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 날아가고 구름 걷히니 오직 높은 산만 보이네”

남한ㆍ적상산성 수축한 ‘벽암’ 
병자호란 때 3000 의승군 지휘
전란 후엔 화엄사 등 사찰 중수 
성보 문화재 조성에 큰 역할
왕자시절 효종에게 ‘화엄’ 강의 

천년 그 이상 빛을 뿜어내는
뷰휴선수 문하 ‘사형사제’ 

옷 한 벌, 장좌불와 신망 ‘고한’
명성 듣고 찾아온 이들에겐 
“가시오, 성불하세요!” 말만…
광해군이 하사한 ‘금란가사’ 
이튿날 그대로 벗어놓고 잠적

합천 해인사 국일암 입구 언덕에 부도 3기가 나란히 서 있다. 부휴, 벽암, 고한 선사의 부도이다. 국일암은 벽암선사가 인조에게 하사받은 ‘국일도대선사’의 ‘국일(國一)’을 따서 명명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가장 아끼셨던 사리불과 목련 존자는 원래 당시 유명한 외도 산자야(Sanjaya)의 제자였다. 어느 날 사리불이 우연히 길에서 마승(馬勝, Assaji) 비구의 기품 있는 모습에 감동받고, 그에게 ‘누구의 제자냐?’고 물었다. 마승은 ‘고타마 싯달타의 제자’라고 하면서, 부처님의 진리를 간단히 언급했다. 사리불은 그 길로 목련존자를 찾았다. 두 분은 매우 가까운 도반인데, 누구라도 먼저 위대한 선지식을 만나면 함께 하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이런 인연으로 사리불과 목련은 제자 250명을 데리고 부처님의 제자가 됐다. 그 당시는 이 사건이 엄청난 사건이었다. 불교사에 도반의 소중함과 진정성 있는 이야기가 많이 전한다.

덕산 선감(782˜865)의 법을 받은 설봉 의존(雪峯義存, 822˜908)과 암두 전활(巖頭全豁, 828˜887)은 사형사제간이다. 두 분은 절친인데, 설봉이 암두보다 나이가 여섯 살이나 많다. 그런데도 설봉은 스승보다 전활에게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부휴 선수의 제자 벽암과 고한도 사형사제이지만, 매우 절친한 도반이다. 

가장 많은 불사 주도 ‘벽암’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은 속리산 보은에서 태어나 10세에 설묵(雪默)에게 출가했다. 14세에 보정(寶晶)에게 구족계를 받았으며 부휴 선수의 제자가 됐다. 이후 속리산·덕유산·가야산·금강산 등을 유력하며 정진했다. 임진왜란 때는 명나라 장군과 함께 수군으로 참전하여 명의 장수로부터 칭송을 듣기도 했다. 그 뒤 지리산에서 충휘(녑徽), 태능(太能), 응상(應祥) 등과 함께 수행하며 선시를 많이 남겼으며 25세 때는 병환 중인 스승의 부촉으로 지리산 칠불암에서 강석을 열었다.

37세 무렵에는 스승 부휴가 감옥에 투옥되면서 함께 연루되어 옥에 갇혔다. 이후 누명을 벋고 무사히 풀려났다. 광해군이 그의 덕에 감화를 받아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으로 임명한 뒤에 봉은사 주지를 겸직케 한다. 이 무렵 동양위, 신익성을 비롯한 많은 사대부와 교우 관계를 가졌다. 40세에 지리산 칠불암에 주석하다가 인근 지역으로 옮겨갔다. 지리산을 다녀간 사대부들이 자신의 유람록에 선사의 이름을 언급하였는데, 대체로 벽암에 대해 ‘용모가 수려하고, 경서에 통달했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 선사의 명성이 점차 높아지자, 벽암은 피해 다녔다. 얼마 후 광해군이 청계사에서 큰 재를 열었는데, 벽암에게 설법을 요청했다. 

벽암선사 진영.

1624년 선사 49세 때, 인조로부터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을 임명받고, 도총섭으로서 3년 동안 남한산성 축성을 감독했다. 이로 인해 벽암은 인조로부터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 시호를 받았다. 

1632년 57세에 벽암은 화엄사를 중수하여 대총림으로 만들었다. 몇 년 후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의승군 활동을 하면서 3000명의 승병을 소집해 ‘항마군’이라 이름하고 호남의 관군에 편입됐다. 벽암 각성의 승병활동으로 휴정계 못지않게 부휴계 문도들의 사회적 인식이 높아졌다. 전쟁이 끝나자, 벽암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도중결의(圖中決疑)>와 <참상선지(參商禪旨)> 등을 저술했다. 

65세 때 선사는 쌍계사를 중수했고, 그 해 8월에 호남관찰사 원두표의 청으로 규정도총섭(糾正都摠攝) 직을 맡아서 무주 적상산성에 있는 사고(史庫)를 보호했다. 선사 66세 때, 백운산 상선암에 머물렀으며, 다음 해 보개산에 들어가 법석을 열 때, 왕자였던 효종이 화엄사상을 배웠다. 선사는 85세 화엄사로 되돌아와 이곳에서 입적했다. 

선사 문하에 취미파 백곡파 침허파 고운파 동림파 연화파 벽천파 등 7파가 세워졌는데, 선사가 제자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저술에는 <간화결의(看話決疑)>, <선원집도중결의(禪源集圖中決疑)>, 승가의 상례(喪禮)를 정돈한 <석문상의초(釋門喪儀抄)> 등이 있으며, 스승의 시문집인 <부휴당집> 5권을 편찬했다. 벽암의 부도는 완주 송광사, 해인사, 화엄사, 법주사에 있다. 

벽암은 사찰 불사 및 경전 편찬에 힘을 기울였으며, 남한산성과 적상산성을 수축했다. 선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두 난으로 인해 유실되거나 불에 탄 사찰을 중창하고, 불교미술문화재를 조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중창불사한 곳은 보은 법주사, 순천 송광사, 합천 해인사, 하동 쌍계사, 구례 화엄사, 안변 석왕사, 속초 신흥사 등이다. 선사는 만년에 여러 사찰의 중창을 주도하며 건축, 불상, 불화 등을 조성했다. 불상을 조성한 곳은 서울 자인수양사 비로자나 삼신불상, 속초 신흥사 아미타삼존, 지장시왕상, 고창 문수사 지장시왕상 등이다. 벽암은 불교역사상 가장 많은 불사를 주도했던 선사라고 볼 수 있다. 

‘속리산 스님’ 고한 

고한(孤閑, 1561˜1647)의 법명은 희언(熙彦), 속성은 이(李) 씨, 함경도 길주 명천(明川) 출신이다. 12세에 칠보산 운주사에 출가해 교학을 공부하다가 풀로 신을 삼아 파는 등 경제활동을 했다. 어느 해 세포 16필을 짜 원산 등지로 팔러 다니다가 길가에 앉아 잠시 조는 사이에 세포를 도난당한 뒤 개골산에 들어가 정진했다. 20대에는 덕유산에 머물고 있던 부휴선수를 찾아가 3년 동안 <화엄경>을 공부하며 수행법을 지도받았다. 이 무렵 함께 머물던 벽암은 고한이 법기임을 알아보고, 도반이 됐다. 

어느 해, 고한이 남쪽 지역으로 내려가던 중, 낙동강 가를 지날 때 아이들이 선사를 모래밭에 파묻어 놓고 목만 내놓았다. 지나는 사람이 스님을 구해 주었더니, 선사는 툴툴 털고 일어나 화도 내지 않고, 연신 “고맙다”고 인사했다. 누군가 음식을 공양 올리면, ‘공양 받을 만한 덕이 부족하다’며 거절하고, 혹 누군가 방문 앞에 누룽지를 몰래 갖다 놓으면, 반드시 그릇을 그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간혹 법문을 청하면, 성심껏 가르쳐 주었다.

고한은 평생 채소반찬이라도 좋은 것은 먹지 않았고, 남이 입던 옷만 입었으며, 옷도 단 한 벌뿐이었다. 그러면서 추운 한파에도 춥다고 하지 않고, 열흘을 굶고도 배고프다고 하지 않았다. 또 선사는 한번 가부좌를 맺으면 잠자지 않고 장좌불와와 묵언으로 정진했다. 선사의 도명을 듣고 사람들이 찾아오면,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는 “가시오! 가시오!, 성불하세요! 성불하세요!”라는 말만 되 뇌였다. 광해군 때, 광주 청계사에서 재(齋)를 베풀 때, 광해군이 선사를 청했다. 이때 대군이 선사에게 비단으로 수놓은 금란가사를 하사했다. 고한은 이 가사를 수하고 재를 지낸 뒤 이튿날 새벽에 가사를 그대로 벗어놓고 사라졌다.

벽암 각성과는 사형사제이며, 벽암보다 세납이 14세 위였지만 각별한 인연이었다. 고한이 먼저 팔공산에 머물면, 벽암이 팔공산으로 가서 함께 머물렀고, 반대로 벽암이 가야산으로 옮겨가면 고한도 가야산으로 옮겨갔다. 한번은 벽암이 속리산으로 옮겨가자 고한도 속리산으로 가서 오랜 동안 주석하여 훗날 고한을 ‘속리산 스님’으로 불리었다. <천모록>의 저자 천모스님이 속리산에 가서 벽암, 고한, 수일 세 스님의 진영을 보고, “이들 중 누가 제일 나으냐?”고 물었더니 절의 스님이 고한스님이 제일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고한은 세납 87세, 법랍 71세에 이르러 제자 각원(覺圓)에게 부촉하고, 가부좌한 채 입적했다. 입적 전에 선사는 ‘다비하지 말고, 시신을 숲속에 갔다 버려 새와 짐승에게 밥이 되도록 하라’고 유언했다. 그런데 주위 스님들이 만류하여 다비했다. 다비하는 날, 홀연히 바람이 일어나더니 정골이 튀어 올라 소나무 가지에 날아가 앉았다. 장작더미의 불이 새벽에 이르자, 연기와 화염이 탑(塔) 형상을 그리며 곧 사라졌다. 영골을 방에 모셔놓았더니 상서로운 빛이 뿜어져 나와 밤에도 희뿌연 빛이 방광하기를 보름간 계속되었다고 한다. 

고한의 비문을 지은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1595˜1671, 당시 영의정에 오른 인물로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었음)은 “백곡처능(白谷處能, 1619~1680) 대사의 고한스님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해 거절하지 못하고, 비명을 짓는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비명을 지었다. 고한의 비문은 유실되었지만, 내용이 <백헌집>에 실려 있다. 

“학의 외로움이여!/ 구름의 한가로움이여!/ 학 날아가고 구름 걷히니/ 오직 높은 산만 보이네(鶴之孤耶 雲之閑耶 鶴去雲消 惟見高山).” 고한의 부도를 세 곳에 나누어 모셨는데, 가야산, 팔공산 동화사, 속리산이다. 해인사 국일암에 가면 입구 언덕에 부도 3기가 나란히 서 있다. 부휴, 벽암, 고한의 부도이다. 해인사 국일암은 벽암이 인조에게 하사받은 ‘국일도대선사(國一都大禪師)’의 ‘국일’을 따서 명명한 것이다. 벽암이 이곳에 머물 때, 고한도 함께 머물렀던 점을 인연해 스승과 제자의 부도를 함께 모신 듯하다. ‘주목 나무는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라고 하는데, 벽암과 고한의 인연 또한 천년 그 이상의 빛을 뿜어내고 있다. 

국일암 편액.

[불교신문3479호/2019년4월13일자]

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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