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년(殘年)
 

- 우리에게 남은 시간

덕현스님 지음
도서출판 법화

덕현스님 지음 도서출판 법화

“겨울잠이 밀려왔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책은 문장들이 아주 깊다. 신간 <잔년>에서 지은이 덕현스님은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시종일관 삶의 의미에 대해 자문하고 있다. 전반적인 얼개는 살아가면서 만나온 사람들에 대한 소감문이기도 하고, 중국불교를 주제로 한 기행문이기도 하다. 동서양을 넘나드는 인문학적 소양도 풀어놓는다.

‘서울대 법대’ 출신
스님이 진지하게 말하는
인생의 진정한 성공

그러나 틀에 박힌 설법이 아니며 상투적인 권선(勸善)과도 거리가 멀다. 누구를 가르치기보다는 자신을 바로잡기 위한 성찰이 앞선다. 세상에 대한 관심이 많은 시선이고 나아가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시선이지만, 언제나 마지막엔 마음의 안쪽을 겨눈다. ‘어떻게 살아야만 어디서나 행복할 수 있는가.’ “많은 순간 누구에게나, 자신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가 짐이요, 형벌 같은 것이다. 지나온 아득한 자취도 가뭇하지만 또 걸어가야 할 막막하고 까마득한 앞길을 보면 어찌 어느 순간 그만 다 내려놓고 쉬고 싶지 않겠는가(7페이지)?”

덕현스님은 신간 <잔년>에서 내면의 평화로움을 성취할 때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마침표보다 물음표가 더 많은 글들이다. 망설이고 서성이고 자못 지쳐서 터덜거리는 발걸음이지만 목적지를 잃어버리지는 않는다. 우리에겐 겨울잠이 필요하다는 것. 그만 좀 떠들고 자기 것 좀 그만 챙기고 이제는 한숨 자라는 것. “알고 보면, 사람이 평화에 대해 떠드는 일은 대부분 도리어 평화를 깨뜨리는 짓이다. 평화는 언설보다 훨씬 깊은 데 있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느낌이 생각보다 진실에 가깝다 해도, 참된 평화는 오히려 그 느낌보다도 더 심오한 본연의 것이다(34페이지).” 마음이 편치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 겨울잠이란 쉬어야만 만날 수 있는 행복이요 전진과 투쟁을 포기해야만 만날 수 있는 행복이다. “우리 젊은 발걸음엔 너무 힘이 많이 들어가 있었다. 포행(包行)이나 방랑할 줄을 몰랐었다고 할까? 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지 못했었고, 미처 쉴 줄을 몰랐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외로움의 의미도, 함께하는 기쁨도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27페이지).”  

젊고 건강한 날들엔 죽음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알고 보면, 살아간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것이다. 지금 막 태어난 갓난아기의 삶이라도 앞으로 그에게 주어질 삶은 잔년(殘年)이다. 그 잔년이 아깝고 아쉬워서 아이부터 노인들까지 “쉼 없이 내달리며 매일을 차곡차곡 보태어가지만, 뒤돌아보면 빈손”이다. 내가 나의 화근인 것이다. “'나'라는 것이 무엇일까? 누구에게나 그것은 공연히 스스로 자기 마음속에서 일으킨 하나의 생각, 분별, 망상에 불과하다. 그것이 있든 없든, 일어나든 일어나지 않든, 우리는 무심으로, 본래자기로 진정한 내면의 평화로움 속에 존재한다(115페이지).”

그러므로 나를 내려놓을 수 있다면 남은 생이라도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들의 진정한 자아는 본래 자유로움 그 자체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그 무엇에도 묶이지 않으며, 그 누구의 노예도 아니고 그 누구와도 짝하지 않는다. 그 무엇도 아니며, 그 무엇도 될 수 있다(224페이지).” 나는 어떻게 살아도 특별하다. 이 세상에 ‘나’는 오직 나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를 모르겠다고 생각될 때, 풀밭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거나 강에 나룻배를 띄우고 그냥 앉아있어 보라. 가슴에 여울져오는 고요한 기쁨이 답해준다. 아니, 의문은 온데간데없고, 거기 답 따위가 필요치 않았음을 알게 된다(38페이지).”

저자인 덕현스님은 그 유명한 ‘서울대 법대’ 출신이다. 책에서는 이력을 숨기고 있지만 아는 사람은 안다. 한국 사회의 영원한 스승 법정스님에게 감복해 출세가도를 저 멀리 밀어냈다. 법정스님 아래로 출가해 서울 길상사 주지를 지냈으며 현재 불교수행공동체 ‘법화림’을 이끌고 있다. 함께 정진하고 서로 배려하며 부처님의 삶을 익혀가자는 모임이다. “미로를 헤매듯 누구나 다 뿔뿔이 제 길을 터덜댈 뿐이지만, 삶은 사실은 나를 비워 너에게로 가는 길이었다. (중략) 지금부터는 나 죽어, 부디 잔년(殘年)을 살고 싶은 것이다(28페이지).” 책을 읽으면 ‘너에게로 가는 길’이 상당히 순조롭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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