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문자로 자성 찾는다? 불구덩이 속 물거품이로다”

정관 일선스님은 서산대사의 문하의 장자 격으로 전란 중에도 본분을 잃지 않는 수행자의 풍모를 보여준 대표적 선사다. 사진은 무주 백련사에 있는 부도.

사명처럼, 당시 승군으로 활동했던 스님들이 살생업보인줄 뻔히 알면서도 살육현장에 나가야 했던 심정이 어떠했을까? 게다가 당시 승려들의 신분이 사회적으로 보장된 위치도 아니었다. 사명대사는 사숙인 부휴 선수(浮休善修, 1543~1615)와 매우 가까웠는데, 선수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나라가 어지러워 저는 승려로서의 본분사를 다하지 못하고 있으니, 저 대신 스님께서 열심히 정법을 이어주십시오.”

‘서산대사’ 청허 휴정의 제자 중 사명처럼 의승군으로 활동한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류도 있었다. 제자들 중에는 승려가 어찌 칼을 들고 사람을 살상해야 하는가에 대해 탐탁치 않게 보는 이들도 있었다. 서산의 제자는 70여 명인데, 네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의승군을 이끄는 의승장으로 활약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기허 영규, 뇌묵 처영, 사명이다. 둘째는 의승군도 아니고 산중에서 수도하는 것도 아닌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이들인데, 편양 언기가 이에 해당한다. 셋째는 의승군으로 잠깐 활동했다가 전쟁이 마무리되면서 은둔한 경우인데, 경헌, 청매 인오, 기암 법견 등이다. 넷째는 수도에만 전념하면서 승려의 본분을 지켜야 한다는 이들로서 정관 일선, 소요 태능, 부휴선수(휴정과 동문) 등이다.

은둔 독자적 선풍…정관 일선 

소요 태능스님은 임진왜란 중에도 폐사를 복원하며 선사로서 역할을 다해온 수행자다. ‘자연만물과 합일된 탈속적인 이미지’, ‘선교 근원은 하나’, ‘조사선 선풍’이 그의 특징으로 꼽힌다. 사진은 해남 대흥사 조사전에 있는 진영.

어느 선사가 더 옳은 길을 걸었는가, 누가 더 승려다운 본분을 지켰는가, 누가 더 자비로운 인물인가? 근자에 한국불교 위상을 드러내는 한 방편으로 호국정신의 승려들을 내세우지만 누가 옳고 그르다는 평을 한다는 것 자체도 어불성설이다. 모두가 각자의 입장에서 옳은 선택을 한 것이요, 제 삼자가 어떤 관점을 두고 평을 할 수 없다. 필자에게는 어느 분이든 모두가 다 선지식이다.

그 가운데 네 번째 해당하는 정관 일선(靜觀 一禪, 1533~1608)은 ‘승려로서 전란에 참여하는 것은 불도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하면서 수행자는 산중에서 청정하게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선은 휴정의 제자 가운데 장자급에 해당하는데, 사명이 전쟁 후에도 산중으로 돌아오지 않자, 빨리 산중으로 돌아올 것을 당부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서산대사 문파의 맏형으로서 중심을 잡아 주었던 것이다. 앞에서도 한번 언급했지만, 일선은 사명 유정, 편양 언기, 소요 태능과 함께 휴정계의 4대 문파 가운데 한 파를 이루었다.

일선의 속성은 곽(郭)씨이며 충청남도 연산(連山)에서 태어났다. 15세에 출가하여 1547년(명종 2년)에 백하 선운(白霞 禪雲)에게서 <법화경>을 배웠고, 후에 휴정 문하에서 수행한 뒤 법을 전해 받았다. 일선의 행적에 대해서는 널리 알려진 것이 없으나, 전란에 운둔해 살면서 수행자의 본분을 잃지 않은 인물이다. 임진란이 발생했을 때 일선의 세속 나이 60에 해당하는데, 일선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수륙재를 지내며 홀로 수행했다. 만년에는 대암사, 복천암 등에 주석하면서 200여 명의 제자들에게 <법화경>을 강론하며, 제자들을 양성했다. 

일선은 “세 척 취모검(吹毛劍)을 오래도록 북두칠성에 감추어 두었더니 텅 빈 하늘에 구름이 다 걷히고 난 후 비로소 한 치 어긋남도 없이 날카로운 칼날이 드러나도다”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법랍 61세, 세수 76세로 덕유산 백련사에서 입적했다. 임성 충언, 호연 태호, 운곡 충휘 등 제자들이 있다. 18세기 이후까지 전하던 그의 법맥은 무경 자수(無竟 子秀, 1664~1737)를 끝으로 전하지 않는다. 제자들은 선사의 사리를 수습하여 속리산 법주사와 덕유산 백련사에 부도를 세웠다. 

일선이 입적한지 13년이 지난 1621년, 제자 보천(普天)이 시문을 모아 펴낸 <정관집> 1권이 전한다. 일선의 선풍과 선시를 보자.

첫째, 일선은 <법화경>을 중시했고, 도솔산, 약수암 등지에서 간화선 수행을 하며 염불도 중시했다. 수행관은 (조선 후기 선사들에게 전반적으로 드러난) 삼문수업(三門修業)이라고 볼 수 있다. 삼문은 염불문(念佛門), 원돈문(圓頓門), 경절문(徑截門) 사상이다. 염불정토와 선(徑截門), 교학(圓頓門)에서 어느 것 하나 소홀하지 않는 ‘삼문일치’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일선은 은둔하며 독자적인 선풍을 진작시켰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선사는 “승려들이 절을 떠나 활동하면서 속세의 습관이 싹터서 출가한 뜻을 잊고 계율을 버려둔 채 허명만을 좇는 폐해가 생겼다”고 당시 풍조를 따끔하게 비판했을 정도다. 대사의 이런 수행관은 선시에도 드러난다. 시문에서는 혼란 가운데서도 본분을 잃지 않는 수행자의 풍모를 보여주고 있다. “수행자는 모름지기 세속을 떠나 발우 하나 지니고, 세상사를 벗어던지는도다. 속세를 벗어난 노을과 안개, 마음에 흡족하니 중생의 어지러운 욕심과 번뇌, 좇을 일이 없구나. 유유(悠悠)한 세월, 마음따라 한가로이 보내며 산천을 따라 자재로이 노닌다. 언어문자로 자성을 찾는 일은 불구덩이 속에서 물거품을 찾는 것과 같다.” 

‘혜감선사 소요 태능 

구례 연곡사에 있는 소요 태능스님의 부도.

소요 태능(逍遙 太能, 1562∼1649)은 처음 부휴 선수에게 배운 후 휴정 문하에 들어 그의 법을 받았다. 편양 언기와 함께 휴정의 양대 법맥(편양파와 소요문파)을 이루었다. 태능의 선(禪)은 침굉 현변(枕肱 懸辯, 1616~1684), 교(敎)는 해운 경열(海雲 敬悅, 1580∼1646)이 이었으며, 전법 제자가 30여 명에 이른다. 태능은 구례 연곡사를 중심으로 활약하면서 벽송 지엄과 스승인 부용 영관의 사상을 강조했다. 

태능의 속성은 오씨, 전라남도 담양 출신으로 호는 소요(逍遙)다. 어머니가 신승(神僧)으로부터 ‘대승경(大乘經)’ 받는 태몽을 꾸었으며, 태어나면서부터 살갗이 선명하고 골격이 씩씩했다. 어려서부터 탐욕이 없고, 도훈(道訓) 듣기를 즐겨했으며, 베풀기를 좋아하고, 자비심이 많아 마을사람들이 그를 ‘성동(聖童)’이라고 불렀다. 13세에 백양산에 놀러갔다가 뛰어난 경치를 보고 곧 세속을 떠나기로 결심한 뒤 출가했다. 이 무렵 부휴(浮休, 휴정과 동문)가 속리산과 해인사로 다니면서 교화를 폈는데, 그 문하에서 경(經)과 율(律)을 공부했다. 부휴 문하에 수백 제자들이 있었으나, 부휴는 충휘, 응상과 더불어 태능을 포함해 삼걸(三傑)이라 칭했다.

이후 태능은 서산 휴정의 선풍이 크게 진작되고 있음을 알고 찾아가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물었다. 태능은 휴정으로부터 바로 인가받고, 그의 문하에서 3년간 공부했다.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서산 휴정으로부터 “그림자 없는 나무를 베어 와서, 물속의 거품을 다 태우네. 우습도다. 소를 탄 사람이요, 소를 타고 다시 소를 찾는구나(斫來無影樹 燋盡水中漚 可笑騎牛者 騎牛更覓牛)”라는 전게(傳偈)를 받았다. 태능이 깨달음을 이루었을 때가 20세이다.

30세 무렵, 임란이 발병했을 때, 승려들이 전쟁터로 나가자 태능은 사찰을 지키며 폐허된 절을 불사하고, 전쟁 희생자들을 위해 수륙재를 지냈다. 이후 1624년(인조 2) 62세에 조정서 남한산성을 축조하려 할 때 그에게 서성(西城)을 보완케 하는 임무를 받아 이를 완수했다. 

만년에 지리산의 신흥사와 연곡사를 중건했는데, 태능의 도력에 감화된 사람들의 도움으로 며칠 만에 공사를 마쳤다. 한편 그가 법을 설하면 짐승들과 이류(異類)들까지도 감복했다고 한다. 1649년 열반이 가까웠음을 알고 제자들에게 설법하다가, 붓을 찾아 “해탈이 해탈 아니거늘 열반이 어찌 고향이겠는가! 취모검 빛이 빛나고 빛나니 입으로 말하면 그 칼날 맞으리”라는 임종게를 남기고 법랍 75세, 나이 87세로 입적했다. 사리를 연곡사, 금산사, 보개산 세 곳에 나누어 봉안하고 부도를 건립했다. 태능의 도를 흠모한 효종이 1652년에 ‘혜감선사(慧鑑禪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저서로는 <소요당집> 1권이 있다. 태능 사상의 특징을 보자. 

첫째, 태능은 13세에 이 세상을 진로(塵勞)로 여기고, 출가함으로써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지켰다. 이 점은 그의 선시에 자연만물과 합일된 탈속적인 이미지로 드러나 있다. “얼마나 많은 벼슬아치들 부침을 하는가! 누가 알겠는가? 한 조각 흰 구름 골짜기 하늘이 가난한 납자에게 준 것이 만금 같아라.” “뜨락에 내리는 비에 꽃은 웃음 짓고, 난간 밖 바람에 소나무 운다. 참선을 해야만 깨닫는가. 있는 그대로가 원만한 깨달음인 것을.”

둘째, 선(禪)과 교(敎)가 하나의 근원에서 파생됐다고 보는 관점이 드러나 있다. 교학적인 측면에는 화엄사상이 드러난 면이 많으며, <원각경>이나 <능엄경> 등의 사상이 언급되어 있다.

하지만 이 점은 스승 휴정과 일맥상통하는데, 교보다는 선 쪽에 기울어져 있다. 물론 이런 측면은 조선시대 스님들의 보편적인 사상이요, 현 한국 승려들의 풍조이기도 하다. 

셋째, 태능의 선풍에 조사선 사상이 드러나 있다. 그의 문집에는 마조, 황벽, 임제, 덕산, 그리고 조동선풍까지도 아울러 수용하고 있다. 그의 선사상 일부분을 요약해보자. ‘본래청정하고 자재하며 완전한 일물(一物)이 있다. 그런데 이 일물은 밖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닌 자신에게 내재된 자성(自性)에서 구해진다. 이 자성이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 있으며 모든 사물에 작용하면서도 그 스스로는 초월적이다. 자성인 참된 주인공이 모든 것의 주인이다. 참 주인공을 철두철미하게 자각한 사람은 무위진인(無位眞人)으로서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아니하고, 올곧은 주인으로 살아간다.’ 

[불교신문3473호/2019년3월23일자]

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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