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연스님이 삼국유사 안에 
그 구조까지 설명한 사찰은 
오직 미륵사지 한 곳 뿐

석탑 보수정비는 무엇보다 
추정에 의한 보수가 아니여서 
문화재 복원사에 기록될 만하다

부서지고 훼손된 상처 그대로
당당하다는 평가가 더 온당…

전북 익산의 미륵사가 세워진 연유는 <삼국유사>에 잘 나와 있다. 백제 무왕이 부인인 선화공주와 함께 사자사로 거둥하는 길, 용화산 밑 큰 연못가에 이르렀는데, 마침 미륵삼존이 나타나자 수레를 멈추고 절했다. 부인이 왕에게 말했다. “이곳에 큰 가람을 세우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그래서 미륵상 셋과 회전(會殿), 탑, 낭무(廊廡)를 각기 세 군데에 세운 다음 미륵사라는 편액을 달았다. 

지금은 비록 사라지고 없으나, 아스라한 꿈결 속에 그려보는 미륵사는 ‘각기 세 군데’라는 절의 구조를 밝힌 이 구절에서 생명의 끈을 얻었다. 일연스님이 ‘삼국유사’ 안에 여러 사찰을 소개하였지만, 그 구조까지 설명하기로는 오직 여기 한 군데이다. 탑 하나 겨우 몸을 지탱하고 모두 사라진 절터에서, 지난 1980년 발굴의 첫 손길을 댈 때 이것은 설계도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스님의 언급이 없었던들 우리는 아주 엉뚱한 발굴 결과를 내놓았을 것이다. 

땅을 파서 확인한 가람배치는 이랬다. 동탑과 서탑이 있고 중간에 목탑이 있으며, 각 탑의 뒤로 금당의 성격을 가진 건물이 하나씩 있다. 탑과 금당을 한 단위로 구분하는 회랑이 둘러, 동원과 서원 그리고 중앙의 중원이라는 삼원식(三院式) 가람 형태를 이루었다. 여태껏 보지 못했던 전혀 다른 형식의 특수한 가람이었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소중한 발굴의 결과는 ‘삼국유사’의 지남(指南)이 없었으면 도로(徒勞)와 오류(誤謬)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터라도 다시 찾은 미륵사에서 문득 겨우 남은 서탑이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발굴 전에는 동네도 있었고 나무에 둘러싸여 있기도 했다. 그런 풍경 속의 탑은 적당히 가려졌었으나, 주민을 이주시키고 훤한 절터가 드러나자, 빗물의 이끼가 밴 시멘트 바른 탑은 흉하게만 보였다. 쓰러질 듯 위태롭기까지 해 탑을 보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일은 1998년부터 2018년까지 무려 20년이나 걸렸다. 투입한 비용만 225억원이다. 그리고 지난 주말, 보수하느라 설치한 가건물을 걷고 드디어 일반인에게 공개하였다. 감개무량한 결말이었다. 하지만 뜻밖의 반응이 나왔다. 다른 곳도 아닌 감사원에서였다. 설계도서 없이 적심의 구조가 달라진데다, 강도가 낮은 충전재가 활용돼 안정성 검증이 필요하다고 했다. 온 언론사가 이를 받아썼다. 원형대로 복원하기 위한 사전검토를 거치지 않고 일관성 없이 축석했다는 지적 때문인지, 한 신문은 이런 제목마저 달았다. 미륵사지 석탑 부실복원… 1300년 상징성 ‘와르르’.

와중에 문화재청의 답변은 점잖은 편이었다. 적심의 구조나 배합 재료의 변경이 오히려 석탑의 안정성 확보와 역사적 가치 보존을 함께 고려한 결과라고 말이다. 감사원의 지적이 틀린 바 아니지만, ‘원형대로 복원’이란 말은 언감생심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절의 구조야 ‘삼국유사’가 가르쳐 준 일말의 힌트라도 있는데, 그마저 탑은 몇 층인지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원형이라니 뜬구름 같은 소리이다. 

‘미륵사지 석탑의 보수정비는 무엇보다 추정에 의한 무리한 보수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국 문화재 복원사에 기록될 만’(도재기)하다거나, ‘부서지고 훼손된 상처 그대로 당당’(허윤희)하다는 평가가 더 온당하다. 

[불교신문3480호/2019년4월17일자]

고운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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