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항일성지

의병 본거지였던 대흥사 심적암은 1909년 일본 군경에 의해 불태워졌다. 일본 군경의 공격으로 의병과 스님 30여명이 사살되고 포로로 붙잡혔다. 소실되기 전 심적암은 흐릿한 사진으로 남아 있다. 지금도 우물과 석축은 원형을 잘 간직한채 그대로 남아 있어 발굴조사가 이뤄진다면 심적암에 대한 정확한 연원이 확인될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1909년 의병 근거지 발각
일본 군경에 공격받고 소실
우물 석축 등 그대로 존재

다른 절에 남은 불상 통해
오랜 역사 연원 확인 가능
올해 발굴조사…복원 기대

3.1만세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불교계의 항일운동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많은 사찰과 스님들의 활동이 비로소 조명받고 있는 것은 다행이다. 하지만 여전히 주목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해남 심적암(深寂菴)이 그런 사례다.

대흥사의 산내암자 심적암은 독립기념관 등이 발행한 <한국독립운동사자료15>, <독립운동사자료집별집1>, <독립운동사자료집3>에 나오는 사찰이다. 일제가 간행한 <남한폭도대토벌기념사진첩>에 흐릿한 사진도 남아 있다. 조계종 불교사회연구소가 간행한 항일운동 관련 서적에서는 심적암에 대한 내용을 찾을 수 없는 점은 아쉬움이다.

이들 자료와 대흥사의 관련 문건을 종합해보면 심적암은 전라도 의병의 주둔지 가운데 하나였으며, 의병들과 일본 군경이 전투를 벌인 장소다. 1909년 7월9일 새벽 일본 군경의 기습으로 의병 24명이 전사하고 10명이 체포됐다. 스님들도 6명이 포함돼 있다. 이때 일본 군경은 심적암을 불태웠다. 기습을 피한 의병들도 같은해 12월 체포돼 전라도 지역의 의병활동이 종식됐다. 전라도 의병의 마지막 근거지가 심적암인 셈이다. 이 기록에는 심적암 외에도 의병의 활동지로 해남 미황사와 성도암이 함께 거론돼 있다. 기록에 따라서는 인원수가 약간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동소이하다. <대한매일> 1909년 7월20일자는 대둔사 심적암에서 22명 전사, 8명 포로, 화승총 47점, 군도 5점 노획, 30~40명 도피로 기록하고 있다.

110년의 세월은 푯말이 없다면 절터였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바꾸어놓았다. 그나마 원형을 잘 유지한채 남아있는 심적암의 석축. 석축 위로 여는 숲과 다름없는 심적암터가 있다. 2007년 대흥사와 해남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가 심적암터 푯말을 만들어놓았다.

심적암은 1934년 또한번 당시 언론에 거론됐다. 독립운동을 펼친 전남운동협의회 사건과 결부됐다. 사회주의 계열인 전남운동협의회가 대흥사 송림 중에서 회동을 가졌다는 보도가 있다. 대흥사 송림이 심적암터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심적암은 이미 1909년 소실되고 복원되지 않아 야외의 넓은 공터로 남은 상태였다. 이 사건 역시 성도암과 미황사가 회합 장소로 함께 거론되고 있다.

전라도 의병의 마지막 활동지이자 항일운동의 본거지였음에도 심적암은 그동안 불교계의 조명을 거의 받지 못했다. 오히려 이 지역의 항일독립운동추모사업회(회장 오길록)라는 단체가 심적암에 대한 사료 수집과 추모사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왔다. 이 단체는 1996년 <심적암 호국의병 항쟁사>를 출간한데 이어 2002년 대흥사 입구에 심적암 희생자 추모비를 건립하고 매년 천도재를 열고 있다. 심적암 희생자에 대한 독립유공자 지정과 서훈을 추진해 일부는 성과를 얻기도 했다. 대흥사는 이 단체와 함께 2007년부터 심적암 발굴과 복원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오길록 사업회장은 “조선조말 항일의병 투쟁의 최후격전지 대흥사 심적암을 반드시 복원해야 하고 희생자의 유골을 더 늦기 전에 발굴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숲으로 변해버린 심적암터. 깨진 기왓장과 주춧돌, 구들장의 돌들이 널브러져 있다. 심적암은 대흥사와 해남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의 지속적인 노력 끝에 올해 발굴조사가 시작된다.

110년의 세월이 흘렀다. 덩그러니 터만 남아 있는 심적암으로 올랐다. 대흥사를 끼고 오른편 산림소방도로를 따라 1km 가량 오르다보면 길가로 덩그러니 석축이 있다. 안내판과 현수막이 없다면 절터인지 모르고 지나칠 곳이다. 석축은 무너지고 훼손됐으나 원형을 꽤나 잘 유지하고 있다. 절터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은 깨져 널브러진 기왓장, 배수로와 우물터다. 우물터는 한눈에 보아도 우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보존상태가 좋다. 건물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공간은 이미 큰 나무가 자리잡았고, 주춧돌과 구들장에 쓰인 돌들이 흩어져 있다. 풀도 무성해져서 유심히 보아야 건물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심적암이 정확히 언제 건립됐는지는 어떠한 기록도 없다. 심적암의 역사와 연원을 밝혀낼 무언가가 나올 수도 있는 발굴조사에 기대를 걸고 있다. 남아있는 터가 한번도 파헤쳐지지 않은 것으로 보여 이런 기대감은 더 크다. 하지만 심적암이 오래전부터 존재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유물은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완도 신흥사에 전한다.

신흥사에 봉안돼있는 목조약사여래불이 원래 심적암에서 조성됐다. 이 불상의 복장물 중 발원문에서 조선 인조때인 1628년 조성된 점이 확인됐다. 1802년 중수했고, 1845년과 1865년 개금불사가 이뤄진 것도 확인됐다. 심적암과 함께 사라지지 않은 이유도 알게 됐다. 초의선사가 심적암에서 대흥사 대광명전으로 옮겨 봉안한 기록도 함께 나온 것이다. 신흥사로 옮겨진 것은 초의선사의 4대 문손 응송스님이 신흥사 약사전으로 이운했다. 박영희라는 속명으로 더 잘 알려진 응송스님은 일제시대 만해스님과 함께 독립운동을 펼치고 만당을 조직한 인물이어서 이미 심적암이 소실된 이후 약사여래불이 대흥사에서 신흥사로 옮겨졌음을 알 수 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은 역시 기록이다. 최소한 심적암이 1628년 이전에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

일본 군경의 습격을 받고 심적암에서 탈출했으나 결국 체포된 전라도 의병들 모습.

독립기념관 전시실에 남아 있는 심적암 사진은 퇴색하고 흐릿하다. 팔작지붕을 건물과 석축이 보인다. 사진으로 전하는 심적암은 이것이 전부다. 올해 심적암터 발굴조사가 시작된다. 대흥사(주지 월우스님)와 해남항일독립운동추모사업회의 끊임없는 노력이 만들어낸 성과다. 발굴조사를 시작으로 옛 심적암을 복원해 항일독립운동의 교훈을 전하고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한다는 취지다. 갈 길은 멀다. 발굴조사가 원만히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복원을 위한 예산 확보는 아직 장담할 수 없는 일이다. 대흥사 주지 월우스님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멈출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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