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 없는 자식을 낳을 것이라니, 도대체 무슨!”

 

 

고구려 소수림왕 2년, 국내성 

벌써 며칠째 같은 꿈이 계속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러다 말겠지 싶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꿈은 점점 생생해졌다. 밤마다 잠이 들면 기다렸다는 것처럼 한 여인이 꿈속으로 찾아왔다. 날마다 꿈속을 찾아오는 여인은 중년의 귀부인이었다. 고운 미색이 남아있는 얼굴, 귀해 보이는 비단옷과 장신구 그리고 우아한 말투를 보면 신분이 높은 것이 분명했다.

“귀해 보이는 분께서 도대체 왜 나를 계속 찾아오는 걸까?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잠에서 깬 꿈의 주인은 여운이 남은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차라리 훤칠하게 잘 생긴 남자였다면 잠드는 것도, 꿈꾸는 것도, 잠에서 깨는 것도 훨씬 즐거웠을지도 모른다. 발가락이 여러 개 달린 용이나 혹은 세 발 달린 영험한 까마귀가 꿈에 나왔다면 진작에 신관을 찾아가 해몽을 부탁했을 것이다. 고구려는 세 발 달린 검은 까마귀를 길조로 여겼다. 만약 국운을 점칠 수 있는 길몽이라는 결과가 나왔다면 운명을 바꿀 기회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꿈은 아니었다. 

순령은 꿈 생각을 떨치려는 듯 얼른 일어나 몸단장을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궁녀로 지내는 것은 꽤 괜찮은 일이었다. 밥을 굶는 일도 거의 없었고 낡은 옷을 걸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가끔 일반 백성들은 꿈도 못 꿀 맛있는 음식이 하사될 때도 있었고 화장품이나 노리개를 구하기도 수월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어스름하게 날이 밝아오는 것을 본 순령은 서둘러 왕후전으로 향했다. 이제 곧 왕후께서 기침하실 시간이었다. 

“마마, 일어나셨습니까?”

“들어오게.”

왕후전 궁녀 순령의 평범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세수 시중을 마친 순령은 왕후의 머리칼을 빗질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왕후는 의아한 눈으로 순령을 보았다. 평소 순령은 손이 야무지고 눈치도 빨랐다. 일솜씨 또한 꼼꼼하고 입이 무거워 왕후는 그녀를 신임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빗질하는 손길이 느렸고 두어 번 눈길을 주었지만 알아차리지 못했다. 

“자네, 요즘 무슨 일이 있는가.” 

멍한 표정으로 빗질을 하던 순령은 왕후의 목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용서해주세요, 마마.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나 봅니다.” “자네를 나무라는 것이 아닐세. 괜찮다, 웃고 있는 표정 너머에 앉아있는 고민이 영 사라지지를 않아 보여서 말이야. 고민은 있는데 어디 털어놓을 곳이 영 마땅치 않은 모양이야. 말해 보게나. 내가 들어줄 테니.”

“요 며칠 매일 밤 같은 꿈을 꾸는 것이 마음에 걸려 저도 모르게 얼굴에 드러났나 봅니다. 꿈이란 본디 우습고 황당한 경우가 많으니 마마께서 염려하실 만큼 중요한 일은 아니옵니다. 괜히 마마의 심기를 어지럽힌 것 같아 송구합니다.”

“꿈이라고 했는가? 꿈은 우습고 황당하기도 하지만 또 중요한 일을 미리 알려주기도 하지. 어떤 재미난 꿈인지 궁금하구먼. 마침 오늘은 급한 일도 없고 한가하니 그저 나의 말동무가 되어준다 생각하고 들려줄 수 있겠나?” 

“실은 그게 말입니다. 마마.”

궁녀 순령의 꿈

“아이의 아버지는 
고구려인이 아니며 
그대 뿐 아니라 그 어떤 여인과도 
혼인할 수 없는 사람이다”

다음은 기억조차 없었다 
귓가를 떠도는 것은 오직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뿐…

“천계의 신들께서
여래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중지를 모아 
결정한 일이니 행여 
하늘을 원망하지 말게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니”

안심하라며 미소를 짓는 왕후의 인자한 얼굴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꿈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왔다. 왕후는 진지한 얼굴로 순령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때로는 심각한 표정을 짓기도 하고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왕후가 앞에 계시니 꿈이 더 생생하게 떠올랐다. 순령은 이야기를 마칠 때쯤에서야 꿈속에 나왔던 우아한 귀부인의 분위기가 왕후와 무척 닮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꿈에서 보았을 때는 그저 높은 신분의 귀족 부인인 줄 알았는데 어쩌면 왕비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꿈속에 나온 귀부인께서 스스로 유화부인이라 말씀하셨다고?”

“그렇습니다. 마마. 분명히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어젯밤 꿈에 처음으로 이름을 말씀하셔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들을수록 신기하구먼. 자네 꿈이 예사 꿈이 아닌 것은 분명하네. 유화부인이 누구인지는 아는가?”

“처음에는 꿈에서 아무 말씀이 없으시길래 혹, 오래 전 세상을 떠난 귀족의 부인이신가 했습니다. 두 번째 오셨을 때는 궁에 머무셨던 왕비이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가?”

“분명 처음 보았지만 낯설지가 않았습니다. 생각해보니 마마와 닮으신 모습이 많은 것 같아 그리 느낀 것 같습니다.”

“그러한가? 어젯밤에 오셨을 땐 누구인지 알아차렸는가?”

순령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유화부인’이라고 불리는 여인은 고구려에서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고구려의 시조이자 하늘님의 손자인 주몽신의 어머니 이름이 바로 ‘유화’였다. 순령은 그토록 귀한 분을 꿈에서 만났다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두려웠다. 

“유화부인을 모르는 이는 고구려인이라 할 수 없을 테지. 아니 그러한가?”

순령의 무거운 얼굴을 본 왕후가 부드럽게 말을 이어갔다.

“고구려 백성의 젖줄인 압록수를 다스리는 하백님의 첫째 따님이시자, 하늘님의 아드님인 해모수님의 아내이며, 주몽신을 낳으신 분 아니신가. 주몽신을 모신 신전마다 유화부인도 함께 모셔져 있으니 유화부인은 주몽신의 어머니이자 모든 고구려인의 어머니와 같은 분이시지.”

“사실 두렵사옵니다. 그리 귀한 분께서 어찌 저의 꿈에 계속해서 오시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오늘 밤에도 유화부인께서 자네의 꿈에 오시거든 예를 갖춰 인사를 드린 뒤 무슨 연유로 오셨는지 잘 여쭤보는 것이야. 어쩌면 자네가 질문해주길 기다리시느라 계속 오셨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마마께 말씀드릴 수 있어 참으로 다행입니다.” 

“아닐세. 나도 유화부인의 대답이 궁금하네. 오늘 밤 꿈에도 찾아오시거든 꼭 인사를 올리고 유화부인께서 답을 하시거든 내게도 꼭 들려주게.”

“그리하겠습니다, 마마. 감사합니다.”

순령은 거듭 머리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올렸다. 오늘밤에는 오랜만에 잠을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밤이 깊어갈수록 궁은 고요해졌다. 무슨 재미난 이야기라도 있는 듯 자리에 누워서도 속닥거림을 멈추지 않던 어린 궁녀아이들도 곯아떨어진 지 오래였다. 궁녀들의 처소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순령 밖에 없는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은 순령은 이불에 얼굴을 묻고 거듭 한숨을 쉬었다.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등허리에 한기가 올라왔다. 순령은 눈을 질끈 감으며 몸서리를 쳤다. 꿈속에서 유화부인이 했던 말이 머리와 가슴을 헤집고 다니는 것 같았다. 

“괜히 물어봤어. 그냥 보고도 모른 척 할 걸. 그냥 잠든 척 할 걸.”

멍하니 앉아있던 순령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아비 없는 자식이라니. 아비 없는 자식을 낳을 것이라니. 그게 도대체 무슨!”  행여 누가 들을까 무서운 말이었다. 하지만 유화부인은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그대는 아비 없는 아이를 낳아 키우게 될 것이다. 아이의 아버지는 고구려인이 아니며 그대 뿐 아니라 그 어떤 여인과도 혼인할 수 없는 사람이다.”

다음은 기억조차 없었다. 유화부인이 무언가 이야기를 더 하는 것 같았으나 아무것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귓가를 떠도는 것은 오직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뿐이었다. 

“중요한 말이 남아서 아무래도 자네 꿈에 며칠 더 신세를 져야겠네. 천계의 신들께서 여래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중지를 모아 결정한 일이니 행여 하늘을 원망하지 말게.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니.” 

 

[불교신문3472호/2019년3월20일자]

글 조민기  삽화 견동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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