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에서 만나는 우리 역사] <23> 속초 보광사
[사찰에서 만나는 우리 역사] <23> 속초 보광사
  • 박부영 기자
  • 승인 2019.03.25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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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관 나업과 한씨 부인의 ‘러브스토리’ 간직

영랑호 아름다운 풍광 자랑
대웅전 불상 복장 안에서
400여년 전 발원문 나와

내관 위해 발원 첫 불상
전문가 감탄 자아낸 보물

보광사 전경

속초 영랑호를 가면 보광사(普光寺)가 있다. 해수와 담수가 반반 섞인 호수와 설악산이 한 눈에 들어오는 명소에 자리한 보광사는 속초가 숨겨놓은 보물이다. 그 속에는 아름다운 러브스토리가 있어 슬프기도 하다.

속초의 보물

보광사는 속초의 과거와 현재를 함께 해온 속초를 대표하는 가람이다. 속초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영랑호를 들어오면 초입에 보광사가 자리하고 있다. 지난 19일 속초는 진달래와 목련이 활짝 필 정도로 따뜻했다. 절 입구에는 카페가 들어서 있다. 차 한 대가 지나가는 정도의 폭 크기인 골목을 들어가면 평지의 넓은 경내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입구에 조성한 넓은 호수가 절 경치를 더 빛내준다. 언제부터인가 청둥오리 두 마리가 떠나지 않고 제 집 인 양 살고 있다. 절 정면에 대웅전이, 그 옆에 지장전이 있다. 오른쪽으로는 공양간 종무소 주지스님 숙소 등으로 쓰는 요사채다. 대웅전 옆 와불(臥佛)이 눈길을 끈다. 와불 주변만 밤새 불을 밝히는 것이 이채롭다.

보광사 러브스토리는 우연히 찾아왔다. 어쩌면 그 날이 오기를 기다렸는지 모르겠다. 지난 2010년 보광사를 우연히 방문한 최선일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눈에 대웅전에 모신 불상이 조선 후기 조성된 것으로 보였다. 보광사는 일제가 대동아 전쟁을 일으키던 1938년 정화담 스님이 창건했다. 절에서는 당연히 그 당시 조성했을 것으로 여겼다. 보광사는 금강산 안양암이 폭우로 유실돼 현재 자리에 이건(移建)하여 건봉사 속초포교당으로 출발했다. 

현재의 조계사도 같은 년도 같은 방식으로 새 출발했다. 승려 도성출입이 해제되고 사대문 안에 최초로 각황사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현재의 조계사는 1938년 총본산건립 운동 차원에서 새 출발 하며 북한산 태고사를 이건하는 형태를 띠고 이름도 태고사로 변경했다. 이에 보광사에 주석하는 스님은 “아마 일제 시대 기존 사찰을 이건하는 형식이 아니면 새로 절을 못 세우게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어쨌든 묘한 인연이다.

최선일 박사의 의견에 따라 내부 복장을 조사한 결과 17세기에 조성된 불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불상에는 놀라운 사연이 숨어 있었다. 불상을 조성한 발원자는 내관 나업의 부인이었다. 복장 안에서 한 씨 성을 가진 부인의 발원문이 나왔다.

지장보살좌상

복장에서 나온 발원문

“<앞부분 생략> 원컨대 부처님께서는 대자대비로 어여삐 여기시어 섭수하소서. 또 원하오니 삶과 죽음을 당할 때에 이 맹세를 어기지 말며 근본의 이치를 깨달아 죄업장의 인연을 영원히 소멸하시고 이 원력을 이으셔서, 극락으로 속히 가셔서 아미타 부처님을 친견하여서 이마를 어루 만져주시는 수기를 받으소서. 널리 원하옵건대, 이 공덕으로 먼저 가신 조부모님께서 법계에 왕생하셔서 모두 해탈함을 입으시고, 모두 성스러운 영역을 오르시어 영원히 고통을 떠나시며, 사생육도 모든 중생들이 고통을 떠날 수 있게 하여 함께 정각을 이루기를 제자들은 여법히 봉행합니다.

시방국토를 유희자재하시며 보이고 들리며 형체를 가지고 이름을 가진 자는 모두 보리의 오묘한 성과를 얻고, 함께 불사를 이루시어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를 마음을 따라 발원합니다. 지장대성불사 증명공덕을 다같이 발원한 사람을 뒤에 기록합니다.

불상대시주 한씨는 엎드려 남편인 숭록대부 나업을 위하여 극락에 가셔서 환생하여 함께 아미타부처님 뵈옵게 되기를 빕니다. 등휘(僧)도 또한 바라건대, 부모님께서 직접 불기를 받으시고 모두 해탈을 입으셔서 극락구품 연화대 위로 왕생하기를 빕니다.“

‘갑오년 8월29일 금강산 안양암에 안치하다’는 내용을 끝으로 발원문은 끝난다. 갑오년은 1654년이다.

지난 2017년 동북아불교미술연구소(소장 석문스님)가 주최하여 개최한 세미나에서 내관 나업의 정체가 밝혀졌다. 권순삼 은평향토사학회 연구위원이 나업의 묘를 찾아 비문 내용을 해석하고 조선실록 승정원일기 등의 문헌을 통해 발원문에 등장한 인물을 세상 밖으로 호출했다. 

권순삼씨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 소재한 청주한씨 질경공파 묘역을 뒤져 마침내 나업과 한씨 부인의 비명이 적힌 묘표(墓表)를 찾았다. 묘역에는 봉분 앞에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상석 좌우에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 묘표 1기가 있는 전형적인 사대부 무덤의 양식을 갖췄다. 묘표 전면에는 ‘숭록대부행내시부상선나공양위지묘’라고 묘의 주인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뒷면에는 묘지의 주인공에 관한 소개가 적혀 있었다.

 

조정에서 뛰어난 활약 보인 나업

보살상 모신 대웅전

상선(尙膳)은 왕을 보좌하는 내시의 최고 직위다. 그의 이름은 나업(羅嶪)이다. 1596년에 태어나 1654년 59세로 사망했다. 광해군 4년 17살에 내시부에 들어갔다. 부인은 청주 한씨로 나업보다 한 살 연상이다. 나업이 죽고 21년을 더 살았다. 한씨 부인은 81세 천수를 누렸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 일기를 확인한 결과 나업은 인조가 가장 총애하는 최측근이었으며 병자호란을 전후로 조선 조정과 청과의 관계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었다. 1636년 12월9일 청나라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하자 인조는 강화도 피신을 결정한다. 먼저 숙의 세자비, 원손과 인조 뒤를 이어 효종에 오르는 봉림대군, 인평대군을 강화도로 가게 했다. 

이들을 승정원 승지 한홍일과 함께 나업이 수행했다. 왕을 호위하는 본진은 청군이 강화도 건너가는 길을 막는 바람에 남한산성으로 들어간다. 강화도의 봉림대군이 남한산성의 인조에게 보내는 서신을 나업이 전달했다. 전장에서 서신을 전달하는 역은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안되는 위험하고 막중한 소임이다. 그 공을 높이 평가 받은 듯 하다. 그는 정2품으로 진급하고 말 노비 밭 등을 하사받았다.

그의 활약은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하고 사신을 보낼 때 나업이 차출된다. 1638년 6월 청나라에서 요구한 결혼 처녀단자를 사신단과 함께 심양으로 가지고 갔다. 이를 시작으로 나업은 모두 5차례 청을 방문한다. 모두 중요한 방문이었다. 1639년 2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모시고 심양을 찾았고, 1642년5월 인평대군을 수행하였으며, 1649년과 50년 사이 효종이 즉위한 뒤 한번은 사은사로 또 한 번은 청나라 왕실과 혼인하는 효종의 양녀 의순공주를 따라 청을 찾았다. 

그는 단순한 사신단이 아니었던 듯 하다. 인조는 청의 요구 사항을 수습하는 역할을 그에게 맡겼다. 청의 요구를 조선 조정에 단순 전달하는데 그치지도 않았다. 나업은 청이 요구하는 세공미를 줄였다는 공로로 인조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청과의 외교 역할 뿐만 아니라 궐내 공사도 담당했다.

탁월한 외교관 능력 보여

문헌에 나타나는 활약으로 미뤄 그는 비범한 인물로 추정된다. 우선 외교관으로서 탁월한 수완을 선보였다. 5번이나 청의 수도 심양을 방문했다는 사실은 그가 청과 조선 양측으로 부터 신뢰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외교관으로서 능력과 신뢰를 보여주지 않았다면 그토록 자주 사절단에 포함되지 못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갈 때 마다 세자 등 왕자와 공주를 수행했다. 

외교관으로 그의 능력은 인조가 청이 요구하는 후속 처리를 맡기고 또 청과 협상을 벌인데서도 나타난다. 청 황실과 외교전을 펼쳤다는 것은 언어 소통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아무리 뛰어난 협상가라해도 중간에 통역을 놓으면 내밀한 이야기를 하기 어렵다. 그는 청황실의 만주어와 중국어에 능통했을 것이다. 

다른 나라 언어를 구사하기 위해서는 언어 감각이 뛰어나고 각별한 노력을 펼쳐야하며 무엇보다 적극적이고 활달하며 대담한 성격을 갖고 있어야 한다. 명에서 청으로 주도권이 넘어가는 동북아 국제 질서 변혁기에 패전국 조선의 일개 내관이 양국 외교 무대를 오가며 맹활약했다는 것은 나업이 얼마나 대담하고 비범한 인물인가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영랑호

그는 권력욕도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나업은 효종 2년 1651년 인평대군이 연경으로 가던 날 가교를 타고 있었다는 이유로 대간들로부터 탄핵을 받아 파직된다. 한 마디로 건방지다는 이유다. 인조가 승하하던 자리에 세자와 함께 있을 정도로 총애를 받고 효종이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을 때 동행했던 나업이니 위세가 대단했을 것이다. 왕자가 타는 가마에 자기도 모르게 탔을 수도 있다. 관료들이 보기에 ‘감히 내시 주제’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안하무인이었는지 모른다. 

달리 생각하면 그 만큼 권력욕이 강했던 인물이다. 아마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한 뒤 조용히 물러났으면 파직이라는 수모는 겪지 않았을지 모른다. 오늘날에도 자식이 권력이든 기업이든 물려받으면 선대의 공신과 측근은 물리치는 법이다. 효종 역시 비록 심양에서 함께 고락을 보냈다 해도 선친의 측근이 자신의 곁을 지키는 상황이 불편했을 것이다. 인조가 죽기 전 얼마나 신신당부했겠는가? 

그의 아들에게는 상선(尙膳)을 곁에 두고 조언을 들어라 했을 것이고, 나업에게는 세자를 잘 보필 할 것을 당부했으리라. 하지만 그의 나이 그 때 벌써 55세, 요즘에도 퇴직할 나이다. 책임감을 내세우기 보다 시류에 따라 물러났으면 좋았으리라. 파직된 것이 억울했는지, 아니면 일에 너무 열중해서 건강을 해쳤는지 관직에서 물러난 뒤 4년 만에 세상을 떠난다.

비범하지만 권력욕 강했던 듯

그런데 그의 관(棺)이 처갓집 선산에 묻혔다. 조선 후기 성리학이 득세를 하고 사대부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내관은 내시라는 이름으로 매도당한다. 내관의 무덤은 문중에서 파묘됐다. 그런데 나업의 무덤은 지금까지 처갓집 선산에서 흠 없이 발견됐다. 이는 나업이 처갓집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우선 재물로 많은 기여를 했을 것이다. 그는 많은 공을 세우고 그 때 마다 토지 노비 가축 등 수많은 하사품을 받았다. 청을 오가며 무역하며 돈을 많이 모았을 것이다. 

왕의 최측근에게 선을 대려는 사람은 또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 모든 것이 예나 지금이나 물질로 통한다. 두 번 째는 청주 한씨 자제들의 벼슬길을 열었을 것으로 추정가능하다. 이 역시 그 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국제 정세가 요동치고 조선이 풍전등화에 놓였을 때 목숨을 걸고 현란한 외교술을 펼치고 조정의 실세로 등극할 정도로 냉철하고 야심만만한 나업은 재물은 처와 처가를 위해 아낌없이 받칠 정도로 사랑 앞에서는 지고지순한 순정남이 아니었을까? 

나업이 죽은 21년 뒤 한씨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한씨 집안은 두 사람을 합장하고 묘표를 세워 죽어서도 둘의 사랑을 맺게 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한 한 남자의 순정과 헌신을 처가에서도 깊이 감사했기 때문이리라.

그토록 애절하고 깊은 사랑이어서 400여년 뒤 금강산이 올려다 보이는 속초 영랑호의 사찰에 홀연히 나타난 것일 까? 내관을 위해 발원한 불상은 처음 발견됐다. 이 역시 참 희귀한 인연이다. 보광사는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한 남자와 이름 모르는 여성의 러브 스토리를 연극으로 올린다고 한다. 400년을 건너 찾아온 내관 나업과 한씨 부인의 불멸의 사랑이 영랑호의 물결에 드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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