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동료에 칭찬 한마디로 네 가지 보시공덕 쌓는다”

부처님께서는 사람을 공경하고 감사하며 찬탄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사진은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룸비니 전경.

야단 꾸중 타박은 불교와 멀어
공경 감사 칭찬이 불교 가르침
한국 사회도 훈계 문화서 탈피 
불자도 감사, 칭찬 습관 들여야

스님들 수행록이나 초발심 시절 공부 이야기는 어김없이 ‘경책’으로 시작한다. 스승으로부터 아주 눈물이 날 정도로 엄하게 교육받아 수행을 접고 산을 내려갈 까 고민했지만 이를 악물고 공부하여 ‘성공’했다는 스토리는 어느 고승을 만나든 똑같다. 밥뜸을 제대로 들이지 못해 혼났다든지, 아까운 반찬을 소비해서, 혹은 농사일을 못해서, 공부하다 졸아서, 참선을 게을리해서,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 해서 등등 온통 야단맞고 꾸중 들었던 이야기다. 물론 어려운 출가생활을 견뎌내기 위한 단련 과정이다. 

훈계 꾸중으로 교육하는 승가

질책과 꾸중 훈계는 한국승단의 문화만 아니다. 한국의 문화다. 질책하고 잔소리 늘어놓는 것이 자식이나 후배를 아끼고 사랑하는 법으로 배우고 가르친다.  더 나아가 칭찬이 나쁜 것으로 여긴다. 교언영색(巧言令色)이 대표적인 격언이다. 속으로는 나쁜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 겉으로 좋은 말만 번드르르하게 늘어놓는다는 뜻의 교언영색은 칭찬하는 사람을 경계하도록 부추긴다. 실제로 사기꾼은 좋은 말로 접근해서 환심을 사서 곤궁에 빠트리니 좋은 말 하는 사람, 칭찬하는 사람을 멀리하라는 가르침이 틀린 지적이 아니다. 

불교는 하지만 야단보다 칭찬과 찬탄을 장려하는 종교다. 부처님 당시에 출가하려는 제자를 혼을 내어 가르쳤다는 이야기는 없다. 부처님께서는 ‘오라 비구여’라며 반겼다. 부처님께서는 많은 제자가 생겨 일반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을 하면 그때 그때 계율을 정하거나 가르침을 주셨지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을 내지 않았다. 

혼내고 잔소리하는 것을 미덕이나 윗사람의 바른 태도로 여기던 한국사회의 문화는 상당히 바뀌었다. 이는 경제 구조의 변화와 맥을 같이한다. 훈계, 꾸짖음, 경책은 집단노동에서 유효하다. 농사나 공장제와 같이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야 하는 생산구조에서는 한 사람의 잘못이 전체의 손실로 이어진다. 그래서 경험 많은 사람의 조언 충고가 중요하다. 하지만 현대 지식 정보 사회는 개인의 개성과 창의성이 생산성 향상에 더 필요하다. 사회 분위기도 함부로 남을 훈계하다가 폭력으로 형사처벌받는 식으로 바뀌었다. 

불교는 칭찬을 아주 중요시 한다. 칭찬을 핵심교리로 삼고 있는 종교다. 부처님도 칭찬하라고 강력하게 권하셨다. 대표적 불교교리가 ‘무재칠시(無材七施)’다. 재물이 들지 않아도 할 수 있는 7가지 보시다. 어떤 재가불자가 부처님을 찾아와 “저는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지 않는다”며 하소연했다. 부처님께서는 “그것은 네가 남에게 베풀지 않아서”라고 일렀다. 그 재가자는 “저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빈털터리”라며 “남에게 줄 것이 없다”고 울먹였다. 부처님께서는 “아무 재산이 없더라도 줄 수 있는 것이 일곱가지가 있다”며 하나씩 일러주셨다. 

그 일곱가지는 이렇다. 첫째 화안시(和顔施), 얼굴에 화색을 띠고 부드럽고 정다운 얼굴로 남을 대하는 것이다. 둘째 언시(言施), 말로 베푸는 보시다. 사랑의 말, 칭찬, 격려, 위로, 부드러운 말이 여기에 해당한다, 셋째 심시(心施), 따뜻한 마음, 열린 마음이다. 넷째 안시(眼施), 말 그대로 부드러운 눈길, 호감어린 눈이다. 

다섯째 신시(身施), 몸으로 돕는 보시다. 짐을 나누어 들어준다거나 청소를 하는 것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여섯째 좌시(座施), 가령 버스나 지하철에서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다. 일곱째 찰시(察施), 묻지 않아도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알아서 도와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일곱가지를 진실하게 행하면 일이 순조롭게 풀릴 것이라고 하셨다. 본인에게도 좋은 일이 생긴다는 뜻이다. 

칭찬만 해도 4가지 보시행 

그 내용을 자세히 보면 화안시, 언시, 심시, 안시가 모두 칭찬이다. 칭찬을 하면 내 얼굴이 우선 웃게 되고 웃으면 눈부터 밝고 부드럽게 변하고 눈이 변하면 얼굴 표정 전체가 환해지니 칭찬 하나로 네 가지의 보시를 한꺼번에 행하는 셈이 된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도 동시에 네 가지 보시를 하니 칭찬은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에게 큰 공덕을 가져다 준다. 부처님 말씀처럼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는 것은 남에게 인색하고 베풀지 않아서이니 칭찬 하나만으로 엄청난 공덕을 쌓게 되는 셈이다. 

불자들은 사실 늘 칭찬을 실천한다. 불자들이 자주 독송하는 <보현행원품>의 칭찬여래가(稱讚如來歌)가 칭찬의 공덕을 담고 있는 경전이다. 생전에 <보현행원품>으로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광덕스님은 그 내용을 이렇게 해설했다. 

“일체 세계의 구석구석에 부처님이 계시다는 이 가르침, 이는 바로 일체 중생이 부처라는데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특히 내 주변에 오시어 아버지가 되시고, 어머니가 되시고, 아내가 되고, 남편이 되고, 형제가 되고, 자손이 되어서 내 집안에 와 계시는 부처님, 우리는 이 부처님을 참으로 공경하고 칭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꾸짖고 나무라고 잘못하였다고 지적하기 이전에 원천적으로 거룩한 존재라는 것을 깊이 믿고, 잘하는 점을 인정하고 칭찬하고 공경해서 공덕을 우리 눈앞에 현전시켜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할 때 비록 잘하는 것이 적다 하더라도 이 적은 것이 커져서 불행을 덮어버리고 평화와 만족만이 집안에 넘쳐나게 됩니다. 서로 장점을 보고 서로 밝은 면만 보아 위해주는 말만 할 때 집안에 기쁨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칭찬하는 말을 아끼지 말고 사용해서 집안에 평화와 만족이 가득하도록 합시다.” 

스님은 가족을 칭찬하는 것이 곧 국가 번영이라고 강조했다. “이것은 집안을 위하는 길이고 그 가족에게 기쁨을 주는 길이고 나아가서는 국가를 번영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우리는 이제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따지지 말고 잘한 것을 인정하고 칭찬해주고 같이 기뻐해주는 일을 꼭 실천합시다.”

돈 안들이고 짓는 공덕

또 하나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되새겨야할 불자의 생활 신조는 감사다. ‘감사’는 불교에서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가르침이다. 자신을 아무리 구박해도 늘 감사하게 여긴 인욕보살이 있다. <법화경>에 나오는 상불경보살(常不輕菩薩)이다. 이 보살의 이름이 ‘상불경’으로 붙인 것은 남다른 인연이 있다. 

그는 만나는 사람들을 모두 예배하고 찬탄하면서, “나는 당신들을 깊이 존경하여 감히 가벼이 여기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당신들은 멀지 않아 보살의 도를 닦아서 부처가 될 본성을 지니고 계시는 분들이시기 때문입니다”라고 합장 예배했다. 누구에게나 ‘항상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고 말했기 때문에 상불경(常不輕)이라는 이름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상불경이 차별 없이 평등하게 건네는 찬탄의 인사말이 모든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지는 않았다. 어떤 사람은 화를 내고 얼굴을 붉히며 욕설을 하고 심지어 때리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고 “당신들은 부처가 될 수 있다”며 찬탄했다. 

상불경보살이 전해주는 가르침은 사람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종자를 지니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연이 있든 없든, 그가 누구든, 나에게 이익이 생기는가 여부와 관계 없이 존중하고 감사한 마음을 여겨야 한다는 사실이다. 상대방이 존재함으로써 내가 존재한다는 마음의 표시가 바로 감사다. 

감사는 사람을 공경할 때 나타난다. 공경이란 상불경보살에서 보듯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이다. 존중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까닭은 일체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를 아는 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이종린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공경은 모든 행의 근본입니다. 공경이 없으면 이 세상 어떤 인간관계 사회질서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부모 자식 스승 제자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도 공경이 전제가 되어 있을 때입니다. 부부관계가 악화되는 것도 부부간에 공경심이 없어질 때입니다. 또한 공경은 아상을 사라지게 합니다. 거만한 마음으로 공경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공경은 하심도 저절로 되게 합니다. 공경은 상불경보살의 성불일화에서도 보듯 깨달음으로 이끌어 줍니다. 

또한 깨달은 이의 본래면목중 하나가 공경입니다. 깨달으면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일체중생 일체만물에 대한 공경심인 것입니다. 모든 부처님이 이를 증명합니다. 일체중생이 본래 부처구나 겉보기에 비천한 저 미물이 본성에서는 부처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구나 이런 사실을 사무치게 깨닫는 분에게서 공경이 우러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경심이 없는 분은 진실로 깨달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행원은 공경하는 마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공경은 어린사람 아랫사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이든 분 윗사람도 젊은 분 아랫 분에게 해야하는 것이 공경입니다. 누구나 누구에게나 해야하는 것이 공경입니다.”

갑질 사회 재난, 공경심 결여가 원인

공경하는 마음이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이 바로 감사다. 다시 이종린 박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현실적으로 공경심을 내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감사하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에게 해준 게 하나도 없는 줄 알았던 부모님이, 나에게 야단만 치는 줄로만 알았던 스승님이, 사실은 모든 것을 바쳐 나를 기르고 키워주신 것을 알 때, 망둥이처럼 날뛰던 마음과 빗나가기만 하던 행동은 비로소 방황을 멈추고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인들이 ‘은혜를 알라, 감사하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내가 가야 할 보현의 길에서> 

‘갑질’이나 사회 재난 참사 등은 모두 사람을 공경하지 않아서 감사한 마음을 갖지 않아서 생긴 문제다. 성철스님은 백련암에 공양을 올리러 오는 신도들에게 “절에 공양하지 말고 네 이웃에게 공양 올리라”고 경책했다고 한다. 부처님 전에 공양 올리는 자체를 나무란 것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사는 사람을 공경하고 그들에게 감사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을 공양하는 길임을 일러주신 것이다. 

불자들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절에서 만나는 도반들에게 웃으며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인사하고 아파트 경비원, 택배 기사에게 목례하며 인사하고 감사하는 자세를 갖는다면 사회는 한층 밝고 건강해질 것이다. 부처님께서 우리 중생들을 위해 이 세상에 나투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불교신문3485호/2019년5월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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