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이곳에도 부처님은 계십니다”

“계율이 있었기에 
승가가 무너지지 않았고 
승가가 무너지지 않았기에 
부처님의 가르침도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주몽신을 비롯하여 
여러 신을 모시며 살던 백성들은 
율령반포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왕이 불교를 공인하자 
믿고 의지할 곳을 찾은 민심은 
빠르게 수습되고 

사신들의 거처이자 
순도가 지내고 있는 성문관은 
마치 사찰처럼 변했다 

순령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부터 스님의 시중을
들으라 하셨습니다 
무엇부터 하면 될까요?” 

왕궁 안의 불당

순도와 처음 만난 지 며칠 후, 왕후는 왕의 허락을 받고 왕궁 안에 작은 불당을 만들었다. 순도가 진나라에서 가져온 불상은 이곳에 모셔졌다. 순도는 매일 아침 내불당에 들러 불상에 예배를 올리고 향을 사르고 염불을 했다. 순령은 왕후의 명을 받들어 내불당을 관리했다. 처음에 순도는 순령이 시중을 드는 것이 어색했다. 모든 것을 승려들이 해왔던 교단생활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차 적응해갔다. 순령은 말수는 적었으나 눈치는 빨랐다. 그녀는 시키지 않아도 날마다 불당을 깨끗하게 청소했고 불상 앞에 맑은 물을 올렸다. 향이 타고 남은 재와 먼지를 치우는 것도 순령의 몫이었다. 

‘이것이 향이라는 것이구나. 정말 향기가 깊고 그윽하다. 머리가 맑아지는 것 같아.’

순도가 염불을 하고 경전을 읽을 때면 순령도 항상 함께 있었다.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불당에 있을 때는 저절로 몸과 마음이 경건해지는 기분이었다. 어려울 것 하나 없는 평온한 날들이 계속되자 순령은 왕후의 부탁까지 받았던 일치고는 싱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도가 온 후 유화부인도 더 이상 꿈에 나오지 않았다. 

‘그냥 개꿈이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순령은 향로를 정리하다 자신도 모르게 웃을 뻔했다. 

궁금한 것

진나라 사신들은 한 달 가까이 국내성에 머물렀다. 왕은 낮에는 대신들과 함께 그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었고 밤에는 순도를 만나 낮 동안 생긴 의문과 고민을 털어놓았다. 따뜻하고 화창한 봄, 고구려는 변화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신들이 돌아갈 날이 가까워지자 왕의 고민도 깊어졌다. 지난 한 달 동안 순도는 왕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왕은 순도와 대화를 해야만 잠을 편히 잘 수 있을 정도였다. 때로는 자애롭게 왕의 마음을 위로하고, 때로는 엄하게 왕의 나약함을 지적하는 순도가 왕은 좋았다. 불쑥불쑥 인생의 고민을 송두리째 털어놓고 답을 달라고 조르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행동으로 옮기진 못했지만.

“스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대신들이 모두 퇴청한 늦은 저녁, 왕은 후원에 앉아 순도를 붙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부처님이란 분은 이야깃거리가 참 많으신 것 같습니다. 들어도 들어도 늘 새롭습니다.”

“80년 가까운 삶의 거의 모든 순간을 가르침으로 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부처님께서 하신 가르침을 기록으로 남겼지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깊고 또 넓습니다. 고구려에 오기 전, 저도 스승님을 도와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긴 경전을 연구하고 번역하는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직 불법(佛法)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저 아는 만큼 말씀드릴 뿐입니다.”

“네, 부처님의 가르침이 먼 천축국에서 고구려까지 왔다는 것이 문득문득 신기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그 오랜 시간 동안 가르침을 배우고 따르는 사람이 남아있었을까요?”

“저처럼 머리카락을 자르고 가족을 떠나 스승과 도반들과 함께 생활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르는 이들을 ‘승가’라고 합니다. 승가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화합입니다. 생김새도 나이도 성격도 생각도 각기 다른 여러 사람이 한데 모여 생활을 하다 보면 다툼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부처님이 계신 곳이나 계시지 않은 곳이나 사람이 사는 곳은 다 비슷한 가 봅니다.”

“전하의 말씀이 참으로 옳습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합니다. 다만 부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은 없습니다.”

순도는 왕을 보며 말했다.

“지금 여기, 이곳에도 부처님은 계십니다.”

순도의 말에 왕은 잠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물 흐르듯 이어졌던 대화가 잠시 멈췄고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지금 여기에도 부처님이 계시다는 순도의 말이 왕의 마음에 작은 울림을 만들었다. 이윽고 왕이 다시 물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처럼 오래도록 남고, 이처럼 멀리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부처님께서 계율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출가했거나 하지 않았거나 부처님의 제자들은 이 계율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출가 제자는 재가 신도보다 철저하고 엄한 규칙을 지켜야 했지요. 계율이 있었기에 승가가 무너지지 않았고, 승가가 무너지지 않았기에 부처님의 가르침도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계율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깨달음을 목표로 공동생활을 해야 하는 출가자들이 지켜야 하는 엄격한 규칙입니다. 이를 어기면 출가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럼 계율은 출가 수행자들의 행동거지의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입니까?” “비슷합니다. 출가 수행자들이 하면 안 되는 행동을 지적한 내용도 많습니다. 경전뿐 아니라 계율을 통해서도 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만들어진 계율만 해도 250개나 되니까요.”

왕은 생각에 잠겼다. 부처님이라는 스승이 1000명이 넘는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250개의 규칙을 만들었다. 이 규칙을 계율이라고 한다. 부처님이 죽은 후에도 이 계율이 있었기에 제자들은 흩어지지 않았고 계속해서 가르침을 배우고 따를 수 있었다. 그 제자들이 이어지고 이어져서 마침내 부처님의 가르침이 고구려까지 왔다. 중원의 강대국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앞 다투어 받아들이고 있다. 저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

태학 설립과 율령 반포…불교 공인 

진나라의 사신단이 돌아가는 날이 되었다. 왕은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사신들의 노고를 아낌없이 격려했다. 사신단은 왕이 황제에게 바치는 선물과 한 통의 서신을 싣고 진나라를 향해 출발했다. 순도는 고구려에 남았다. 그해 10월, 소수림왕은 주몽신과 유화부인을 모신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는 동맹의식을 거행했다. 동맹은 풍성한 수확을 주신 하늘님께 감사를 올리고 내년에도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유서 깊은 의식으로 고구려의 가장 큰 축제이자 제사였다. 1년에 한 번, 동맹제를 낼 때면 왕과 대소 신하들 그리고 백성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소수림왕 2년 10월, 동맹제가 끝나자 왕은 만백성과 대소 신하들 앞에서 율령을 반포했다. 앞으로 고구려는 왕명이나 신탁이 아닌 법으로 다스릴 것을 주몽신께 고한 것이다.

한 달 후, 왕은 국내성에 태학을 설립했다. 태학은 능력 있는 인재들이 모여 학문을 논하고 연구하며 군사훈련까지 하는 곳이었다. 왕은 태학을 통해 고구려에 어떤 인재들이 있는지 파악했고, 각자의 재능에 따라 이들을 필요한 인재로 키워냈다. 그러자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국내성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세습 귀족들은 기존의 권세에만 기댈 수 없게 되었고, 왕권은 강화되었으며 조정은 활기를 찾았다. 그해 왕이 마지막으로 한 것은 불교를 공인한 것이었다. 

주몽신을 비롯하여 여러 신을 모시며 살던 백성들은 율령의 반포로 혼란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왕이 불교를 공인하자 믿고 의지할 곳을 찾은 민심은 빠르게 수습되었다. 순도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왕이 내불당을 만들었다는 소문과 왕후가 이미 부처님께 귀의했다는 소문, 순도가 왕의 자문 역할을 한다는 소문들이 퍼진 것이다. 사람들은 순도에게 가르침을 청하고자 날마다 성문관으로 몰려들었다. 은밀하게 고구려에 들어와서 활동하던 스님들도 하나둘, 순도를 찾아왔다. 순도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국내성 동문은 종일 북적였고 사신들의 거처이자 순도가 지내고 있는 성문관은 마치 사찰처럼 변했다. 

이른 새벽, 순도는 입김을 뿜으며 성문관 마당으로 내려와 빗질을 시작했다. 빗자루로 마당을 쓸다 보면 번잡했던 마음이 차분하게 정리되었다. 밤새 내린 눈과 새벽 서리에 얼어붙어 꼼짝도 하지 않는 빗자루를 살살 흔들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스님”

“낭자께서 새벽부터 어찌 이곳까지?”

추위에 코끝이 빨갛게 된 순령의 얼굴을 본 순도는 깜짝 놀라 합장으로 인사를 하며 물었다. 

“왕후님께서 가보라 하셨습니다.”

순령의 뒤에는 왕이 보낸 질 좋은 나무와 목탄, 옷감 등을 놓인 수레가 놓여 있었다. 순도의 시선을 알아챈 순령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부터 스님의 시중을 들으라 하셨습니다. 무엇부터 하면 될까요?”

[불교신문3480호/2019년4월17일자]

글 조민기  삽화 견동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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