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생가터에 홀로 서니 스님이 더욱 그립구나”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富보다 고귀하다…
소극적인 생활태도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해남 문내면 법정스님 생가터
스님이 태어난 초가는 없고
군청이 매입한 공터로 남아
복원도 좋지만 비워놓아도…

불교신문은 이번 호부터 매월 1회 우리사회에 ‘참다운 무소유의 가르침’을 깨우쳐 주고 홀연히 떠난 법정스님이 머물렀던 자리를 찾아가는 ‘무소유의 향기를 찾아서’를 연재합니다. 법정스님은 1932년 11월 전남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마을에서 태어나 2010년 3월 서울 길상사에서 원적에 들기까지 <무소유>를 비롯한 <영혼의 모음> <서 있는 사람들> <텅빈 충만> 등 수많은 저서와 법문, 강연을 통해 ‘무소유의 삶에 대한 참된 가치’를 온 국민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내년 3월이면 스님이 가신 지 10주기를 맞이합니다. 열반에 든 지 10주년을 앞두고 스님이 족적을 남긴 현장의 찾아 그 가르침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그 가르침을 배우는 계기가 되고자 합니다. 

법정스님의 생가터는 무소유의 상징처럼 텅 비어 있다. 스님의 살았던 원래 초가는 사라졌고, 해남군이 생가터를 매입해 복원계획을 세우고 있다. 좌측은 생가터를 알려주고 있는 나무 명패.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궁색한 빈털터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때 우리는 보다 홀가분한 삶을 이룰 수가 있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이것은 소극적인 생활 태도가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법정스님의 저서 <산에는 꽃이 피네>를 비롯한 스님의 다양한 저서에 기록돼 있는 ‘무소유’에 대한 설명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는 얼마나 많은 소유를 하며 살아갈까. 그 많고 많은 소유의 삶에 스님은 ‘무소유’란 단어를 불쑥 세상에 내밀며 ‘맑은 가난’의 가르침을 설파했다. 

“내가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는 이들은 좋은 친구이다. 그러나 내가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려고 하는데 자꾸만 뭔가 갖다주는 사람은 나에게 달갑지 않은 친구이다. 내가 아무것도 갖지 않았을 때 온 세상을 차지할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가졌다고 할 때 크건 작건 그것의 노예가 된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소유를 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자유해진다.” ‘<산에는 꽃이 피네> 중에서’

소유욕을 타파한 스님의 가르침은 우리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삶에 대한 명징한 가치를 제시한 스님의 법문은 영혼에 큰 울림을 주었다. 단순히 먹고 사는 삶의 문제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라 문명사회에 내리는 ‘경책의 죽비’였다. 

“사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나는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었다. 살만큼 살다가 이 지상의 적(籍)에서 사라져 갈 때에도 빈손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살다 보니 이것저것 내 몫이 생기게 된 것이다. 물론 일상에 소용되는 물건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될 정도로 꼭 요긴한 것들만일까? 살펴볼수록 없어도 좋을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마만큼 많이 얽히어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수필집 <무소유> 가운데 ‘무소유’에 담긴 주옥같은 스님의 글귀다. 스님의 글은 불자들은 물론 시대를 살아가는 온 국민들에게 큰 가르침이 됐고, 스님의 우리시대의 스승이자 선지식으로 추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법정스님의 책들은 출간하는대로 베스트셀러가 됐고, 이 중 <무소유>는 판매량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스터디셀러가 됐고 법정스님을 ‘무소유의 가르침을 심어 준 시대의 스승’으로 받들게 된다. 
 

법정스님이 어릴 때 살았던 선두리 마을 선착장.
법정스님이 어릴 때 살았던 선두리 마을 선착장.

지난 3월18일. 법정스님 열반 10주년 특별기획의 첫 번째 순서로 찾은 스님의 출생지인 전남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마을에 빗방울이 날렸다. 봄기운이 완연한 남도에 내리는 비는 겨울 가뭄을 해갈하는 단비다. 서울에서 KTX를 타고 3시간 남짓 목포에서 내려 승용차로 한 시간여 남짓한 이 길을 법정스님 당시에는 이틀은 족히 걸렸을 거리다. 

아무런 정보 없이 주소 하나만 가지고 찾아간 선두리 마을이지만 법정스님의 생가터를 찾아가는데 걸린 시간은 채 5분도 되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수소문하려고 찾아가는 도로 바로 앞에 표지석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선두리 선착장(우수영 선착장)에서 약 200여m 남짓한 삼거리 공터에 ‘법정스님 생가터’라는 명패가 서 있고, 그 옆에 ‘새주소 해남군 문내면 우수영안길 81’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법정스님의 생가는 초가였으나 이사를 가면서 허물어졌고, 다른 사람이 양철지붕의 집을 짓고 살았으나 지금은 해남군이 매입해 허물고 공터로 남아 있었다. 텅빈 생가터는 스님의 무소유를 상징하는 것 같아 이대로 오랫동안 비워 두어도 좋을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두리 선착장 마을은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스산했다. 스님이 어렸을 때만 해도 이곳은 해상교통의 요지였다. 멀리 여수에서 완도 - 해창 - 진도 - 선두리(우수영) - 목포를 오가는 여객선이 7척이나 다녔다.  

지금은 제주도를 오가는 여객선이 하루 한번 다니는 한적한 포구가 됐다. 평소에도 북적였던 선두리 선착장은 5일마다 장이 서서 더했을 터다. 요즘은 5일장마저 인근지역으로 이동해 더 한산했다. 생가터 앞 가게에 ‘주민갤러리’나 ‘다큐멘트 상영관’ ‘우수영 마을 책방(관광안내소)’이 있지만 개점휴업을 한듯하다. 

자료를 찾아보니 이곳 일원은 지난 2015년 문화마을로 지정돼 10개 마을에 벽화 조성을 비롯해 아트카페 및 생활사박물관, 강강술래 아트로드, 시(詩) 조형물 등 38점의 작품을 설치했다. 빈 점포들을 활용해 전시관과 카페, 아트샵 등으로 꾸미고, 폐교된 우수영 초등학교에는 아트캠프를 조성했다. 
 

선두리 마을 중턱에서 본 초등학교(폐교)와 섬 양도(羊島).
선두리 마을 중턱에서 본 초등학교(폐교)와 섬 양도(羊島).

선착장 입구에는 400여년 전 이순신 장군이 왜구와 치열하게 싸웠던 명량해전을 스토리텔링한 거대한 벽화도 그려져 있었다. 4년 전 예산을 들여 거창하게 진행했던 문화마을 프로젝트는 성공을 거둔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이런 문화마을 삼거리 정중앙에 법정스님 생가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생가터 옆집 아주머니가 부지런히 자신의 집 주변 풀들을 호미로 제거하느라 허리를 굽히고 있다. 이른 봄철이지만 남도의 땅은 벌써 웃자란 잡초가 지천이다. 

“아주머니, 여기가 법정스님 생가터 맞죠?.”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확인할 겸 법정스님에 대한 정보를 좀 더 알고 싶어 물어보았다. 

“예.” 

외지인의 방문이 달갑지 않은 듯, 대답조차 하기 싫은 듯 더 이상 돌아오는 답이 없다. 발길을 돌려 다른 인기척을 찾아본다. 몇 발치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문화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정재카페’가 있다. 과거 제일여관으로 사용했던 건물을 개조해 생활사박물관도 겸한 듯 다양한 생활도구가 전시돼 있다. 그곳에서 스님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법정스님의 친척의 부인인 주봉란(65)씨가 이 마을에서 문화유산해설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주말에는 사람들이 많이 방문해요. 우수영 문화마을이기도 하고 법정스님 생가터를 찾는 관광버스도 옵니다.” 

선두리 마을로 시집을 와서 줄곧 살고 있다는 주 씨는 “법정스님이 살았던 때는 초가였으며 이후 매각돼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가 현재는 해남군이 주변 땅까지 매입해 빈터가 되어 있다”고 했다. 살았던 시기가 달라 법정스님의 유년시절에 대한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다. 대신 법정스님과 함께 살았던 분이 있다고 소개했다. 

선두리 마을에 살고 있는 임준문(83)씨였다. 법정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전화를 했다. 기꺼이 취재에 협조해 주겠다고 했다. 그가 생가터 앞에 스님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 많은 듯 뭔가를 손에 들고 나왔다. 

해남=여태동 기자 tdyeo@ibulgyo.com
이준엽 광주전남지사장 maha0703@ibulgyo.com

[불교신문3476호/2019년4월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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