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의 수많은 호걸들도 하루살이 같도다”

 

“禪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간화선 중심’ 선풍 정립
조선시대 한국선 중흥조

선정쌍수…여러 방편 제시 
‘유불도 삼교일치’ 강조
호국불교 사상 입각한 
‘중생제도 길’도 보여줘

‘선가귀감’ 통해 진수 전해 
유정 언기 태능 일선 등
기라성 같은 제자 수두룩

 

옛 선사가 ‘태어남은 윗옷을 입는 것과 같고, 죽음은 바지를 벗는 것과 같다’고 했다. 서산대사도 “태어남은 한 조각구름이 일어남이오, 죽음이란 한 조각구름이 흩어짐이라. 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는 것, 삶과 죽음도 바로 이와 같다”고 했다. ‘생사가 구름 한 조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읊을 정도로 공부가 익었다면, 승려로서 밥값은 한 것인데…. ‘깊이 반성하고 정진해야 하리라’고 다짐해본다. 앞서 언급한 대로 부용 영관 문하에서 청허 휴정과 부휴 선수가 배출됐다. 바로 이 법맥이 19세기 구한말 경허선사로 이어지고, 현재에 이른다. 

오랫동안 묘향산에 주석해 ‘서산대사’로 널리 알려진 청허휴정 선사는 1604년 세속 나이 85세로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해 묘향산 보현사와 안심사 등에 부도를 세웠다. 스님의 유촉에 따라 금란가사와 발우 등은 부도와 함께 대흥사에 봉안되어 오늘에 전한다. 해남 대흥사의 진영.

출가와 오도 

서산 휴정(西山休靜, 1520˜1604), 휴정은 법명이고, 속성은 최씨(崔氏), 이름은 여신(汝信), 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淸虛)·서산(西山), 본관은 완산(完山)이다. 휴정은 평안도 안주에서 태어났다. 별호는 백화도인·두류산인(頭流山人)·묘향산인(妙香山人)·조계퇴은(曹溪退隱) 등이다. 어머니 김 씨는 노파가 찾아와 “아들을 잉태하였다”며 축하하는 태몽을 꾸고, 이듬해 3월 그를 낳았다. 3세 되던 해 4월 초파일에 아버지가 등불 아래에서 졸고 있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꼬마 스님을 뵈러 왔다”고 하며 두 손으로 어린 여신을 번쩍 안아 들고 몇 마디 진언을 하며 머리를 쓰다듬은 뒤, 아이의 이름을 ‘운학’이라 할 것을 지시했다. 그 뒤 아명은 운학이 되었다. 어려서 동네 아이들과 놀 때도 돌을 세워 부처라 하고, 모래를 쌓아 올려놓고 탑이라 하며 놀았다. 

운학은 9살에 어머니를, 10살에 아버지를 잃고 의지할 데가 없었다. 총명하고 글재주가 뛰어나 안주목사 이사증이 그를 서울로 데려가 12세에 성균관에 입학시켜 3년 동안 글과 무예를 배우도록 했다. 하지만 운학은 15세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떨어졌다. 그해, 그는 스승을 찾아 동료들과 전라도로 산천구경을 나섰다가 지리산에 들어가 쌍계사 숭인(崇仁)을 만나 출가했다.

18세 무렵, 부용 영관에게서 선(禪)을 배워 21세에 깨달은 바가 있어 인가를 받았다. 이렇게 공부를 해나가던 중, 선에 마음을 기울이고, “일생동안 어리석은 사람이 될지언정 다시는 말만 중얼거리는 문자법사는 되지 않으리라”라고 다짐한 뒤 수행에만 전념했다. 이후 8년 만에 남원의 한 마을을 지나다가 닭 우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닫고 다음 오도송을 읊었다. “머리털 세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고/ 옛 사람이 일찍이 말하였다./ 닭 울음소리 한번 듣고 대장부 할 일을 능히 마쳤도다./ 홀연히 자기 집을 얻고 보니, 모든 것이 다만 본래 이러할 뿐/ 천만금의 보배창고도 원래 한 장의 빈 종이라네.” 

‘국일도 대선사’ 호국정신

휴정은 33세에 승과에 급제하고, 중덕(中德)을 거쳐 36세에 교종판사(敎宗判事)가 됐다. 곧 이어 선종판사(禪宗判事)가 되어 선교양종판사를 모두 맡았다. 판사를 맡은 지 2년만인 38세에 승직을 버리고 운수납자의 길을 걸었다. 이후 휴정은 금강산, 두륜산, 오대산, 묘향산 등지에서 수행하며 제자들을 제접했다. 이 때가 40대에서 60대에 해당한다. 70세 되던 해, 삼몽사(三夢舍, 주인은 손님에게 꿈 이야기를 하고, 손님은 주인에게 제 꿈 이야기를 하는구나)를 짓고 향로봉에 올라 시를 지었다. “만국의 도성은 개미집과 같고,/ 천하의 수많은 호걸들도 하루살이 같도다./ 청허한 베갯머리 위로 흐르는 은은한 달빛,/ 끝없는 솔바람소리 하염없이 들리네.” 

선조 22년(1589) 정여립의 역모에 연좌된 승려 무업의 무고로 투옥됐지만 후에 무고함이 밝혀져 석방됐을 뿐만 아니라 선조로부터 어필(御筆) 흑죽(黑竹)과 시까지 받고 휴정도 왕에게 화답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의주로 피신 갔을 때, 휴정은 선조를 만났다. 이때 선조는 휴정에게 8도16종도총섭의 직위를 주며 승군을 부탁했다. 휴정은 의승 5000명을 모집, 인솔하여 관군을 도와 공을 세웠다. 당시 휴정은 70여세로, 사명과 처영에게 도총섭 지위를 맡기고 산으로 되돌아갔다. 

휴정은 선조로부터 ‘국일도(國一都) 대선사(大禪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부종수교(扶宗樹敎) 보제등계존자(普濟登階尊者)’라는 최고의 존칭을 하사받았다. 선사는 말년에 금강산에 상주하다가 1604년 원적암에서 설법을 마치고, 자신의 영정에 임종게를 쓰고 좌선한 채 입적했다. 법랍 67세, 나이 85세였다. 

문집으로는 <청허당집>, 편저에 <선교석> <선교결> <삼가귀감> 등이 있다. 제자로는 사명 유정, 편양 언기, 소요 태능, 정관 일선, 현빈 인영, 완당 원준, 중관 해안, 청매 인오, 기허 영규, 뇌묵 처영 등이 있다. 깨달음을 이룬 제자만 해도 70여명으로 유정, 언기, 태능, 일선, 네 선사는 가장 휴정 문하의 4대 문파를 이루었다. 

사교입선…간화선 삼요소 강조 

해남 대흥사 서산대사 부도.

사상사적 측면에서 휴정의 특징은 네 가지 정도로 볼 수 있다. 첫째, 무엇보다도 간화선의 활구를 강조했다. 휴정은 당시 불교계가 선과 교로 나뉘어 갈등을 부를 즈음 간화선을 중심의 선풍을 정립했다. 휴정은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참선에 세 가지가 필요한데, 신근(信根), 분지(憤志), 의심’이라며 진실로 그 한 가지라도 갖추지 못하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다며, 간화선의 삼요소를 강조했다. 

둘째, 서산의 선교관은 선 입장에서 교를 받아들이는 사교입선(捨敎入禪)이다. <선가귀감>에서 선교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禪是佛心 敎是佛語)…선·교의 근원은 부처님이고, 선과 교가 시작된 근원점은 가섭존자와 아난존자이다. 말 없음으로써 말 없는 데 이르는 것은 선이요, 말 있음으로써 말 없는 데 이르는 것은 교이다. 또한 마음은 선법(禪法)이요, 말은 교법(敎法)이다. 법은 비록 일미(一味)이지만 뜻은 하늘과 땅같이 동떨어진 것이다.” 또한 <선교석(禪敎釋)>에 진귀조사설을 싣고 있는데, 선이 주(主)가 되고 교는 종(從)이 되어 깨달음에로 나아가는 점을 강조했다. 

셋째, 선정쌍수 및 여러 수행법을 제시했다. 이 점은 현 조계종의 취지와 부합된다. 조계종도 선을 근본으로 하지만, 방편으로 다양한 수행법을 인정하고 있다. 휴정은 사람에 따라 근기가 다르므로 어떤 이에게는 타력(他力)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염불, 주력, 참회, 보시 등 여러 수행법을 중시했다. 

넷째, ‘유·불·도 삼교 일치’를 강조했다. 유불도 삼교 일치는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휴정도 <삼가귀감(三家龜鑑)>을 통해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휴정은 삼교가 모두 근원적인 마음을 구명(究明)하고 그것을 개발하는데 역점이 있음을 부각시켜 그들이 조화롭게 병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물론 불교사에서 삼교 회통을 드러낸 경우는 매우 많다. 당대의 규봉 종밀(780˜841)은 <원인론(原人論)>에서 유교, 도교를 회통시켰고, 송대의 불일 계숭 또한 <보교편(輔敎篇)>을 통해 유불일치를 강조했으며, 이외 설두중현과 중봉 명본도 유불일치를 강조했다. 물론 사상적으로나 철학적인 입장에서 일치를 주장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이 시대적인 위기감에서 불교를 보호하는 차원이라고 볼 수 있다. 

불교사적·선사상적 위치 

한국불교사 및 선사상사에서 휴정의 역할은 크게 다섯 가지 정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조선시대 꺼져가는 선을 중흥시킨 한국선의 중흥조이다. 조선 초기 법맥은 나옹 혜근-무학 자초-함허 득통 법맥이었으나 조선 후기로 가면서 태고 보우의 법맥이 주류를 이루게 됐다. 이는 1592년 임진왜란 때, 휴정과 사명, 영규 등 의승군이 활약했으며, 1627년 병자호란 때, 벽암 각성, 허백 명조 등의 의승군의 활동으로 인해 사회적인 인식이 심어지면서 태고 법맥이 주를 이루게 됐다. 휴정 자신도 ‘벽송은 조(祖)요, 부용은 부(父)며, 경성은 숙(叔)’이라는 법맥을 밝혔다. 이렇게 휴정은 자신이 밝힌 대로 태고보우의 7대손에 해당한다. 근자에 학술발표회를 통해 보조법통설과 태고법통설 등 법맥에 있어서는 문제가 더러 발생하지만, 전반적으로 이 법맥을 보편적으로 따르고 있다. 

둘째, 한국불교사의 특징은 선교 융합 및 선교 회통인데, 휴정이 이 점을 확고하게 확립시켰다는 점이다. 셋째, 간화선 중심의 수행 방법 체계를 정립했다. 넷째, 호국불교 사상에 입각한 중생 제도의 길을 보여주었다. 다섯째, 휴정이 아니었으면, ‘현 한국불교가 존재했을까?’라는 의구심을 들 정도로 한국사로나 불교사에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휴정이라는 큰 나무에서 기라성 같은 선자들이 배출됨으로서 현 한국불교의 구축점을 이루었다. 

[불교신문3469호/2019년3월6일자]

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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