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달린 동자승…1700년만에 세상 밖으로”

‘선선국’ 수도 실크로드 남로 거점 
1907년 英 고고학자 스타인 발견
로마 관련 지역 화가 ‘티타’ 작품 
간다라식 착의법 불교 존상 ‘확인’

실크로 남로의 교역거점이었던 선선국의 수도 ‘미란’의 유적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4층에 위치한 중앙아시아실에 가면 비슈반타라왕자벽화(須達拏太子本生壁畵)라는 작은 벽화 한 점이 전시되어 있다. 이 벽화는 미란(Miran) 제5사원 터에서 발굴된 것으로, 1911년 미란을 방문했던 일본 오타니(大谷)탐험대의 다치바나 즈이초(橘瑞超)가 수집했다고 한다. 

현재 이 벽화는 세로 22.5cm 가로 11cm, 세로 cm 가로 31cm의 두 조각밖에 남아있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확인할 수 없으나 석가모니의 전생인 비슈반타라왕자 본생의 일부라고 알려져 있다. 

비슈반타라왕자 본생은 왕자가 비를 내리게 하는 영적인 능력을 지닌 나라의 보물 코끼리를 적국에게 건네주어 가족과 함께 국외로 추방당했는데 자신이 타고 있던 마차와 말, 두 아들, 그리고 처까지 모두 브라만에게 건내주기에 이르렀으나 인드라의 중재로 가족이 다시 행복하게 재회하고 궁으로 돌아와 마침내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불교의 중요한 실천덕목 중 하나인 보시(布施)를 소재로 하였다. 

미란 3사원지에서 발견된 ‘날개 달린 천사상’으로 서양인의 모습이 분명해 보인다.

두 조각 중 비교적 큰 조각에는 왼쪽을 향해 있는 인물의 옆모습이 먹선으로 그려져 있다. 쌍꺼풀이 진 커다란 눈에 매부리코, 콧수염이 난 모습이 영락없는 서양인이다. 미란이라고 하면 실크로드 남로에 위치한 곳인데, 여기서 발견된 그림에 왜 서양인같은 인물이 표현되었을까. 

지금으로부터 약 110여 년전인 1907년, 실크로드 유적지를 탐사 중이던 영국의 고고학자 오럴 스타인(Aurel Stein, 1862~1943)은 타클라마칸 사막 동쪽에 있는 미란에서 토번(티베트)유적지 1곳과 6개의 사지절터를 발굴하고 있었다. 

제3사원지라고 이름붙은 절터를 발굴하던 중 바닥에서 1~2m 정도 파내려 갔을 때 스타인은 매우 흥미로운 벽화를 발견했다. 불전도(佛傳圖)와 어깨 양쪽에 날개가 달린 인물(有翼天使像)이 그려진 벽화였다. 

절터이기 때문에 석가모니의 생애를 그린 불전도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어깨에 날개가 달린 인물상이 출토된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벽화에는 붉은 옷을 입은 인물이 왼쪽을 향해 바라보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는데, 마치 그리스신화 속 사랑의 신 에로스처럼 어깨 양쪽에는 날개가 붙어있었다. 실크로드에서도 동쪽에 치우친, 타클라마탄 사막 남쪽에 있는 미란의 절터에서 그리스식 천사의 모습을 한 인물상의 발견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천사상 역시 비슈반타라본생도 속 인물처럼 짙은 눈썹에 쌍꺼풀이 깊고 부리부리한 눈, W자형을 이루는 메부리코, 꾹 다문 붉은 입술 등이 언뜻 보더라도 서양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빡빡 깎은 머리의 중앙에는 머리카락이 한줌 뭉쳐진 듯 표현된 것으로 보아 아마도 불교의 동자를 표현한 것 같다. 

날개 달린 인물상은 제5사원지에도 출토되었다. 이 천사상은 3사원지의 천사상과는 달리 머리카락이 표현되었는데 정상부에 총각머리 같은게 표현된 점이 다르다. 날개의 형태도 좀 다르긴 하지만, 크게 뜬 눈과 메부리코, 꾹 다문 붉은 입술 등은 거의 비슷하다. 일본의 도쿄국립박물관에도 3사원지의 천사상과 유사한 천사가 그려진 벽화가 남아있는 것을 보면 미란의 사원에는 날개달린 천사상이 흔하게 그려졌던 것 같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비슈반타라본생도’.

동자상은 모두 가슴 위쪽만 그려져 있고 아래쪽은 둥근 반원형을 이루고 있어, 원래부터 전신상으로 그려진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제5사원지에서 발견된 비슈반타라본생도(인도 뉴델리박물관소장)에는 천사상과 비슷하게 생긴 동자가 크고 묵직한 꽃줄을 어깨에 메고 있는데, 그 모습이 유익천사상과 흡사하다. 

꽃줄의 아래에는 정수리에만 머리카락이 있는 동자와 프리기아(Phrygia) 모자라고 불리는 고깔형 모자를 쓰고 망토를 걸친 젊은이가 그려져 있고, 꽃줄 윗부분에는 화려한 보석을 걸친 귀인과 수염이 더부룩한 남성 반신상, 잔과 악기를 든 여성 반신상 등 각종 공양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벽화를 발견한 스타인이 ‘마치 로마제국의 끝인 시리아의 유적에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 것을 보더라도, 여기에 그려진 인물들은 매우 서방적이다. 또 꽃줄 장식으로 둘러싸인 인물과 프리지아 식 모자를 쓴 사람들은 로마의 석관 및 인도 북부 간다라지역(현 파키스탄)의 조각 등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어서, 그리스, 로마 또는 그 영향을 많이 받은 간다라의 도상이 실크로드를 따라 미란까지 영향을 준 것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사실은 비슈반타라본생도에 적혀있는 글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3세기의 카로슈티 문자로 기록된 명문에 따르면, 이 벽화는 티타(Tita)가 그렸는데 그는 그림의 댓가로 3,000밤마카(Bhamakas)를 받았다고 한다. 그림에 사양식 느낌이 물씬 풍기는 것으로 보아 스타인도 지적했듯이 티타는 로마 또는 로마의 지배를 받은 지역 출신 화가였을 것이다.

제3사원지에서는 이외에 석가모니로 추정되는 인물과 6인의 나한을 그린 벽화도 출토되었다. 석가모니는 향좌측에 그려져 있는데, 머리에는 둥근 광배를 지니고 검은색의 법의를 걸쳤다. 붉은색으로 얼굴 윤곽을 그리고 눈썹과 눈동자, 콧수염 등은 검은색으로 칠했는데, 이 역시 쌍꺼플의 큰 눈과 매부리코 검고 둥근 눈동자 등이 앞에서 본 인물상들과 똑같다. 머리 윗부분이 결실되기는 했지만 정상부에는 육계가 둥그렇게 솟아있어, 이 인물이 불교 존상임을 알게해준다. 몸에는 검은색의 법의를 걸쳤는데, 옷자락을 왼쪽 어깨로 넘긴 간다라식 착의법이다. 오른손은 손가락을 가지런하게 모은 채 어깨부근으로 들어 올리고 왼손은 아래로 내린 시무외 여원인을 결하고 있어, 이 또한 간다라불상의 수인과 친연성을 엿볼 수 있다. 

석가모니의 뒷쪽으로는 삭발한 6명의 인물이 석가모니와 같은 쪽을 향해 서있다. 이들 모두 석가모니와 동일하게 부리부리한 눈과 매부리코, 붉은 입술이 특징적인데, 삭발을 한 것으로 보아 석가모니의 제자를 표현한 것 같다. 석가모니와 제자들의 얼굴은 윤곽선 주변에 바림질을 하고 뺨에도 붉은색을 칠해 입체감을 느끼게 한다. 제자들 옆으로는 검은색 바탕에 붉고 흰 꽃이 가득한 바탕에 꽃 또는 공양물을 든 손이 묘사되었는데, 여기에도 가장자리에 바림질을 하여 입체감을 주었다. 

부처님과 6인의 제자를 담은 그림. 인도 뉴델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미란 사원지에서는 말 네 마리가 끄는 로마식 마차가 그려진 벽화도 발견되었다. 2012년 고려대에서 열린 ‘실크로드와 한국불교문화’ 국제학술회의에서 중국 섬서사범대학의 왕신(王欣) 교수는 “미란에 남아있는 많은 벽화들 내용이 불교 고사에 속하는 것들이고, 그중 목판 수채화 한 폭에 그린 날개달린 천사의 형상은 완전한 로마 풍”, “벽화에 그려진 선아태자(비슈반타라태자)와 왕비의 마차는 네 마리 말이 끄는 로마식 마차이며, 벽화 기법은 이집트 파이윰의 로마 회화와 동일한 체계에 속한 투시학의 과장법”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렇게 서방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벽화가 그려진 미란은 어떤 곳이었을까. 유적엔 현재 무너진 성채와 흙탑 만이 방치된 채 쓸쓸하게 남아있지만 미란은 실크로드 남로의 대표적인 오아시스국가였던 선선국(善國)의 수도로, 기원전 4세기 말 번성한 실크로드 교역의 거점이자 많은 승려들이 오갔던 불교 전파의 길목이었다. 

399년 중국에서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어 인도로 간 법현(法顯)은 〈불국기(佛國記)〉에서 “그곳은 땅이 거칠어 농사가 잘 안되며, 속인들의 의복은 전갈(氈褐)을 사용하는 것이 다를 뿐 거칠기는 중국 사람들의 옷과 마찬가지다. 이 나라의 왕은 불교를 믿으며, 스님은 4000명 정도 있다. 모두 소승에 속한다. 스님들은 물론 속인들도 인도의 법을 행하고 있는데, 이곳 뿐 아니라 서쪽에 있는 모든 나라도 대개 이와 비슷하다. 나라마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지만 출가한 사람들은 모두 인도 말을 배우고 인도 책을 익히고 있다”고 하여, 당시 불교국가로서 많은 사원과 승려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렇듯 번성하던 미란은 롭놀 호수의 건조화가 심해지면서 서쪽에 있는 차르클릭으로 수도가 옮겨지고, 5세기에 이르러 선선국이 청해성에서 일어난 토욕혼에게 멸망하게 되면서 역사무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7세기 후반에 토번(티베트)이 미란을 타림분지 진출을 위한 군사 전초기지로 삼게 됨에 따라 잠시 부흥하였으나 9세기 후반 토번이 철수하면서 다시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13세기 마르코 폴로가 이곳을 지나갈 즈음에는 완전히 모래속에 묻혀 있었다고 한다. 

19세기 후반까지 역사속의 미스테리로 전해지면서 오랫동안 잊혀졌던 미란을 역사속으로 다시 끌어낸 것은 바로 오럴 스타인이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영국의 탐험가 스타인은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죽음의 사막이라는 타클라마칸 사막 일대를 횡단하는 중앙아시아 내륙 탐사를 4차에 걸쳐 진행했다. 그는 1906년~1908년에 걸친 2차 탐사 도중 심각한 동상에 걸려 발가락 2개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기도 했으나, 1907년 사막속의 황폐한 미란의 불교 사원지에서 날개달린 아름다운 천사상과 붓다의 일대기를 그린 벽화를 발굴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스타인이 발굴한 미란의 벽화는 비록 사막 속에 묻혀서 1700여 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실크로드가 동서문화의 활발한 교류지였으며 다양한 언어와 인종, 문화가 결합된 곳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최근 미란에서 한·당시대의 대형 주거시설과 불교 유적이 무더기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으며, 미란벽화를 다시 한번 떠올린다. 

[불교신문3470호/2019년3월13일자]

김정희 원광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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