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소카 왕 아들 마힌다스님 인도에서 날아오다

빛나는 불교최초의 순간들

이수루무니아 사원 벽화: 불교 전래과정 중 500인의 아이들이 출가하는 행렬모습.

눈부시게 흰 옷을 입은 스리랑카 사람들이 가파른 바위를 오르내렸다. 난간이 있어도 아찔하게만 보이는 바위에 올라 참배를 하는 것은 그 자리가 이 나라의 불교 도래지이기 때문이다. 아소카 왕의 아들로 스리랑카에 파견되어 불교를 전한 마힌다 스님. 그는 6인의 스님들과 함께 신통력으로 인도에서 날아와 바위 정상에 내려앉았다고 한다. 하늘을 날아왔다는 건 신성성을 위한 각색이겠으나, 전법의 터를 잡은 마힌다 스님이 그 바위에 올라 이 나라를 불국토로 만들리라는 사자후를 울렸을 법하다. 

스님이 도착한 지 며칠 지난 5월 보름, 당시 스리랑카의 왕인 데와남피야 티사와 극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스님은 사슴사냥에 나선 왕을 만나 망고나무를 소재로 한 선문답으로 불법을 받아들일 만한 지혜를 지녔음을 알아차렸고, 왕은 스님의 설법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그 자리에서 불교에 귀의했다. 이 나라에 불교가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이다. 기원전 3세기, 스리랑카의 고대수도 아누라다푸라에서 조금 떨어진 야트막한 야산 ‘미힌탈레’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었다. 

두 사람이 만났던 자리에는 마힌다 스님의 유골을 모신 탑이 건립되었다. 합장한 왕의 동상을 탑 앞에 세우고 탑 이름 또한 ‘망고’라는 뜻의 ‘암바스탈라’라 하여, 망고나무 문답으로 만난 두 사람의 깊은 인연을 나타냈다. 마침 그곳을 찾은 시간에 악사 3인의 연주가 있었는데 매일 탑 앞에서 치르는 의식이라 한다. 태평소, 작은북, 장구에 해당하는 악기들이었다. 

당시 왕은 스님을 수도로 청해 모시고 법회를 열었다. 법문을 들은 왕실, 귀족, 백성 8천500인이 불자가 되었고 귀족자녀 500인이 스님께 계를 받아 승단이 구성되기에 이른다. 이에 왕은 이수루무니아 사원을 지어 보시함으로써 최초의 사원이자 승가대학이 탄생하였다. 복원한 사원 내부에는 마힌다 스님의 불교 전래과정이 16점의 벽화로 그려져 있는데, 출가하는 아이들 500인의 행렬그림 맨 앞에 암바스탈라 탑에서 본 악기들을 연주하는 3인의 악사가 그려져 있어 놀랍고 반가웠다. 

2300년 전 고대도시에서 숨 막히게 펼쳐진 불교 최초의 빛나는 순간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벽화로 새겨진 그 순간순간은 마힌다 스님을 기리는 악사들의 법음처럼 오늘날에도 활기차게 이어지고 있었다. 

스리랑카에 뿌리내린 보리수

마힌다 스님을 모신 암바스탈라 탑과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들.

스리랑카 최초의 비구가 마힌다 스님이라면, 최초의 비구니는 그의 여동생 상가미타 스님이다. 오라버니에 이어 상가미타 스님까지 북인도를 떠나 머나먼 타지로 오게 된 데는 스리랑카 여성들의 깊은 불심이 작용했다. 마힌다 스님이 전한 불교가 스리랑카에 싹을 틔우면서 왕의 처제였던 아눌라 왕비가 500인의 여성들과 함께 출가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구는 여성에게 수계를 할 수 없기에, 마힌다 스님은 왕으로 하여금 부친인 아소카왕에게 사신을 보내 상가미타 스님과 보리수 남쪽가지를 요청토록 하였다. 

이렇게 스리랑카로 건너온 상가미타 스님을 비롯한 11인의 비구니와 자그마한 보리수 가지는 불교사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게 된다. 부처님 재세 시에 출범한 비구니 계맥이 인도를 떠나 또 다른 나라 스리랑카라에 뿌리 내리며 비구니승단을 탄생시켰음이요, 남방불교에 보리수신앙의 확산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스님이 가져와 심은 가지는 바로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룬 자리에 그늘을 드리웠던 보드가야의 보리수에서 이식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 이름도 위대한 깨달음의 나무, ‘스리마하보디 트리’이다. 스리랑카 사람들은 이 보리수를 부처님 대하듯 귀하게 섬겼고 점차 스리마하보디뿐만 아니라 보리수 자체를 신성하게 여기는 신앙이 깊어졌다. 스리랑카 사원 어느 곳이나 법당과 탑과 보리수가 삼위일체를 이루며 나란히 모셔져 있는 내력이다. 보리수 앞에 꽃을 올리는 이, 주변을 도는 이, 멀리 또는 가까이 앉아 경전을 읽거나 기도하는 이들의 모습은 부처님의 그늘 아래 있는 불자들답게 평화롭고 자유롭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지켜본 2600년 전 그 보리수에서 싹튼 가지가 이 나라 땅에서 아름드리나무로 성장했고, 그 뒤 보드가야의 원래 보리수는 죽고 말아 스리마하보디 가지를 다시 옮겨 심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상징적이다. 남방불교국가 전역에도 스리마하보디의 가지가 옮겨져 자손을 번성시키고 있듯이, 부처님의 깨달음을 뜻하는 보리수가 스리랑카에 깊이 뿌리내려 상좌부불교의 종주국으로서 정통성을 이어가는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나뭇잎에 새긴 최초의 경전

알루비하라 사원 벽화: 패엽경 조성을 지켜보는 스님들.

수십 명 스님들의 형형한 눈빛이 쏟아지는 가운데 한 스님이 진지하게 무언가를 새기고 있었다. 구전(口傳)으로 전승되어온 부처님의 말씀이 처음 문자로 기록되던 기원전 1세기 알루비하라 동굴사원에서의 장면이다. 스리랑카불교의 최대성지 가운데 하나인 이곳의 작은 석굴 안에서, 야자수 잎에 경전을 새기던 패엽경(貝葉經) 조성 당시의 모습이 그렇게 조각상과 벽화로 재현되어 있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랫동안 입에서 입으로만 전승되었다. 입멸 후 3차에 걸친 경전결집은 팔리어로 구술된 것이었고, 스리랑카에 불법을 전한 마힌다 스님 일행은 경ㆍ율ㆍ논 삼장(三藏)을 모두 외운 이들이었다. 부처님의 말씀을 암송하는 것은 출가자의 가장 소중한 수행이자 의무였기에 외기 쉽도록 짧은 운율로 다듬어져 사자상승(師子相承)되어왔던 것이다. 

경전을 기록하려는 생각은 인도남부 타밀족의 침입에다 기근이 겹쳐 백성은 물론 승가 전체가 위태로운 상황을 겪으면서 깊어졌다. “앉아있을 힘조차 없어 모래 위에 머리를 얹고 누운 채 암송했다”는 기록은 삼장이 단절되지 않도록 애쓴 스리랑카 스님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게다가 대승계통이 들어오면서 승가분열이 일어나, 부처님 당시의 생생한 가르침을 성문화하기 위한 작업은 더 이상 미룰 수 없이 실행으로 옮겨졌다. 

이에 500인의 장로급 승려들이 모여 열네 곳의 동굴에서 경전을 기록하는 방대한 불사가 시작되었다. 패엽경은 야자수 잎을 찌고 말려 뾰족한 도구로 문자를 새긴 다음, 그 위에 잉크를 붓고 문질러 홈의 글씨가 드러나게 하는 방식으로 조성되었다. 한 문장마다 일일이 검증과 합의를 거치고, 오류 없이 문자화되는 과정을 매의 눈으로 지켜보며 이루어낸 당시의 삼장기록은 제4차 결집으로 간주되곤 한다.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헌이 성립된 이곳은 알루비하라, ‘찬란히 빛나는 석굴’이라는 이름을 지녔다. 

그 뒤 패엽경은 2천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19세기 스리랑카를 강점한 영국이 저항세력의 대대적 소탕작업을 벌이던 중 동굴에서 수천의 패엽경 뭉치를 발견한 것이다. 초기불교의 삼장은 이렇게 인류와 만나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으니, 최초의 문자경전을 탄생시킨 그들의 ‘팔리어경전’에 대한 자긍심은 세계의 인정을 받을 만하다. 

알루비하라 사원에 재현해놓은 패엽경.

비구니계맥의 단절과 복원

“우리는 십계(十戒)를 지키며 살아가겠습니다.” 19세기 말 스리랑카의 여성 재가자들이 스스로 십계를 지키겠노라 선언했다. 엘리트출신의 이들은 당시 불교계가 여성의 종교적 염원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직시하며 삭발하고 흰색 가사를 입은 채 아라마야라는 종교공동체에 모여 살았다. 이들은 ‘십계를 지키는 여성들’이라 하여 ‘다사 실 마타보’라 불린다. 제도권 승단에 들어가지 못하지만 출가수행자로서 여법하게 살아가는 여성들을 대변한 외침이었다. 

“우리는 승려가 될 수 없습니다. 사회가 여성승려를 인정하지 않으니 어떻게 해야 승려가 되지요?” 이러한 외침은 그로부터 백년이 지난 20세기 말에도 세계여성불자대회에 참석한 스리랑카 비구니스님으로부터 이어졌다. 

기원전 3세기에 상가미타 스님이 계맥을 전했듯이 스리랑카의 비구니승가는 불교 전래와 역사를 같이한다. 이른 시기 이 나라에 뿌리를 내렸건만 어찌된 일일까. 11세기 초 남인도 촐라국의 침입으로 나라가 무너지다시피 하면서 힌두교통치자에 의해 불교승단이 절멸되고만 것이다. 이후 비구승가는 미얀마에 전해줬던 계맥을 다시 이어왔으나, 비구니승가는 다른 남방불교국도 마찬가지 사정이라 복원되지 못했다. 1200년 만에 비구니의 계맥은 완전히 끊어졌고 그로부터 1천 년간 상좌부불교의 비구니승가는 역사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스리랑카 고산지대에서 차를 따는 여인. 그림=구미래

그 뒤 단절된 비구니계맥이 스리랑카에 재건되었다. 1996년 인도의 사르나트에서 한국ㆍ대만 등 대승불교권의 비구니스님들이 남방의 사미니스님들에게 구족계를 전했기 때문이다. 계맥이 끊긴 상좌부불교권의 여러 나라 스님들이 비구니계를 받고 돌아갔으나 자국의 비구승단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오직 스리랑카불교계만이 인정하여 계맥을 잇게 된 것이다. 상좌부 율장과 어긋나 여전히 정통성을 문제 삼는 원로비구들이 있지만, 천년 만에 재건된 비구니계맥의 의미는 크고도 깊다. 스리랑카를 시작으로, 모든 불교국가의 사부대중이 각자 여법한 자리에서 함께 불교를 굳건히 이어나갈 그날을 기대해본다. 

[불교신문3472호/2019년3월20일자]

구미래 불교민속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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