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은 지성 감성 의지적 욕망 소멸

인과관계 알면 ‘자타불이’ 이해
타인에 연민 일어 동체대비 돼
나만 옳단 집착서 자유로워져야

인간관계에서 오는 괴로움은 남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데서 온다. 남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이유는 남이 무엇을 필요로 하고 남이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무감각함 (insensitiveness)이 크게 한몫을 한다. 남의 감정에 대해서 무감각한 이유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가장 큰 원인이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은 나와 타인과의 인과관계가 어떻게 연기적으로 얽혀 있는지를 알지 못하는 무지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나와 남은 둘이 아니고(自他不二), 동체(同體)라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실제로 나와 남이 하나라는 것은 아니다. 인과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남에게 베푸는 것이 그대로 나에게 되돌아오고, 남에게 나쁘게 한 행위가 곧바로 나에게 결과를 주는 것을 보기 때문에, 이런 연기적 인과의 이치 속에서 나와 남이 하나라는 것이다. 자타(自他)가 둘이 아니고 동체임을 알게 됐을 때, 그리고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면 안에서 일어나는 색수상행식(自身)과 바깥에서 일어나는 색수상행식들(他人)에게 연민심이 일어나게 된다.(동체대비, 同體大悲), 이를 인간관계의 해탈이라 하겠다. 

마음의 고통으로부터의 해탈은 욕망(의지)으로부터의 해탈, 생각(지성)으로부터의 해탈, 느낌(감성)으로부터의 해탈 등 이 세 가지 심리적 상태로부터의 해탈이다. 그러면 욕망으로부터의 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를 들어 당뇨 말기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아이스크림을 아주 좋아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하자. 그러면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는 욕망과 아이스크림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의지적 욕망, 이 두 욕망이 서로 싸울 것이다. 서로 상충되는 욕망이 존재하는 한, 감정적 고통의 해탈은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면 서로 반대되는 욕망이 어떻게 정리되는 것이 해탈인가. 아이스크림을 먹으려고 하는 욕망이 당뇨에 해롭다는 것을 깨닫고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는 쪽으로 의지가 정립이 되면, 아이스크림에 대한 의지적 욕망에서 해탈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해탈이란 우리가 욕망할 수 있는 각각의 모든 대상들로부터 욕망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 혹은 건설적인 쪽으로 조화된 상태를 말한다. 각가지 모든 욕망의 가능성의 일어남은 한순간에 발생하는 것은 아니고, 그 사람의 인연과 성향 따라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시간차를 쫓아서 과거 현재 미래에 일어나는 욕망은, 공간적으로는 한 순간에 존재한다. 한순간에 온 세계에 존재하는 욕망(anusaya)을 다스리는 것, 이것이 바로 욕망의 해탈이다. 

그러면 느낌으로부터의 해탈은 무엇인가. 느낌에는 좋은 느낌과 싫은 느낌, 편안한 느낌과 불편한 느낌의 두 가지 양태가 있다. 편안한 느낌을 좋아하고 불편한 느낌을 멀리하려는 것이 바로 인간의 느낌에 대한 욕망이다. 이 불편한 느낌을 멀리하고 편안한 느낌을 취하려고 하는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것이 바로 느낌으로부터의 해탈이다. (왜냐하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느낌을 충실히 따른다면 고통이 더욱 더 심화되기 때문이다.) 

생각의 해탈은 견해의 해탈이다. 견해는 판단이다(judgements). 인간은 살면서 받아들인 정보와 지식을 유익하고 해로운 것, 옳고 그른 것으로 판단하여 분류하고 자신을 보존하기 위해 이것을 굳게 잡아 집착한다. 그러므로 견해의 해탈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견해가 절대적으로 옳고, 타인의 견해는 그르다고 집착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남이 틀리듯이 나도 언제든지 틀릴 수 있고 틀린 것은 나가 아니고 정보의 집합인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틀릴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생각의 해탈이다. 병으로부터의 해탈은 태어남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자타에 대한 모든 욕망이 사라져 다시 태어나지 않음을 얻거나, 불생불멸의 이치를 얻으면 생의 고통과 병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초기불교는 전자에 집중을 했고 대승불교는 후자에 집중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성, 감성, 의지적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소멸된 상태가 열반이고 이러한 해탈의 구체적 여정은 8정도와 10바라밀에서 보여 질 것이다.

[불교신문3469호/2019년3월6일자]

등현스님 고운사 화엄승가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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