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말을 ‘요만큼’ 건네면 
고구마가 ‘요만큼’ 돌아왔고 
말을 ‘이만큼’ 하면 
호박이 ‘이만큼’ 돌아왔다 

때론 대문 앞에 고추, 깻잎 
감자가 기다려주기도 했다
시골에서 살다 보면  
이따금씩 말이 고파진다

아침부터 찌푸린 하늘이 쏟아낸 습기가 햇살 한 자락에 청량한 바람을 몰고 온다. 바람결에 밀려오는 까치들의 인사가 예사롭지 않아 마당을 서성거리는데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대문을 들어서는 승용차 한 대에서 내리는 방문객은 뜻밖에도 친구들이다. 

오랜만에 만나게 되어 진정으로 내 생활이 궁금한지, 귀양살이가 어떠냐는 말에 나는 신이 나서 강화살이 자랑겸 푸념을 늘어놓고, 한참을 내 말에 귀를 기울이던 친구는 툭, 한마디 던진다. 완전 수다쟁이가 다 됐네. 나는 질세라 ‘시골에 있다 보면 말이 고파진다’는 변명을 하고, 내 변명에 맞장구를 쳐주는 척, 이해는 가는데 변해도 너무 변했다는 다른 친구 말에 순간, 가슴이 찔끔해서 설핏 웃는 낯으로 넘겼지만, 속으로는 강화살이 4년만에 수다쟁이에 변화무쌍한 내 삶을 들킨 것 같아 가슴이 졸아들었다. 

사실 처음 1년은 수시로 불쑥 찾아오는 이웃들의 느닷없는 방문은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그들이 지낸 세월과 정의 깊이를 서로의 집에 젓가락이 몇 개,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정도로 친밀하게 살고 있는 이웃들 입장에선, 그 중요한 숟가락 개수 파악이 안 되는 이웃이 생겼으니 얼마나 궁금했겠는가. 도시 사람들에게는 자칫 무례로 보일 수 있는 그 수시 방문의 목적이 외지에서 이사 온 이웃에 대한 순수한 ‘관심’이란 걸 알게 된 이후로는 아침 산책길에서 마주치는 누구라도 ‘안녕하세요’ 라는 인사가 스스럼없이 나오고, 요즘은 지금 뭐하시는 중이냐고 밭으로 다가가는 용기가 슬쩍슬쩍 먼저 선을 넘는 경지에 들어서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딱히 목적도 없는 그들의 방문에 마음을 열지 못했던 때, 나의 놀란 토끼 같던 눈을 기억하던 이웃들은 나의 변화가 무척 기특했던 모양이다. 내가 말을 ‘요만큼’ 건네면 고구마가 ‘요만큼’ 돌아왔고, 말을 ‘이만큼’ 하면 호박이 ‘이만큼’ 돌아왔다. 때론 택배마냥 대문 앞에 고추가, 깻잎이, 감자가 나를 기다려주기도 했다. 처음엔 내 말에 무게를 달아 요만큼 또는 이만큼씩 딱딱 거래가 되는 것인가 했다. 그러다 추운 겨울, 밖으로 다니기 힘든 날씨 때문에 말을 건넬 기회가 줄고 또 이런 거래가 줄어드니 더욱 그런 생각이 깊어졌던 때가 있었다. 

어쩌면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말이 많아졌다는 핀잔에 놀란 이유도 시골생활에서 생긴 이 거래방식에 대한 나의 자격지심이 들킨 것 같아서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교환 시스템엔 ‘마일리지’의 개념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날씨가 풀리면서, 논이나 밭에서 서로 나눌 것이 생겨나는 봄이 되면서. 어느 정도 건네는 말과 관심이 쌓이면 굳이 뭔가 주지 않아도 자연스레 내밀한 정(情)의 거래가 다시 돌아온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사실은 나 역시 언제부턴가 외출에서 돌아올 때면 과자나 사탕 같은 주전부리를 사는 버릇이 생겼었다. 밭에서 뭔가 나눌 것을 길러낼 재주가 없는 나로서는 고구마, 감자, 호박 같은 거래의 도구가 사탕이나 과자가 된 것이었다. 그저 지나는 길에 서로 인사를 나누고, 그 자리에서 포장지나 박스를 푹 찢어 한 움큼 꺼낸 사탕이나 과자를 손에서 손으로 전달해 주면 무척 반기며 좋아했다. 그저 주전부리에 불과하지만 서울에서 온 같은 동네 식구에게 받는 손바닥 선물에 얼굴이 활짝 펴지는 웃음을 볼 때면 나 역시 가슴이 벅차오른다. 

어디 그 뿐인가, 그렇게 슬쩍 전달된 ‘한 움큼’이 나를 끌어서 차 한 잔을 내주고 ‘차 한 잔’은 또 이야기 한 보따리가 되기 마련이다. 그러니 ‘어디가세요’ 말 한 마디로 나는 글감을 얻게 되어, 나의 수다는 나에게 큰 수지로 돌아오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법정스님은 ‘말은 안 해서 후회보단 해서 후회’라고 일침하셨지만 정을 나누는 소박한 말, 그 말에 담긴 이웃에 대한 관심, 그에 따르는 감자 한 소쿠리, 사탕 한 움큼같은 소소한 거래만은 살짝 눈감아 주시리라.

[불교신문3478호/2019년4월10일자] 

안혜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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