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의 본처는 마음이요 실천도량은 현실이지”

돈이 많고 지위가 높아도
자기 마음자리가 없으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거야

무릇 생명 있는 모든 것을
존중하는 마음자세 필요해

                   …

사회참여는 실천수행의 하나
중생 위해서는 삿된 것 타파 

염불만 하면서
중생을 구할 수 없을 때는
직접 싸우는 것도 보살행 

봉선사에서 출가해 80여 년 동안 수행과 교화에 전념했던 운경스님. 스님은 항시 따뜻한 미소로 대중들의 아픈 마음을 돌봐줬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원로의원 운경스님과 인터뷰를 약속한 시각이 조금 남아 있어 중앙승가대 학인 스님인 지환스님이 거처하는 요사채로 가서 차를 대접받았다. 이 요사채 일부가 산신각과 함께 6·25 한국전쟁 때 소실되지 않고 남은 유일한 건물이다. 그리고 지환스님이 계시는 그 방이 바로 춘원이 묵었던 곳이기도 했다. 필자는 잠시 감회에 젖어 그 아담한 방을 감상했다. 봉선사에 도착하여 필자가 감명을 받은 것은 전각과 요사의 당호였다. 대웅전은 한글로 ‘큰법당’이었고 운하당, 방적당 등이 그러했다. 엄격한 계율을 중시하는 승가에 적당한 아취가 풍기는 이러한 당호를 보며, 이 곳에 주석하셨던 스님들의 넉넉한 승풍을 엿볼 수 있었다. 운경스님이 계시는 곳은 다경실(茶經室)이었다. 차를 마시며 경(經)을 읽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스님은 지난해에 사고로 다쳐서 아직도 자유로운 거동이 불편하셨지만 세수가 91세가 믿기지 않을 만큼 정정해 보이셨다. 긴 시간의 인터뷰에도 조금의 흐트러짐이 없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응해 주셨다. 

- 스님 건강해 보이십니다. 

“지난해에 방에서 넘어져 방광뼈를 다쳤어. 나이가 들면서 그런지 잘 낫지 않아. 움직이려면 목발에 의지해야 해.” 

- 빨리 쾌차하시기 빌겠습니다. 당호가 다경실인데 스님께서 손수 지으셨는지요. 

“아냐 운허스님이 퇴로지처(退老之處)로 이 건물을 짓고 이름을 붙였지. 차를 마시며 경을 읽는다는 뜻이야. 깨달음의 본처는 마음이지만, 실천도량은 중생이 있는 현실이야. 선(禪)과 현실을 한 그릇으로 보는 불이공안(不二公案)이지. 다선일미(茶禪一味)라 하지 않는가. 차를 우려내는 마음이나 경을 읽는 마음이 같다는 뜻이야. 불교는 바로 중생 가운데에서 꽃을 피워야 해.” 

- 대웅전 편액을 ‘큰법당’이라고 한 것이 매우 특이합니다. 

“운허스님이 그렇게 했어 스님의 6촌 형인 춘원 이광수 씨와 만해 한용운스님도 자주 오셨지. 그분들의 영향도 있었어.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많은 사람들이 읽도록 하자고 하셨지. 그래서 운허스님은 역경사업도 활발히 하셨어.” 

- 경내에 유치원이 있던데, 이 곳 마을 어린이들을 가르치십니까. 

“연꽃유치원이야. 마을 어린이들이 와서 공부하지. 고래로 우리 절에서는 사회교육사업을 활발히 해 외국 갔다 오신 스님들이 많이 계셨는데 이곳은 보다시피 산촌이었어. 해방 이듬해에 운허스님의 제창으로 광복된 조국에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가 의논하던 끝에 학교를 세워 인재를 길러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지. 몇몇 절에서 힘을 보태 진접읍에 중ㆍ고등학교를 세웠어. 춘원 같은 이도 여기 와서 아이들을 가르쳤어. 지금도 아이들이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지. 밝은 세상을 만들려면 먼저 어린이들을 잘 가르쳐야해.” 

- 스님께선 하루 일과를 어떻게 보내십니까. 

“다리가 불편해서 요즘은 예불에도 못 올라가. 새벽 3시에 일어나 여기서 독경을 하지.” 

- 평소 대중들께 강조하시는 말씀은 무엇인지요. 

“수행을 열심히 하라고 해. 자율 속에 엄격함을 길들이도록 하라고 하지. 방적당도 바로 그런 수행을 하는 방이야.” 

- 잠시 일주문 바깥 세상이야기도 좀 해보겠습니다. 며칠 전에 큰 사고가 있었지요.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는데 스님께서도 그 뉴스를 보셨습니까. 

“봤어.” 

- 왜 이런 사고들이 계속 일어날까요. 

“겉보기에는 공사를 부실하게 한 게 첫째 원인이겠지만 더 큰 원인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 세우는 공사를 부실하게 해서 그래. 마음 바리가 튼튼하지 않으면 잔바람에도 흔들리지. 온갖 탐욕이 스며들게 돼. 어떤 일을 하든 선업(善業)과 인연을 맺으려는 마음을 가지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지.” 

- 사람을 사랑하기보다. 물질에 대한 욕심이 앞서서 그렇다는 말씀이지요. 

“아무리 돈이 많고 지위가 높아도 자기 마음자리가 없으면 그렇게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거야. 무릇 생명 있는 모든 것을 존중하는 마음 자세가 필요해.” 

- 그럼 깨닫는 마음은 어떤 모습입니까. 

“마음은 원융무이하여 모양도 빛깔도 없어. 역대 조사 선지식들이 겨우 나타낸 게 일원상(一圓相)이야. <선가귀감>에 보면 육조 혜능조사께서 ‘여기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한 없이 맑고 신령스러워 일찍이 나지도 죽지도 않았다. 이름 지을 길 없고 모양 지을 길 없고 모양 그릴 수도 없다’고 했어. 모자람도 넘침도 없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마음의 실체를 설명한 게야. ” 

- 스님께서 출가하신 인연이 궁금합니다. 

“내 속가 고향은 서산군 운산면이야. 유복자로 태어났는데 집안이 넉넉지 못해 서울에 있는 외가에서 주로 자랐어. 할머니 따라 화계사로 봉선사로 절 구경을 자주 다녔는데 주위에서 살기도 어렵고 하니 중 되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해서 들어 왔어. 와서 살다가 보니 여기가 바로 피안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출가를 했지. 처음에는 먹고 살기위한 방편으로 왔으나, 곧 그런 잡스러운 인연에 묶여 있는 불편한 내 마음이 보였어. 이듬해 17살 때 태오스님을 은사로 득도했지.” 

- 혹시 스님께서도 특별히 사회활동을 하신 경력이 있으십니까. 

“내 세울 만한 일을 한 게 없어.” 

이때 부주지 소임을 맡고 계신 의정스님께서 들어오셨다. 의정스님께서 큰스님의 대답을 듣고 일제 말기에 독립운동을 하신 일을 상기시켰다. 그러자 비로소 큰스님께서 별스럽지 않은 일이라 듯 말씀하셨다. 

“포천 이동면에 있는 흥룡사 주지로 있을 때였지. 봉선사 말사였어. 당시 조선민족해방협동단이라는 독립운동단체가 있었는데 나는 당원이었어. 당원 여나무 명이 ‘산학군’을 만들어 절 뒷산에서 군사훈련을 했어. 나는 그들을 먹여주는 일을 했지. 이 일 때문에 일경(日警)에 잡혀가서 문초를 받고 8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는데 마침 해방되어 풀려 나왔어.” 

- 수도 정진하는 승가에서 사회참여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한 교리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실천 수행 가운데 하나이지. 염불만 하면서 중생을 구할 수 없을 때는 직접 싸우기도 해야 해. 고래로 고승 대덕들이 다 그랬지 않아. 휴정, 유정스님도 그랬고. 파사현정(破邪顯正)이지. 상구보리 하화중생하는 대승 보살행이고 파사현정이야. 중생을 올바로 지키기 위해서는 삿된 것을 부수어야 해. 그게 보살행이야.”

이 때 의정스님께서 또 다시 큰스님이 1960년대 초부터 의정부에 포교당을 개설하고 군포교 활동을 활발히 하셨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셨다. 의정부에 포교당을 열고 부대를 찾아다녔다. 당시는 아직 종단 차원에서 군포교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큰스님은 스스로 공과를 앞세우지 않으려 함인지. 필자의 거듭되는 질문에도 이런 말씀은 하시지 않았다. 의정스님도 당시 군복를 하고 있었는데 그 때 스님의 모습에 감화하여 출가를 한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한다. 

- 몸도 불편하신데 긴 시간 좋은 말씀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끝으로 불자들에게 귀감이 될 법문 한 말씀 들려주십시오. 

“부처님께서 열반 시에 제자들에게 법귀의하라고 하였어. 깨달음을 얻어 스스로 마음에 불을 밝히고 불방일하라는 교훈이지. 그런 다음 실천하는 사람이 돼야 해. 신심만 좋아서는 아무 소용없지. 깨달았으면 실천해야 하는 게야. 참 마음으로 보시하는 자세를 길러야 해. 그러면 이 곳이 곧 극락이야.” 

1995년 7월11일자(불교신문1357호) 7면에 실린 ‘내가 만난 큰스님’. 당시 대담은 김호운 소설가가 했다.

■ 운경스님은 …

운경(雲鏡)은 법호이고 법명은 기홍(基弘)이다. 1905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나 16세 되던 해 태오스님을 은사로 모시고 교종(敎宗) 수사찰인 봉선사로 출가했다. 21세 되던 해에 화계사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기도로 성취할 수 있다”는 보당스님의 법문을 듣고 강화도 보문사에서 정진했다. 이때 스님은 “평생 절을 떠나지 않고 중노릇 제대로 하며 항상 부처님 모시며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는 간절한 발원을 불전에 올렸다. 불법을 바르게 배우고 익혀 상구보리 하화중생하겠다는 원력을 세운 스님은 그 뒤로 해인사, 직지사, 유점사 등의 제방선원에서 선(禪)과 교(敎)의 공부를 두루 했다. 

스님은 1940년 흥룡사 주지와 조계종 경기교구 총무국장 소임을 맡으며 ‘조선불교’의 재건을 꿈꾸었다. 곧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것으로 회향됐다. 일제 식민지 시절 스님은 조선민족해방당을 지원하다 발각되어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또 사형(師兄)인 운허스님과 함께 6ㆍ25한국전쟁 당시 완전히 불타버린 봉선사를 다시 중창하고, 광동학원을 설립하는 등 출ㆍ재가들의 ‘앞길’을 열어주었다. 이밖에도 중앙교무원 평의원, 봉선사 주지, 봉선사 문장, 봉선사 조실, 조계종 원로의원 등의 소임을 맡으며 한국불교의 초석을 놓았다. 

스님은 2000년 2월27일 봉선사 다경실에서 조용히 열반에 들었다. 스님의 열반송이다. “허깨비세상 구십년을(幻海九十年) 되돌아보니 우습구나(回頭事堪笑) 오늘 아침 몽땅 털어버리니(今朝撤手盡) 대천세계에 한빛이로다(大千光).” 

[불교신문3481호/2019년4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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