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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두의 고승전] <36> 원허당 인홍선사“수행자가 신심 없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만도 못해”
‘당당하고 늠름하다’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인홍스님 모습. “스님께서는 후학들에게는 서릿발 같은 엄함과 바다와 같은 넓은 자비로 포용하시고 사람 몸 받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 어려우니 바르게 부지런히 정진하며 살 것을 몸소 실천하여 보이는 귀감이셨습니다.” - 묘엄스님 조사 중에서

성철스님 가르침 따라 정진
석남사 최초 3년 결사 회향
칠순 넘어 상무주암서 안거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고 늠름 
비구니 위상 곧추세운 선지식

유품이라고는 평생 모시던 
불상과 경책, 염주가 전부
‘청빈 검약의 수행자’ 상징 

늘 대중과 예불 공양 운력
퇴락한 석남사, 여법하고
장엄한 도량으로 일궈내 

“승(僧)자를 해체하여 보아라. 사람 인(人)변에 일찍 증(曾)이니 보통사람보다 모든 면에서 먼저 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사표(師表)가 되는 것이 수행자이다. 부처님 제자는 일체중생의 사표가 되어야 한다. 청빈으로 수도생활의 생명을 삼고 일체중생을 위하여 기도하며 끝없이 하심하고 봉사해야 한다.” 

“수행자는 신심과 사상이 뿌리요 생명이다. 그것이 흔들리면 승가는 절집에서 밥만 얻어먹고 살아가는 단체일 뿐이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중은 신심이 없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만도 못하다’고 했으니 수시로 자신의 발아래를 살펴라. 내 생각의 뿌리와 믿음을 살피고 또 살펴야 한다.” 

“출가자는 수행을 본분사로 삼아야 한다.” “출가자는 대중과 함께 있어야 한다. 독살이는 비상(砒霜: 무서운 독약)과 같은 것이다.” 

“가지산 호랑이가 되어야”

조계종 대장로니(大長老尼) 원허당(園虛堂) 인홍선사(仁弘禪師,1908~1997)는 자신에게는 누구보다 엄격했고 정진과 계율에는 누구보다 철저했다. 비구니의 존재가 미비하던 시절, 그 위상을 세우고 출가정신을 확고히 세우기 위해 부단히 애쓰며 후학들의 교육을 위해 헌신한 어른이다. 항상 ‘청빈 검약의 수행자’로서 유품이라고는 평생 모시던 불상과 경책 그리고 목에 걸고 있던 염주가 전부였던 분이다. “열심히 정진하여 가지산 호랑이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라며 후학을 경책했고 “대중과 화합하여 석남사를 잘 지키라”고 당부했다. 인홍스님은 출가이후 평생토록 대중과 함께 했다. 

예불과 공양 운력 등 항상 대중과 함께였다. 공양 때 대중과 다른 반찬이 한 가지라도 당신 상에 오르면 가차 없는 호령을 내렸다. 1957년 석남사 주지로 부임한 이후 퇴락한 석남사를 오늘의 여법하고 장엄한 도량으로 일군 어른이다. 언제 어디서나 당당하고 늠름한 언행으로 출가수행자의 위의(威儀)를 잃지 않았고 비구니의 위상을 곧추세운 선지식이다.

인홍선사는 경북 영일군 대송면 동촌리 901번지에서 아버지 월성(月城) 이공(李公) 종순(種淳)님과 어머니 진양(晋陽) 하씨(河氏) 수이(水伊)님의 3남2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귀동(貴童)이다. 모친께서 갑옷 입은 장군이 백마를 타고 방으로 들어오는 태몽(胎夢)을 꾸었다고 한다. 어릴 때 용기와 총명이 남달라서 조부께서는 늘 귀동이가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스님은 출가전의 일을 일체 말하지 않아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전통 있는 유복한 가정에서 신학문도 넉넉히 배웠다고 짐작된다. 

늘 정업(淨業)을 좋아하고 세연(世緣)에 애착이 없던 스님은 1941년 9월 34세 때. 오대산 월정사 지장암에 들어가 정자(淨慈)스님을 은사로 입산하여 이듬해 상원사 한암(漢岩)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고 월정사 지장암에서 하안거 했다. 1943년 강릉포교당에서 일운(一雲)스님을 계사로 보살계를 1945년 서울 안국동 선학원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 구족계를 받았다. 1945~46년 충남 예산 덕숭산 정혜사 만공스님 회상에서 하안거를 나고 1947~48년 월정사 지장암에서 동안거와 하안거를 했다. 

수행의 일대 전기 

1949년 스님 나이 42세 때 부산 월내 묘관음사에서 동안거 중 당신 수행의 일대 전기(轉機)를 맞았다. 당시 묘관음사에는 향곡, 성철스님이 수행하고 있었다. 성철스님이 인홍스님에게 공부의 경계를 물었다. 성철스님이 스님의 멱살을 잡고 ‘일러보라’고 다그치는데 인홍스님은 아무 말도 못했다. 은산철벽(銀山鐵壁)이 앞을 가로막아 한 걸음도 나아 갈 수 없었다. 

그때 성철스님은 인홍스님에게 이렇게 법문했다. 

“하루 중 아무리 바쁠 때라도 화두가 끊어지지 않고/ 꿈속에도 밝고 밝아 항상 한결같아도/ 잠이 깊이 들었을 때 화두가 막연하면/ 다겁으로 내려오는 생사고를 어찌하리요(日間活活常作主 夢裏明明恒如一 正睡着兮便漠然 塵劫生死苦奈何).” 

일찍이 인홍스님은 오대산 시절 한암스님의 <금강경> 법문을 듣고 한 생각이 열려 게송을 읊은 적이 있다. “세간에 영화롭고 욕되는 일들/ 알고 보니 거품이요 몽환(夢幻)이로다/ 오늘날 법문 듣고 모두 잊으니/ 천지가 내 것이요 광명뿐일세.” 지견(知見)이 열려 게송을 읊은 인홍스님도 성철스님의 법문에는 이렇듯 깜깜 절벽의 자신을 돌아보고는 다시금 대용맹, 대신심을 일으켰다. 이후 인홍스님은 성철스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평생을 그 가르침을 따라 수행정진 했다.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나자 경북 문경 대승사 윤필암에서 정진했다. 1951년 전란을 피해 경남 창원 성주사에 온 스님은 선원장으로 취임하여 정법수호의 회상을 열었다. 전국에서 모인 40여명의 대중과 함께 결사(結社)를 했다. 여기서 인홍스님을 비롯한 대중들은 1947년 청담, 자운, 성철스님이 주도한 봉암사 결사를 그대로 실현했다. 

1952년 경남 양산 천성산 조계암에서 하안거, 월정사 서대(西臺)에서 동안거를 하고 이듬해 태백산 정암사에서 하안거를 했다.

1954년 47세 때 처음으로 주지를 맡았다. 경북 봉화군 소천면의 홍제사였다. 이때는 종단의 정화불사가 한창이었다. 스님은 비구니 대표로 참가했다. 11월 제2회 임시종회에서 비구니 종회의원으로 선출됐다. 1955년 팔공산 동화사 초대 비구니총림설립준비위원회 총무로 임명됐다. 1956년~66년 중앙종회의원 역임. 1957년 50세에 경남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석남사 주지 취임. 1976년 주지직을 사임할 때까지 20여년 석남사 중창 대작불사를 벌여 오늘의 석남사를 일구었다. 대웅전을 비롯해서 극락전, 사리탑, 정수원, 누각, 강선당, 언양포교당, 동인암 그리고 요사체 9동을 신축했다. 

“죽는 날까지 정진하고 싶다” 

1962년 석남사 신도들이 주축이 되어 선림회(禪林會)를 결성, 8942평의 논을 매입했다. 1963년에는 선원 심검당(尋劒堂)을 개원했다. 

1965년 성철스님이 경북 문경 봉암사에서 <육조단경>, <증도가> 및 중도이론을 대중들에게 최초로 설법했을 때 문경 김용사 양진암에 머물면서 설법을 들었다. 1967년 동안거에는 해인사 홍제암에 머물면서 해인사 궁현당에서 열린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을 들었다. 1968~71년 석남사 최초 3년 결사를 원만회향 했다. 대한불교비구니 우담바라회 재단이사장에 취임(1971년). 1971년(64세) 쌍계사 칠불암(현 칠불사) 선원에서 하안거를 했다. 1973년 석남사 삼층 사리탑을 건립하고 1979년 72세의 노구(老軀)에도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동안거, 정진열을 불태웠다. 1980년에도 상무주암에서 하안거를 했다. 칠순이 넘은 노장임에도 ‘평생정진’이 신념인 스님의 정진열은 식을 줄 몰랐다. 

1981년 지리산 대원사에서 하안거. 1986년(79세) 조계종 단일계단 비구니 별소계단 전계화상으로 추대됐다. 1987년 전국비구니회 총재로 추대됨. 1990년 83세에 석남사 심검당에서 가진 3년 결사에 참여했다. 

1997년 음력 3월8일 석남사 별당에서 입적했다. 법랍 56년, 세수 90세. 4월18일(양력) 영결식과 다비식을 봉행. 1999년 석남사에 부도를 봉안하고 2007년 4월 인홍스님 일대기 <길 찾아 길 떠나다(박원자 지음, 김영사 刊)>가 출간됐다. 

“출가의 길이란 말이다. 오직 인욕의 길이란다. 성불할 때까지 인욕하면서 정진하고 또 정진하고. 나한테는 이롭지 않은 상대방의 행위에 대해서도 인욕하는 길이다. 세상사 모든 것이 나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고 어떤 경우에도 참고 기다리면서 가는 길이다. 그게 부처님이 말씀하신 둘이 아닌 불이(不二)의 삶이며 지혜로운 길이다. 우리 출가수행자는 인욕과 동체대비의 의미를 거울삼아야 한다. 나는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진정한 성불은 동체대비에 있음을 알았다.” 

“나는 죽는 날까지 정진하고 싶다. 좌복 위에서 죽는 수행자가 되고 싶구나.” 

“삼세불조(三世佛祖) 가신 길을 나도 가야지/ 구순생애(九旬生涯) 사바의 길 몽환 아님 없도다/ 일엽편주(一葉片舟) 두둥실 떠나는 곳/ 공중(空中)에 둥근 달 밝을 뿐이네.”   
- 인홍스님 열반송

인홍스님은 부처님 길에서 당신의 길을 찾았고 그 길을 걸었다. 

■ 도움말 : 법희스님(석남사) 불필스님(해인사 금강굴) 백졸스님(부산 옥천사) 
■ 자료 : ‘조계종 대장로니 원허당 인홍선사, 적조탑 조성 연기문’(석정스님), ‘원허당 인홍선사 행장’(일타스님), 인홍스님 일대기 <길 찾아 길 떠나다>, 불필스님 회고록 <영원에서 영원으로>.

[불교신문3485호/2019년5월4일자]

이진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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