘간에 걸쳐 ‘화엄산림법회’를 무사히 마쳤다. 월저는 법회를 마치고 묘향산으로 돌아가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내가 남방에 내려갔다가 육신(肉身)보살을 만나고 돌아왔네.” 

화악 문신이 열반할 즈음 두륜산에 벼락이 치고 천둥이 쳤다. 선사를 다비한 뒤에 나온 사리를 대흥사에 모셨다. 화악은 서산 소요파의 한 문도이다. 법맥을 정리하면, 서산휴정→소요태능→해운경열→취여삼우→화악문신→설봉회정(雪峰懷淨, 1678~1738)→송파각훤→정암즉원에 이른다. 

자비·보시 일관…정암 즉원

화악의 증손뻘 제자인 정암 즉원(晶巖卽圓, 1738~1794)은 16세에 출가해 20세에 화악의 손자인 송파 각훤(?~?)에게서 사집과 사교를 배웠다. 이어서 연담 유일(1720~1799)에게서 화엄을 공부했다. 정암은 당시 학덕이 뛰어나 제자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선사에게 ‘수계하고 호를 받은 자가 삼대같이 많았다’는 기록이 전할 정도이다. 글씨는 구불구불 기괴했지만 몇 글자만 써도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무엇보다도 정암은 자비를 일로 삼고, 베푸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늘 허름한 모자에 떨어진 옷을 입고 다녀 누가 필요하다면 어떤 옷이든 벗어주었다. 절 논 붙이는 소작인들로부터 도지(賭地)를 받을 때는 되를 깎아 받아 이득을 주는 반면, 벼를 살 때는 좋은 되로 주었다. 당연히 절 논 붙이는 사람들이 정암이 있을 때 도지를 바치려고 했다. 

또한 정암은 어떤 물건이든 좋다고 하면, 무엇이든지 다 주어 남아있는 물건이 없었다. 마을의 거지들도 스님 머무는 절 주변에 배회하는 일이 많았다. 간혹 스님의 자비심을 이용해 배고프지 않은 거지도 찾아가 음식이나 물건을 얻어갔다. 그래도 스님은 퍼주었다. 이를 아는 거지들이 회의를 한 뒤에 ‘누구든지 정암스님에게 찾아가 물건을 얻어오는 자는 공동으로 치아를 뽑는다’는 약속을 했다고 한다. 

또한 간혹 마을에서 볼 일을 보고, 저물어 사찰로 돌아갈 때면 호랑이가 뒤를 따랐다. 호랑이는 스님의 소매 자락을 물고 매달리고, 정암은 막대기로 호랑이를 치며 희롱함이 마치 주인이 큰 개를 놀리는 것 같았다. 일주문 앞에 이르러 스님이 “이제 가거라!”하면 호랑이는 꼬리를 흔들며 주위를 몇 바퀴 돌다가 멀리 사라졌다. 

정암은 순천 궁북도(弓福島) 중암(中庵)에서 법랍 42하(夏), 세수 57세로 입적했다. 스님이 입적한 후 스님에게 제자로 입실했거나 그 밑에서 공부한 제자들이 정암스님 이야기가 나오면, 자비로운 모습을 떠올리며 눈물을 글썽였다고 한다. 대둔사 제12대 강사인 아암 혜장(兒庵惠藏, 1772~1812)에게 법을 전했다. 

[불교신문3485호/2019년5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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