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당 있던 자리엔 천주교 성인 묘역이...

광주 천진암은 천주교학 강학을 위해 장소를 내어주었다가 폐사됐다. 지금은 사찰 이름을 가진 천주교 발상성지가 됐다. 천주교는 천진암 법당터에 창립 선조 5명의 묘를 조성해버렸다. 성지를 빼앗긴걸 넘어 모욕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천주교 강학 장소 내어주고
스님 처형되고 사찰은 폐사

50년 동안 천주교 성지화로
불교 흔적 갈수록 옅어져

절두산성지로 반출한 스님비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아야

중부고속도로를 지나다보면 경기도 광주에 이르러 천진암이라는 이정표가 있다. 전통사찰이나 문화재를 알리는 갈색 표지판이다. 모르는 이들은 낯선 이름에 ‘얼마나 좋은 사찰이길래 표지판까지 있나?’하는 생각을 한다. 모를 땐 그런 생각이 들만하다.

하지만 천진암(天眞菴)은 사찰 이름을 가진 천주교 발상성지다. 현재 그런 것일 뿐 천주교 박해로 사라진 사찰이 정확한 표현이다. 일찍부터 천주교 성지화 작업이 진행되다보니 불교는 사라져버리고 천주교만 남았다. 사찰 이름을 가진 천주교 성지의 아이러니는 이렇게 탄생했다.

천진암 입구에는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천진암은 알려진 바로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큰 절이 아니라 작은 암자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법당과 강학소로 쓰인 강당, 요사채 정도가 전부다. 이마저 발굴조사가 한번도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분명하지 않다. 천주교는 법당터에 창립 선조 5위 묘역을 조성했고, 강학소터와 이벽 독서터 등을 기념물로 표시해두었다.진암은 역사적 사료가 전무하다. 19세기 프랑스인 천주교 선교사가 한국 천주교에 대해 기술한 자료와 다산 정약용이 남긴 글 등에서 천진암이 확인될 뿐이다. 천주교가 먼저 천진암에 주목하고 선점하게 된 것도 천주교 기록에 남아 있는 탓이다.

이곳에서 천주교학 강학이 처음 이뤄졌다는 것은 천주교의 정설이다. 천진암은 이 지역 출신인 이벽을 비롯한 양반들이 서학으로 불렸던 천주교학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장소를 내어주었을 것이다. 훗날 창립 선조가 된 이들이 외세와 결탁하고 민심을 어지럽혔다는 등의 이유로 몇차례에 걸쳐 처형될 때 천진암은 똑같은 피해를 입었다. 스님들은 처형됐고 절은 폐사됐다. 장소를 내어준 것만으로 처형과 폐사를 피하지 못했으니 천주교 박해가 천진암을 역사에서 지우는 결과가 됐다. 폐사에 그치지 않고 천주교 성지화로 이어지는 이중의 고통이 천진암에서 진행되고 있다.

1975년 이전까지 천진암은 역사의 전면에 있지 않았다. 해방 후 정화운동이라는 격동기를 거쳤던 불교계는 폐사돼버린 천진암에 눈돌릴 겨를이 없었다. 먼저 천진암에 주목한 것은 천주교다. 지금 불교와 상관없는 천주교 성지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반면 천주교는 불교계와 달리 1975년 천주교수원대교구의 관할 아래 천진암에 대한 성지화 작업을 시작했다. 천진암터를 마을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찾아냈고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임을 역사적 고증에 나섰다. 천진암터를 비롯해 인근 토지에 대한 매입도 이 때부터 시작됐다.

1979년엔 한국 천주교 창립 선조(先祖)로 불리는 이벽의 묘가 포천에서 천진암터로 이장됐다. 차례로 권철신, 권일신, 정약종, 이승훈 등의 묘가 천진암 법당터에 자리잡았다. 이들은 한국 천주교에 있어서 창립 선조 5위로 추앙받는 인물들이다. 법당터가 묘역이 된 것이 불교계의 입장에서보면 만행에 가까운 행위이지만, 천주교는 창립 선조를 모시는 최고의 예우일 것이다. 천주교 천진암성지측은 법당터에 창립 선조 5위 묘역을 조성한 것에 대해 떳떳히 밝히고 있다.

천주교의 성지화는 아무런 자료가 없는 불교계가 손을 놓고 있는 동안 천진암 일대 수백만평에 대한 매입과 수도원과 성당 건립, 기념관 건립, 기념물 조성 등으로 진행됐다. 2079년 완공을 목표로 천진암대성당 건립이 추진되고 있고, 한국 천주교회 창립 기념 행사도 이 곳에서 매년 열리고 있다.

조계종 제2교구신도회와 종교평화위원회 등이 주어사지의 천주교성지화에 대응한 활동을 시작했다. 2014년 조계종 종교평화위원회 주최로 주어사지를 찾은 불자들.

한국 천주교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역사를 갖고 있다. 성직자 없이 평신도만으로 천주교가 자생적으로 성장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 현장이 바로 천진암이다. 또다른 장소가 한 곳 더 있는데, 그 곳 역시 사찰이다. 천주교 창립 선조 5인 등이 오갈 정도로 천진암과 거리가 가까운 여주 주어사가 바로 그곳이다. 주어사 역시 천진암과 같은 운명을 맞았다. 천주교 박해로 강제 폐사된 사찰은 천진암과 주어사 외에는 지금까지 확인된 사찰은 없다. 그만큼 천진암과 주어사가 갖는 상징성 또한 크다.

하지만 천진암은 천주교 성지화가 진행되는 동안 불교계에서는 큰 관심을 갖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천진암의 이름을 제외하곤 불교적 색채가 점점 옅어지는 상황을 맞고 있다. 이런 천진암 사례는 주어사에 적지않은 교훈으로 남았다. 천진암이 불교계가 인식하기 전 토지 매입과 성지화가 진행됐기 때문에 전혀 손쓸 수 없는 사례로 남았다면 주어사는 여지가 남아있다.

천주교는 주어사터에 대해서도 일찍부터 성지화를 위한 작업을 진행해왔지만 국유지여서 천진암 만큼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조계종 2교구신도회와 종교평화위원회, 아리담문화원 등이 2014년부터 주어사지에 대해 대응에 나서면서 천주교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 불교문화재연구소와 불교사회연구소 등도 천진암과 주어사에 대한 사료를 찾기 위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서울에 있는 천주교 절두산성지에는 천주교와는 상관없는 해운당대사의징지비가 있다. 주어사에서 가져간 것이다. 이 비는 1638년 입적한 의징 선사를 기리며 1698년 그의 제자 수견 천심 선사가 세웠다.

천주학을 강학하던 이들은 천진암과 주어사에서 한국 천주교 설립 기반을 닦았다. 천주교는 주어사터에 남아 있던 해운당대사의징지비를 서울 천주교 절두산성지로 무단 반출했다. 절두산성지 한켠에 있는 해운당대사비.

해운당대사비가 절두산성지에 있다는 사실도 최근에야 알려졌다. 일부러 숨기진 않았겠지만 이 곳을 오가는 사람들이 천주교성지에 스님의 비가 있는 점이 의아해 인터넷 등을 통해 알린 것이다. 주어사지에서 스님의 비를 천주교성지로 반출한 행위는 납득이 어려운 일이다. 주어사지는 천주교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에 주어사지에서 무단 반출한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천주교는 의징대사의 비를 갖고 있을 명분도 없다.

불교와 천주교의 관계 정립을 위해서도 해운당대사비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일은 중요한 일이다. 주어사와 천진암이 천주교의 발상성지라고 하더라도 천주교학 강학 장소를 내어준 선의를 헤아린다면 이제라도 해운당대사비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놓아야 한다.

천주교는 주어사지를 1982년부터 2022년까지 임차했다. 3년 후면 계약이 만료된다. 그때까지도 해운당대사비를 반환하지 않는다면 훗날 ‘스님의 비까지 무단으로 반출해간 천주교’로 기록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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