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등불 발아래 몸을 숙여 머리카락 풀어헤친 수메다…

마니교 신봉하던 ‘위구르족’
불교로 개종하면서 사원 번영
전생이야기 서원화 많이 그려
과거불 공양 미래 성불 수기
자기 희생한 보시는 큰 공덕

베제클릭 사원 20굴 연등불수기도.

과거 4아승지 십만 겁의 옛날에 연등불(燃燈佛)이 세상에 오셨다. 이 무렵 무마성(無魔城)이라는 도시에 수메다(Sumedha, 善慧)라는 바라문이 살고 있었다. 수메다의 아버지는 대단한 재력을 가진 부호였으나 수메다가 어릴 때 수많은 재산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수메다는 아버지가 이 많은 재산을 모으느라 고생하고도 한 푼도 가져가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죽음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복락의 종자(種子)를 심으리라고 뜻을 일으켜, 정진 끝에 여덟 가지 선정(禪定)과 다섯 가지의 신통력(神通力)을 얻었다. 

이렇게 신통력을 얻고 정진에 힘쓸 무렵 연등부처님께서 수메다가 있는 마을로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친견하러 나갔다. 수메다는 연등불에게 연꽃을 바치고 싶었으나 왕이 왕국에 있는 모든 연꽃을 다 사버려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연꽃화병을 들고 있는 소녀를 만나 꽃을 사려고 하였는데, 소녀는 바라문이 미래의 모든 생에서 그녀를 부인으로 맞겠다는 기원을 하는 조건으로 꽃을 건넸다. 

이에 수메다는 자신이 갖고 있던 금을 모두 주고 소녀로부터 일곱송이 중 다섯송이의 꽃을 사서 연등불에게 산화(散華) 공양을 했는데, 수메다가 던진 청련화만이 공중에 머물며 연등불의 머리 위에 머무르는 기적이 일어났다. 

또한 수메다는 연등부처님이 지나실 길에 진흙탕이 있는 걸 보고, 입었던 사슴가죽 옷을 벗어 진흙탕에 깔고 그것도 부족하자 머리를 풀어 진흙 위를 덮고, 엎드려 부처님을 우러러 보며 사뢰었다. “부처님, 진흙을 밟지 마시고 부디 제 머리털과 몸을 마치 마니구슬의 판자로 된 다리를 밟는다 생각하시고 지나가십시오. 그러면 그것은 저에게 영원한 이익이 되고 즐거움이 될 것입니다”라며 지극한 마음으로 큰 행원을 일으켰다. 이때 연등부처님께서 수메다를 향하여 찬탄하셨다. “장하다 수메다여! 그대의 보리심은 참으로 갸륵하구나. 이같이 지극한 공덕으로 그대는 오는 세상에 결정코 부처가 되리니, 그 이름을 석가모니라 부르리라.” 수메다 행자를 칭찬하신 뒤에 꽃을 공양하고 오른쪽으로 세 번 돌며 예를 마치신 뒤에 떠났다.

비가 와서 질퍽한 진흙탕에 머리카락을 풀어헤쳐 연등불이 밟고 지나가게 하여 장차 붓다가 될 것이라는 수기를 받았다는 수메다 바라문 이야기는 ‘연등불수기본생’으로 널리 알려진 석가모니 본생담이다. 

진흙탕에 머리카락을 풀어 밟고 지나가게 했다는 드라마틱한 내용 때문인지 석가모니의 본생담 가운데서도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 중 하나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베제클릭 사원 15굴 연등불수기도 일부.

그래서인지 오래전부터, 여러 지역에서 즐겨 표현되었다.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시크리 출토 연등불수기상(파키스탄 라호르박물관 소장)은 물병을 겨드랑이에 끼고 연꽃을 파는 소녀와 꽃을 사려는 수메다, 연등불을 향해 산화 공양을 올리는 수메다, 연등불 머리 주위에 머물러 있는 연꽃, 사슴가죽 옷과 머리카락으로 진흙을 덮고 엎드려 있는 수메다 앞에서 연등불이 수기를 주는 장면 등이 깊은 부조로 조각되었다.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땅바닥에 엎드린 수메다의 모습이 마치 오체투지를 보는 듯하다. 

수메다의 이야기는 인도를 넘어 뜨거운 열사의 지역, 실크로드의 투르판으로 전해져 아름다운 그림으로 재탄생하였다. 한 여름에도 만년설이 쌓여있는 천산 아래 위치한 투르판(Turfan, 高昌)은 ‘들어가면 살아나올 수 없다’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최북단에 자리잡은 오아시스이다. 여름 평균 기온이 50℃에 육박하고 연평균 강수량은 16mm에 불과한 무더운 열사의 나라지만 투르판은 그 옛날 비단길의 중요한 도시 중 하나였다. 5세기 말 한인(漢人)인 국씨(麴氏)가 고창국(高昌國, 499~640)을 세운 후 동, 서문명의 접점으로서 번영을 구가했으며, 629년 인도로 구법여행을 떠났던 28살의 젊은 승려 현장(玄)이 한 달간 머물면서 설법을 할 정도로 불교가 성행했다. 

삼장법사 일행이 불타는 산을 넘지 못하자 손오공이 꾀를 내어 나찰녀의 파초선을 가져와 49번 부채질을 하고서야 비로소 비가 와서 불을 껐다는 화염산의 깊숙한 협곡에 위치한 베제클릭(Bezeklik) 석굴사원은 ‘아름답게 장식된 곳’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야말로 아름다운 석굴사원이다. 국씨 고창국 때 처음 개착되어 ‘영융사’(寧戎寺) 또는 ‘영융굴사’(寧戎窟寺)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나 840년 키르기스족에 의해 붕괴된 위구르(Uyghur, 回)제국이 몽골고원에서 투르판으로 이주, 정착한 후 이곳에 왕실 석굴사원을 개착했다. 위구르족은 원래 마니교(Mani敎)를 신봉하였으나 투르판에 정착하면서 불교로 개종하였으며, 베제클릭은 위구르왕가의 사원이 되면서 크게 번영했다.

위구르 왕족들은 10세기 경부터 베제클릭 석굴을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불사에 참여했다. 80여 개나 되는 석굴을 개착하고, 조각과 아름다운 벽화로 석굴을 장식했다. 이 시기 베제클릭 석굴에는 석가모니가 전생에 왕 또는 상인, 선주(船主), 바라문 등으로 태어났을 때의 전생이야기를 소재로 한 서원화(誓願畵)라는 그림이 많이 그려졌다. 서원화는 전생의 석가가 과거불에게 공양하고 서원을 발하여 미래에 성불한다는 수기를 받는 내용을 그린 것으로,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약사(根本說一切有部毘奈耶藥事)> 중 15개에 달하는 게(偈)를 도해한 것이다. 화면 중앙에는 거대한 부처 입상을 배치하고, 그 좌우에 공양자(왕과 왕비, 바라문, 승려 등)와 보살, 천부, 비구, 집금강신 등을 3~4단으로 배치하였는데, 비스듬히 틀고 연화좌에 서서 양팔을 들거나 내리며 조금씩 다른 포즈를 취한 본존불은 고려시대 아미타내영도의 아미타불을 보는 듯하다. 

석가모니 전생이야기 중 가장 인기 있던 주제는 연등불수기도였던 것 같다. 9개의 석굴에 13점이나 그려졌으니 말이다. 제20굴의 연등불수기도는 독일투르판탐험대의 르 콕(Le Coq) 등이 절취해 베를린으로 가져 간 것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소실되어 사진 만이 남아있지만, 그림 윗부분의 가로로 긴 흰 띠 속에 “(내가) 광명 있어 명성 있는 디팡카라를 보았을 때, 바라문 청년인 (나는) 일곱송이의 푸른 연꽃을 가지고 공양했다. 제2아승지겁의 끝이다”라는 브라흐미로 쓴 산스크리트어 명문이 남아있어, 연등불수기도임을 알 수 있다. 

베제클릭석굴사원

화면의 중앙에는 오른쪽으로 약간 몸을 튼 연등불이 오른손에 수메라가 공양한 꽃을 들고 서있으며, 오른쪽 하단에는 수메다가 엎드려 연등불의 발 앞에 길게 머리카락을 펼쳐놓고 있다. 화면 왼쪽에도 양손에 꽃을 들고 있는 인물이 보이는데, 그 역시 수메다이다. 연등불의 오른쪽에는 꽃이 가득한 쟁반을 든 소녀가 보이는데, 그는 바로 수메다에게 꽃을 판 소녀이다. 이들 위로는 집금강신과 보살 등이 합장을 하고 서있고, 연등불의 머리 위에는 수메다가 공양한 꽃이 공중 위에 떠있어, 본생담을 충실하게 표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제15굴에도 연등불수기도가 그려져 있다. 상단의 흰 띠 안에는 “바라문 청년인 석가는 디팜카라(燃燈, 定光) 부처를 예불하기 위해 일곱송이 청련화(靑蓮華)를 공양한다.”고 적혀있고, 가로로 긴 화면에는 연등불의 발아래 몸을 숙여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수메다, 연꽃 송이를 들고 연등불의 좌우로 서있는 인물, 꽃이 든 쟁반을 들고 있는 소녀, 집금강신과 승려, 건물 등이 표현되었다. 등장인물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20굴 벽화와 거의 동일한 구성이다. 이 벽화는 20세기 초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에 의해 절취되었는데, 최근 류코쿠대학 고전적디지털아카이브센터에서 디지털 판독 기술을 이용하여 원래의 그림과 색상을 복원했다.

베제클릭 석굴의 벽화는 이슬람교도와 20세기 초 서구 및 일본 탐험대에 의해 파괴되고 절취됐다. 독일의 그륀베델(Grunwedel)과 르 콕, 일본의 오오타니(大谷) 탐험대, 러시아의 올젠부르그(Olsenberg), 영국의 오럴 스타인(Aurel Stein) 등이 벽화를 절취했다. 15굴과 20굴의 회랑을 아름답게 장식했던 연등불수기도 역시 독일과 일본의 탐험대에 의해 절취되어, 지금은 사진과 복원도로만 전해온다. 누군가를 위해 한없이 자신의 몸을 낮추고, 심지어 더러운 진흙탕에 머리를 풀어헤쳤다는 수메다 이야기는 자기희생적인 보시가 얼마나 큰 공덕인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다. 

[불교신문3478호/2019년4월10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