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를 이루고자 하면 중생과 더불어 살라”

 

 

평생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실천한 청담순호(靑潭淳浩, 1902~1971)스님. 늘 가사를 수하고 육환장을 들고 대중을 맞이한 청담스님은 ‘수행자의 표상’이었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법은 법상 위가 아니라 
우리의 생활 속에 있어 
‘실재의 나’ 찾을 때 인류구제
미물이라도 목숨부터 구하라 

단 한사람이라도
제도받지 않은 중생 있는 한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으로

둘 가진 자는 하나를 
하나 가진 자는 반을 나누고
반도 없는 사람은
내 몸 바쳐서라도 봉사해야

마음, 마음 이 마음은 산(生)것이요 죽은(死)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마음은 생명 없는 허공도 아니요, 또한 생명이 아닌 무기물질도 아닌 것이다. 물질도 허공도 아닌 이 마음은 우주의 생명이다. 또 이 마음은 물질도 허공도 아닐 뿐 아니라 지식도 사상도 신앙도 아니며 부처님도 하나님도 일체중생도 아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것도 아니다. 오직 살아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마음이라 하는 것조차 크게 그르치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마음도 아닌 마음 이것이 곧 인생보완의 진면목이다. 이것같이 나 자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마음 이전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이 마음을 성(性)이다, 도(道)다, 이(理)다, 영(靈)이다, 신(神)이다, 생명이다, 정신이다, 반야(般若)다, 열반이다, 보살이다, 진리다, 여여(如如)다, 일각이다, 법화다, 화엄이다 등의 여러 가지 망사로 규정짓고 유물, 유신, 유심, 과학, 철학, 종교를 논하면서 인생을 현혹하고 있다. 이 마음은 영원불멸의 실재이며 절대자유의 생명이며 우주의 핵심이며 온누리의 진리며 천지조화의 본체이며 신의 섭리이며 문화창조의 원동력이다. 

그리고 인생도 인류문화 창조도 모두 이 마음의 환각으로 꿈속의 꿈에 불과한 것이다. 이 엄청난 꿈 가운데서 정말로 꿈이 아닌 것은 오직 이 마음 아닌 마음인 이 ‘나’뿐이다. 이러한 영원불멸의 자기자신을 잃어버린 이유는 ‘나’라고 하는 이 육신이 지수화풍(地水火風)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졌다가 흩어져 없어진다는 법리(法理)를 망각하고 이 육신만이 자기자신이라고 착각한 소치의 결과 영겁토록 생사의 고(苦)에서 헤어날 길이 없고 인고의 사슬을 끊지 못한다. 그러나 마음도 아닌 마음인 이 나(我), 허공도 물질도 아닌 이 ‘실재의 나’를 찾을 때 불안과 공포에서 헤어나는 인류 구제의 길은 있는 것이다. 오늘 인류는 정신세계를 외면하고 물질과학의 비약적 발전으로 인하여 극단한 유물사상에 현혹되어 자아상실이나 자기 부재라는 불행한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류는 허탈과 실의에 사로잡혀 불안한 사회에서 방황하게 되었고 드디어는 자멸 직전까지 이르고야 말았다. 이와 같은 현실을 직시한 대한불교조계종은 비분을 참지 못하여 분연히 일어나 전 세계의 동원대덕(同願大德)들을 일당에 모시고 인류 불행의 근원이 되는 암흑의 유물사상을 배제하고 인류평화와 행복에 기여하기 위하여 다음 세 가지 불사를 작여(作與)하고자 한다. 

첫째, 영원불멸의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생사의 고통을 초극하여 안심입명처를 얻음으로써 치열한 생존경쟁이 빚어내는 전쟁을 지구상에서 영원히 조절하여 평화의 세계를 건설하고자 한다. 둘째, 생사윤회가 지속됨을 확신케 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대서원력을 발휘케 한다. 셋째, 인과응보는 우주만유가 흥망성쇠 하는 법리(法理)이며 진리임을 철저히 신뢰케 하여 인류로 하여금 윤리관 도덕관 사회관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게 함으로서 인류사회의 질서 유지에 만전을 기한다. 

이 인연공덕으로 일체 중생과 더불어 다 함께 성불의 길로 나아가길 바라는 바이다. 만물 중에 하나인 사람으로서 능히 하늘, 땅과 같이 쳐서 삼재(三才)라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부처님께서는 제일에 산목숨을 죽이지 말아라(第一不殺生)하셨으며 예전 말씀에도 ‘천지의 대덕을 살리는 것(天德地大日生)이요, 사람의 대덕은 어진 것(人類之至德日仁)이라’하였으니 사람으로서 어질지 않으면 사람의 가치가 없고 사람의 가치가 없으면 삼재에 참례하지 못할 것이니 어떻게 사람의 어진 마음을 보존하고 자라게 할까? 아마도 물건을 살리는 것이 가장 좋은 도리일 것은 두 말씀도 할 것 아니다. 모든 동물들의 그 모양은 우리사람과 다르지만 죽기를 싫어하고 살기를 좋아하는 마음만은 조금도 다르지 않은데 사람이 스스로 구별하여 천하게 보고 함부로 취급하는 것부터가 사람의 양심이 아닌데다가 남을 괴롭게 하고 내가 즐거우며 남을 죽이고 내가 살겠다는 것은 참으로 어진 마음이 조금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여러 가지 즉 편하려거든 방생하고 즐거우려거든 방생하고 부귀하려거든 방생하고 무병하려거든 방생하고 장수하려거든 방생하고 부귀영화하려거든 방생하고 자손창성하려거든 방생하시오. 중생의 목숨을 살리는 것이 가장 어진 마음이고 어진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원하는 바가 자연 성취되는 법이니 ‘하늘을 순하면 창성하고 거스르면 망한다(順天者昌 逆天者亡)’는 원칙이 있는 까닭이다. 

예전 조사의 말씀에 이런 것이 있다. 네가 만일 살려거든 방생을 하여라. 이것이 순화하는 참다운 도리니라. 저것이 만일 죽을 때에 네가 구해주게 되면 네가 죽게 되는 때에 그가 너를 구하리라. 장수하고 아들 낳기 별 방법이 없으니 살생 말고 방생하면 그뿐이다(汝欲廷生須放生/ 此是循環眞道理/ 他若死時爾救他/ 爾若死時他救爾/ 廷生生子無別方/ 戒殺放生而己矣). 

지금 시대에는 예전과 달라서 사람과 사람끼리도 서로 서로 죽이고 죽고 하는 것은 구하지 못하면서 동물을 사랑하고 살리려는 것은 지나치는 일이 아니냐고 하시는 분도 있겠지마는 사람보다 나쁘게 대우하는 동물을 먼저 사랑하고 살리기 시작하면 자연히 어진 마음이 점점 자라날 뿐 아니라 서로 서로 권하여서 사람마다 그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벌써 인류는 서로 살리고 제도하게 되어서 전 세계가 인간극락으로 화(化)할 수 있다. 

불교신문 전신 ‘대한불교’ 제763호(1978년 10월22일자) 2면에 실린 청담스님 법문. 스님의 7주기를 앞두고 ‘성불의 길’을 주제로 한 법문을 ‘이달에 법문’으로 실었다.

모름지기 마음이 깨끗하면 우리는 곧 불성에 도달하는 것이다. 우리는 탐욕으로 인하여 분별심을 내고 사랑과 미움을 갖는다.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아첨을 하게하고 미움은 원수를 낳는다. 탐욕이 있는 한 우리의 마음은 맑아질 수 없고 무명의 어둠에 싸여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 오늘 여기에 모이신 대중은 부처님의 법을 그려서 모였다. 그러므로 휘몰아오는 악법을 없애고 부처님께 돌아가 참성품을 받고자 한다. 그러나 여러분이 오늘 부처님의 몸을 얻고자한다면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오늘 우리가 봉축하는 석가모니부처가 부처인줄을 누가 아는가. 아직도 석가세존이 부처인줄을 모른다. 모를 밖에 없는 것이다. 쉼 없이 변천하는 사바의 현상계에 올려있는 우리들이 가슴에 홀연히 떴다가 사라지곤 하는 석가세존을 누가 감히 부처다 부처 아니다 하겠나? 부처는 본래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것을 사람은 부처를 보았다고 한다. 

본래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것을 사람은 흔히 부처를 보았다고 한다. 본래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부처, 그것은 ‘부처가 부처를 보지 못하거늘 하물며 무엇을 부처라고 하는고’하는 옛 선사의 말을 알아 두어야만 할 수 있다는 말이고 비로소 부처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우리가 현상계에 머물러 있는 한 불멸의 부처를 찾아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부처님의 성상은 우리의 눈을 멀게 하였고 49년 설법은 우리의 귀를 멀게 하였으니 즉 무엇으로 부처를 보고 듣겠나? 

눈이 멀고 귀가 먹은 것은 무념무상의 경지이다. 참으로 눈이 멀고 귀먹은 자연현상계를 초월하면 적멸무위한 경지에 들고 그 경지에 들었다는 생각까지를 버려서 무아무인이 되면 만물은 공한 것이다. 

공한 속에서 부처는 어찌 있고 부처를 보고 들은 자는 어찌 있을 수가 있겠는가. 이 모두가 망상인 것을 알아야 한다. 유무를 벗어나 반성해야 한다. 또 오늘 우리가 부처를 찾고자 이 곳에 모였다고 하면 마땅히 다짐하여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모든 중생에게 불성(佛性)이 있는데 굳이 부처는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그 까닭을 찾아서 살피고 다짐하는 일이다. 부처를 찾아서 나 혼자만이 부처가 되고자 하면 모두가 틀렸다.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함은 중생이 곧 부처라는 말이다. 중생이 되지 않고 어떻게 그 불성을 내 것으로 할 수 있겠는가? 석가세존께서 가섭에게 법을 전하실 때도 대중 가운데서 하셨다. ‘염화시중’이 그것이다. 우리 속에서 꽃을 들어 보이신 것이야말로 법을 이어받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그것은 법이 법상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 속에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법을 구하고 부처를 이루고자 하는 중생과 더불어 살아야 함을 가르친 것이다.

현대에 있어서 불자들이 법을 구하고자 한다면 대중과 함께 사는 길을 찾아나가야 한다. 그것은 단 한사람이라도 제도 받지 않은 중생이 있는 한은 성불하지 않겠다고 하는 서원으로 봉사하는 보살도이다. 둘을 가진 자는 하나를 나누어 주고 하나를 가진 자는 반을 나누어 주고 반도 없는 자는 내 몸을 바쳐서라도 봉사해야 한다. 

남을 위하고 법을 위한다는 생각 없이 행하여야 한다. 혼탁한 사회를 탓할 것이 아니라 종단의 사부대중은 모두 다 같이 이 혼탁한 사회 속에 뛰어들어 비록 내 몸에 때가 묻는 한이 있더라도 주변을 정화하는 것이야말로 불자의 본연한 자세이다.  

[불교신문3471호/2019년3월16일자]

정리=김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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