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선지식구법여행] <41> 불교신문 사장 진우스님

불교신문 사장 진우스님은 지난 3월22일 조계사 대웅전에서 열린 조계사불교대학 총동문회와 본지 공동주최 ‘53선지식 구법여행’에 41번째 법사로 나서 걱정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법문했다.

불교의 최종 목표는 해탈이다. 무엇으로부터 해탈하는 것인가. 번뇌, 걱정근심으로부터 탈출이다. 괴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태를 우리는 성불이라고 한다. 수행자나 세속에 있는 사람들은 결국 부처가 돼야 한다. 부처가 되지 않으면 중생으로 남게 되고, 윤회하게 된다. 어떻게 하면 걱정근심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물론 기도하고 참선하고 염불하면 좋다. 신심이 깊어야 가능한 일이라 우리에게 당장 와 닿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마음은 어떤 모양일까. 이론적으로 마음의 모양을 구별하면 6근(六根), 6경(六境), 6식(六識)이라고 하지 않나. 안이비설신의가 내 육신을 이루고 있다. 내 육신을 받쳐 나라고 주장하는 마음의 모양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말나식, 나를 나라고 생각하는 마음, 자의식이다. 또 하나는 아뢰야식이다. 업장, 업식, 까르마, 업이라고 하는 저장창고가 있다. 습관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데, 내가 지나온 생 동안 겪었던 내용들이 저장돼 있다가 나오는 것이다. 어디서 나오냐면 소위 아뢰야식이라는 업식에서 나온다.

업을 크게 나누면 두 가지인데 색(色)은 물질, 수(受)는 감정이다. 좋은 감정, 나쁜 감정,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감정을 고락사(苦樂捨)의 삼수(三受)라고 한다. 누구나 이 세 가지 감정이 있다. 하나는 좋은 감정, 하나는 나쁜 감정이다. 좋고 괴롭고, 기쁘고 슬프고, 행복하고 불행한 감정 등으로 구분된다. 우리 마음을 업이라고 하는데, 마음은 고와 락 두 가지 감정으로 이뤄져 있다. 색은 물질세계다. 일체는 시간과 공간을 말한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 삼세라고 한다. 공간은 시방이라고 한다. 시방삼세를 만드는 게 마음이다.

이 세상을 들여다보면 두 가지 현상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생로병사하고, 성주괴공한다는 것이다. 단단한 다이아몬드도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사라진다. 모든 생명은 태어나면 늙고 병들고 죽기 마련이다. 이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세상에 없다. 그것을 우리는 보통 연기라고 한다. 물질세계에서 생로병사, 성주괴공하고 연기에 의해 변해가니 나라고 하는 실체가 없다. 제행무상이니까 제법무아일 수밖에 없다. 그것을 공성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기분 안 좋고 걱정근심하고, 욕심대로 잘 안 되서 괴로운 이 마음은 대체 무엇일까. 공이면 이런 마음이 없어야 되는 것 아닌가. 물질세계는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내가 가진 감정은 무엇일까.

인간은 누구나 괴롭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려면 즐거워야 한다. 즐거움도 생로병사한다. 어느 때 굉장히 기쁘지만 그 기분이 오래 가지 않는다. 기쁜 마음, 행복한 마음도 마찬가지다. 오래 가지 않는다. 그런 현상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부처님께서는 연기법으로 설명해주셨다. 12연기의 첫 번째가 무명이다. 지혜가 없다는 것이고 밝지 않은 것이니 기분이 나쁜 것에서 시작한다. <구약성서>에 보면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 있었다. 선악과를 먹고 부끄러움이 생겼다고 한다. 그 전에 무분별, 중도의 세계에 있었다. 선악과를 먹고 결국 분별하기 시작하고 사바가 도탄의 세계가 된 것 아닌가.

무명은 상대적인 분별을 가졌다는 의미이다. 부처님께서 생사해탈을 하신 것은, 태어났다는 분별심이 없으니까 죽는다는 것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좋다는 건 나쁜 것이 있다는 뜻이다. 태어났다고 인식한다면 죽음은 당연하다. 산다고 인식하는 즉시 죽음이 기다리고 있고, 내가 늙었다는 것은 젊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의미다. 내가 병들었다 하면 병들지 않고 건강한 때가 있었다는 말이다. 이것을 인과라고 한다. 좋은 일 하면 좋은 결과 얻고, 나쁜 생각하면 나쁜 과보를 얻는다고 한다. 이것은 수평적인 인과고, 수직적인 인과는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죽는 것이고 건강했기 때문에 병든 것이다. 해가 떴기 때문에 지는 것이고 밀물이 와서 썰물이 되는 것이다. 내가 행복했으니 불행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게 인과이고 우리 마음이다.

우린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 좋은 것을 구하려고 하고 행복하려고 하고 만족하려고 한다. 우리의 모든 행위, 말하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결국 내가 불행하지 않고 불편하지 않고 불만족스럽지 않기 위한 것이다. 내가 지금 자식을 위해 산다고 한다면, 진짜 자식을 위함도 있지만 그렇게 해야 내 마음이 편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내가 덜 괴롭다는 얘기다. 사실은 자식은 자식대로 업이 있고, 나도 내 업이 있다. 내가 편하게 해줬다고 해서 자식이 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부모는 너를 위해 내가 이렇게 노력했다고 하지만, 부모 스스로 자기를 위해서 한 것 아닌가. 각자가 하는 행위는 누구를 위해 한다는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

여러분이 지금부터 알아야 할 것은 하나가 생기면 다른 하나가 생긴다는 것이다. 기쁘고 행복함을 구하려고 하면 할수록 그것과 똑같은 슬픔과 불행이 생긴다. 1년을 놓고 보면 여름엔 해가 길고, 겨울엔 밤이 길다. 1년을 통틀어 낮과 밤의 길이를 재면 같다. 세상 모든 인과의 내용이 그렇다. 밀물이 들어온 만큼 썰물이 돼서 나간다.

우리 마음의 모양도 사실은 같다. 즐거움의 무게가 10kg이면 괴로움도 10kg이다. 기쁨과 슬픔도 동량이다. 질량보존의 법칙이 마음에도 적용된다. 우리가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데는 괴로움이 붙는다. 괴로움의 질량은 즐거움의 질량과 같다. 내가 웃고 즐거워한 만큼, 몸서리치도록 행복한 때가 있었다면 그만큼 괴로울 때도 있었다는 말이다. 때에 따라보면 어느 사람은 더 행복해 보이고, 어느 사람은 불행해 보인다. 그러나 삼세를 놓고 따져보면 똑같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중도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이다. 길의 한 가운데를 중도가 아니라, 이것과 저것이 없는 것, 좋은 것도 없으니 나쁜 것도 없다. 삶도 없고 죽음도 없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더 즐거워라, 더 행복해라 라고 하신 적이 없다. 인과가 생기기 때문이다. 밀물이 들어왔다. 부처님 법력으로 밀물을 못 나가게 할 수 있나? 부처님은 그런 걸 신통이라고 하지 않으신다. 이 세상은 생로병사와 성주죄공을 통해 인연에 의해 연기하며 돌아간다. 그 내용들이 보면 항상하지 않고(무상) 무명에 의해 분별하다 보니 이것과 저것으로 나누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좋고 나쁨을 얹지 말라고 하셨다. 산은 그냥 산으로 보고 높은 산 낮은 산으로 구분해 좋고 나쁜 감정을 얹지 말라는 것이다.

해가 뜨는 시간, 해가 지는 시간이 있듯이 기분 좋은 시간이 있다면, 기분 나쁠 때가 있다. 그게 언제일까. 가끔가다 아무 일 없는데 기분이 좋을 때가 있다. 고락의 업장이 기분 좋음이 드러날 때이다.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어떤 행위를 함으로써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험에 합격해서 기분이 좋다고 생각하나. 기분이 좋을 시절 인연이 돼서 합격하는 것이다. 이게 각자 갖고 있는 업이다. 이것을 알아야 대책을 세울 수 있다.

지난 22일 조계사 대웅전에서 열린 53선지식구법여행에 참석한 조계사 불교대학 총동문회 회원들이 법문을 듣고 있다.

별 노력 안해도 폼나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상대적으로 힘들게 살기도 한다. 그러나 우연히 나타나는 게 아니다. 반드시 원인이 있다. 아무리 잘살고 잘생긴 사람도 괴로운 업의 시기가 되면 괴로운 일이 생긴다. 조건이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다. 잘생긴 사람은 잘생긴 것 하나만으로도 평생 기분 좋게 살아야 되지 않나. 부자면 평생 기분 좋게 살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좋은 대학 나와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유명하고 존경을 얻어도 자기 괴로움은 있다. 이 원인은 어떤 물리적 현상으로 충족될 수 없는 업들이 있기 때문이다. 불교적으로 보며 전생부터 따져보면 된다.

지금부터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행동 하나하나 말 한마디 할 때마다 인과의 업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이 잘 안되거나 기분이 나쁘거나 불행한 마음이 든다, 괴롭다 슬프다 하면 조건이 잘못 되서 그런 것 이전에 내 마음에 분별하는 업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과보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한다. 자식이 속을 썩인다고 하면 그 이전에 나의 분별로 인해 괴로운 업이 나타날 시간이 됐는데, 자식을 통해 나타난다고 믿어야 한다. 그러면 다른 사람 탓을 할 일이 없다. 내가 지금 속상하고 괴롭고 슬프고 한 것은 어떤 대상이 문제가 아니다. 그 대상 또한 내가 만든 것 아닌가. 내 업 속에 미운 마음이 없으면, 싫은 것이 없으면 그것이 보일 리가 없다.

세상이 칠보로 이뤄져 있다고 해도 내가 기분 나쁘면 무슨 소용일까. 문제는 나다. 살면서 어떤 겉모양, 조건에 얽매이는 것은 초보적인 삶이다. 어떤 일을 하거나, 대상을 만나거나 내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지 생활에 적용시켜 살아가길 바란다. 인과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내 업을 내 스스로 멸하는 것이다. 내가 행복하게 살아야지 하고 애를 쓰면 인과에 의해 불행이 또 따른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윤회하는 것이다.

각자가 갖고 있는 괴로움과 즐거움의 질량은 같다. 누구나 차이가 없다. 다만 우리 스님들이 수행하고 화두 정진하는 이유는 분별심이라는 고락의 업을 없애기 위해서다. 좋은 것을 없애면 나쁜 것도 없어진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이라는 두 분별 자체를 없애는 게 깨달음이고 성불이다. 이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그 때는 모든 걸 여여하게 본다. 시비가 없는, 좋고 나쁨이 없는 것이다. 똥통에 빠져도 기분이 나쁘지 않고, 꽃밭에 있어도 크게 기쁘지 않다. 무해무득이다. 깨달음의 환희로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밖에서 뭔가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된다. 기분 나쁜 현상 일어날 때 내 스스로 업으로 돌려야 업이 줄어든다. 좀 더 적극적으로 하려면 참선하는 것이 가장 좋다. 참선은 내 분별된 생각을 줄여주기 때문이다. 염불을 정기적으로 하거나 절 수행을 하고 보시하는 것도 좋다. 보시는 원래 내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갖고 있는 욕심을 비워내는 것이다. 아깝다고 생각하면 비울 수 없지 않나. 보시하면 할수록 욕심과 업장이 줄어들기 때문에 인과가 생기지 않는다. 마음이든 재산이든 물건이든 조건 없는 보시를 통해 내 업을 멸하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업멸을 하는데 남의 탓 환경 탓 조건 탓은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기도 참선 염불 간경하면서 좋은 업을 지어가고, 나쁜 업을 멸하는 행위를 해야 한다. 그리고 보시하는 것을 잘 기억해 윤회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길 바란다.

금요일 늦은 시간에도 53선지식구법여행에 참석한 불자들의 탁마열기가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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