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로 쓰기

김훈 지음 문학동네

연필로 쓰기

김훈 지음
문학동네

<연필로 쓰기>는 소설가 김훈의 새 산문집이다. 평생 동안 그랬듯, 원고지에 연필로 쓴 글들을 묶었다. 일상을 지내며 또는 겪으며 만들어낸 새로운 생각들이 책에 담겼다. 저자는 6.25사변이 나기 2년 전에 태어났다. 철거반원들과, 철거반원들에게 매 맞던 엄마들에 대한 유년의 참혹하고 무서운 기억부터 시작한다. 

억울한 젊은 날의 폭음과 숙취에 대한 이야기, 최대 흥행작 <칼의 노래>에 미처 담지 못한 ‘인간 이순신’의 내면에 관한 이야기, 세월호 참사 4주기를 앞두고 팽목항 동거차도 서거차도에 머물며 취재한 이야기도 있다. ‘떠넘기기’와 ‘물 타기’ 언어들의 달인인 정치인들에 대한 비판, ‘폭염수당 100원’을 요구하던 어느 배달라이더를 향한 연민도 보인다.      

근엄한 위로나 그럴듯한 수식 없이, 삶을 날것 그대로 대하는 태도는 여전하다. “생애가 다 거덜 난 것이 확실해서 울분과 짜증, 미움과 피로가 목구멍까지 차오른 날에는 술을 마시면 안 되는데, 별 수 없이 술을 마시게 된다. (중략) 다음날 아침에 머리를 깨지고 속은 뒤집히고 몸속은 쓰레기로 가득 찬다. 뱃속이 끓어서, 똥은 다급한 신호를 보내오고 항문은 통제력을 잃고 저절로 열린다. (중략) 저것이 나로구나. 저것이 내 실존의 엑기스로구나(42~45페이지). 이렇듯 삶이란 끝내 똥으로 무너지는 것이지만, 적에게 똥을 끼얹어가면서 어렵게 똥을 누어가면서 ”단념할 수 없는 삶의 길을 모색“해가는 것이 또한 인간이다.

굳이 이순신을 다룬 작품이 아니어도 그의 글들에는 적의 대군과 맞선 장수의 고독이 한결같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번엔 문장의 힘이 예전보다 덜하다는 느낌이다. 저자 스스로 산문은 노인의 글쓰기라고 말했다. 이제는 채 2시간도 술을 못 먹게 된 늙은 친구들과의 수다, ‘꼰대스러웠던’ 주례사에 대한 익살 섞인 후회와 자책 등에서 한결 푸근해진 ‘할아버지’의 면모가 읽힌다. 

“너무 늦기는 했지만, 나이를 먹으니까 자신을 옥죄던 자의식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나는 흐리멍덩해지고 또 편안해진다. 이것은 늙기의 기쁨이다. 늙기는 동사의 세계라기보다는 형용사의 세계이다(74페이지).” 일부러 힘을 뺀 것 같다. 늙어도 필력은 다만 익어갈 뿐 어디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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