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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래의 세계 불교민속 순례] <4> 여러 색깔의 베트남“전쟁상흔 국도 위에 평화는 이끼처럼 되살아나”
  • 구미래 불교민속연구소 소장
  • 승인 2019.03.04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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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꽃 피우는 소수민족

미선유적지의 탑과 그 앞에 세운 ‘링가’.

베트남은 54개의 다민족이 모여 사는 나라다. 주류민족인 비엣족이 평야나 비옥한 메콩강 델타지역에 살면서 벼농사를 짓는 데 비해, 53개 소수민족의 대부분은 산악과 고원지대에 흩어져 화전경작과 유목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인구의 13%밖에 안 되지만 소수의 삶으로 살아가는 민족들의 삶과 문화는 눈물겹게 따뜻하고 아름답다. 

북부 산악지대는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는 오지다. 이 가운데 라오까이성에 사는 고산족들은 일요일마다 해발 900m에 자리한 박하시장에서 서로 만난다. 이곳은 직접 수확하고 만든 제품을 사고 파는 장터이자, 여러 개의 산을 넘어 만나는 소수민족들의 집결지다. 저마다 전통복장을 갖추어 옷과 장식만으로 어느 민족인지 알아차릴 수 있다는 점이 놀랍다. 화려한 색상에 다양한 문양의 띠를 두른 화 몽족, 흑색옷의 블랙 몽족, 흰옷에 터번을 쓴 화이트 몽족, 붉은 두건을 쓴 레드 자우족 등 색색의 옷차림은 깊은 산에 핀 꽃과 같다. 

시장에 내놓는 상품도 다양하여 농산물, 식품, 공예품은 물론 농사에 필수인 코뿔소를 사고파는 우시장도 선다. 다랑논을 배경으로 수많은 소수민족이 화려하게 수놓은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장일 듯하다. 척박한 산중에 일군 농사가 예술작품 같은 다랑논을 만들어냈듯이, 그들의 천진한 얼굴이 가장 고된 삶에서 피어난 것은 무얼 뜻하는 걸까. 

동북부 까오방성과 랑선성에서 살아가는 눙족은 불교를 깊이 믿는 소수민족으로, 조상제단의 위쪽에 불상을 모시고 지극하게 섬기며 쇠고기와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대대로 전승되는 민속과 예술이 풍성하고 민족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 또한 강하다. 이들은 해마다 이른 봄에 종교의식을 치르면서 ‘붓란(But Lan)’이라는 노래를 부른다. 인간에게 깃든 수십 개의 혼이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몸에서 빠져나오고, 혼이 오랫동안 몸을 떠나있으면 위험에 처할 수 있다고 보면서 가정에 깃든 모든 얼을 위해 올리는 숭배의식이다. 

이 노래에서 부처님를 뜻하는 ‘붓(But)’은 관음보살과 같은 ‘자비의 여신’으로 인식된다. 열두 단계로 구성된 의식에서 부르는 노래는 꽃, 식물, 동물 등으로 봄의 정경을 묘사하는 가운데 숭고하고 열정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깊은 울림과 생동감으로 얼을 깨워 바깥을 떠돌지 않고 있어야할 자리에 있도록 일깨우니, 봄의 법음(法音)에 참으로 합당하다. 

찬란한 영화 뒤로 하고 

박하시장의 소수민족 여성들. ⓒ박호진

‘이곳에만 오면 비가 내린다’는 가이드의 말처럼, 그날도 맑은 날씨였는데 다낭의 미선유적지에 도착해 갑자기 비가 와서 잠시 우산을 펴야했다. 소수민족 가운데 참족이 더 애잔한 것은 그들의 옛 왕국이 영화로웠기 때문이고, 그 유적지에 내리는 비도 특별하게 여겨졌던 게다. 중부의 넓은 지역을 1300여 년간 지배했던 거대한 참파왕국은 15세기 이후 비엣족에 패하여 지도에서 사라졌다. 그 뒤 참족은 소수민족이 되어 중부 산악지대와 남부 해안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의 베트남은 본래 북부 비엣족, 중부 참족, 남부 크메르족이 살던 세 나라의 땅이었다. 비엣족의 남진으로 참족과 크메르족이 무릎을 꿇으면서 오늘날의 지도가 만들어진 것은 18세기에 들어서의 일이다. 

그 가운데 참파는 인도문화의 영향으로 힌두교가 번성했고 미선유적지에는 성직자, 무사, 평민, 천민의 카스트계급을 적은 비문이 남아있다. 베트남전쟁으로 대부분 파괴됐으나 작은 앙코르와트 같은 붉은 벽돌사원에 시바신을 모시고 제의를 올린 흔적이 뚜렷하다. 뛰어난 건축과 조각 기술이 반영된 스투파는 세 세트로 구성되어 맨 아래서 제수를 장만하고, 중앙의 정화의식 공간을 거쳐, 맨 위의 신단에서 의식을 치렀다. 사원 곳곳에 시바를 상징하는 남근 ‘링가’와 함께 사각에 구멍을 뚫은 여근 ‘요니’를 두어 생명력과 풍요를 기원하였다. 

참족은 일찍부터 산스크리트어를 토대로 한 고유문자를 지녀 신화와 전설 등의 문학이 발달했다. 특히 묘탑에서 노래 부르며 의식을 행하는 창례(唱禮)는, 신들을 찬양하고 소망을 비는 내용과 함께 자장가와 인연에 대한 노래 등이 서사를 이루어 주목할 만하다. 영혼이 고이 잠들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생사의 인연을 노래함으로써 깊이 연결된 서로의 인연을 교감하며 망자와 산자 모두에게 마음의 평안을 주었을 것이다. 모든 의식에 음악과 춤이 따랐던 참족의 문화가 베트남의 민요와 전통음악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으니, 찬란한 옛 문명은 또 다른 인연으로 이어지고 있다. 

천년의 인연, 한국과 베트남

남부어촌 무이네의 바구니 배.그림=구미래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가 노래와 영화로 만들어질 즈음, 학생들은 얼굴도 모르는 청룡, 맹호, 백마 부대의 베트남 파병용사들에게 열심히 위문편지를 썼다. 1964년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결정하고 십년 동안 우리는 이른바 전쟁특수로 경부고속도로를 놓았고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우리와 베트남은 직접적인 이해관계도 없이 그렇게 서로 간에 총을 겨눈 가해자와 피해자로 본격적인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로부터 약 280년 전인 1687년, 제주 무관인 김태황(金泰璜) 일행 24명이 나라에 진상할 말을 배에 싣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 다낭의 해안마을에 표류하게 된다. 당시 베트남 국왕은 이들에게 임시거처와 기반을 제공했고 이듬해 청나라 상인들에게 부탁해 조선으로 돌려보냈다. 돌아온 일행을 반기며 제주목사가 청나라 사람들과 나눈 필담에는 “그곳의 군신이 자기 백성처럼 편히 있게 허락해주고 쌀과 돈으로 대접해줬으니 그 은혜의 경중을 어찌 다 말하겠는가”라고 감사해했다. 

베트남 왕은 조선과 교류할 생각으로 청나라 상인에게 문서를 보내 답을 받아오도록 했으나 조선에서는 상인들을 그저 북경으로 돌려보냈다. 당시 베트남은 서양인들과도 활발히 교류하고 있었기에 자기 나라를 찾은 이방인을 어떻게 대할지 잘 알고 있었지만, 조선은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런가하면 고려시대에는 베트남 리 왕조의 두 왕자가 망명해 각각 정선 이씨와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양곤(李陽)은 우리나라에 처음 귀화한 베트남인으로, 12세기 초 왕위를 다투던 중 북송을 거쳐 경주에 정착했는데 무신정권 때 활약한 이의민이 정선 이씨의 6대손이다. 이용상(李龍祥) 또한 변란을 피해 망명길에 올라 황해도 옹진에 다다랐고 몽골군의 내침 때 용맹하게 물리친 공을 세워 화산군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사후에는 이 지역을 지키는 ‘백마장군’이 되어 재액초복의 수호신으로 좌정하기에 이른다. 천년역사의 인연이 전쟁으로 왜곡되었다가 1992년 다시 수교했으니 우정을 다져나갈 교훈도 크고 깊다. 

전쟁 반대는 평화 아닌 ‘일상’

“내가 베트남을 생각할 때면 난 전쟁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네. 내가 베트남을 생각할 때면 난 폭탄을 생각하지 않는다네. 내가 베트남을 생각할 때면 난 단지 쩌우독을 생각한다네. 내가 태어나 뛰어놀던 그곳.”

어느 베트남 시인의 고향 쩌우독은 메콩 삼각주의 캄보디아와 국경을 맞댄 곳으로 전쟁의 참상이 심했던 슬픈 지역이다. 얼룩진 상흔을 넘어 어릴 적 뛰놀던 고향으로 기억하고 싶은 시인의 마음이 전해진다. 

쩌우독에서 메콩강 줄기를 타고 내려오면 게릴라전이 치열했던 껀저와 만나게 된다. 맹그로브 숲이 우거진 8만ha의 광대한 습지에 거미줄처럼 얽힌 수로를 차단하려 대량의 고엽제가 뿌려지면서 이곳은 폐허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뒤 아이에서 노인까지 마을사람 모두가 씨앗을 심고 가꾸기 시작해 30년이 지났을 때 기적처럼 숲이 되살아났다. 천여 마리의 긴꼬리원숭이가 뛰노는 유네스코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되고 원시자연의 무수한 생명이 뿌리내리면서 다시 평화의 낙원을 이룬 것이다. 

남북을 잇는 베트남의 대동맥 ‘1번국도’ 또한 사활이 걸린 수송로였기에 중부국도를 탈환하려는 접전이 치열했다. 왕복 2차선의 1번 국도를 달리는 일은 충격이었다. 길가에 민가가 있어 아이들은 이웃집에 놀러가려면 차들이 오가는 국도를 건너야 했고, 야산에 풀을 먹으러 다니는 소들은 목동도 없이 느릿느릿 국도를 건너다녔다. 우리를 태운 버스 앞으로도 소떼가 가로막았는데 앞장선 소는 길 중앙에서 차를 노려보며 섰다가 가족 소들이 모두 건너자 그제야 자신도 길을 건넜다. 가이드는 늘 있는 일이라면서, “아빠소가 마지막으로 길을 건널 때 다시 쳐다보는데, 그건 고맙다는 인사”라는 말을 덧붙였다.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척박한 국도 위에도 평화는 이끼처럼 되살아나 감동을 준다. 

이 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저녁5시 무렵이다. 집집마다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식구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에 골목 안 아빠들은 바둑판을 뒤집고 뛰놀던 아이들은 흩어져 저마다 집을 찾는다. 1999년까지 전쟁이 멈추지 않았던 인도차이나의 중심에서, 베트남은 맹그로브 숲이 되살아나듯 일상을 회복했고 어느 나라와 다르지 않게 식구들이 둘러앉아 저녁밥을 먹는다. ‘전쟁’의 반대는 ‘평화’가 아니라 그렇게 ‘일상’이었다. 

[불교신문3468호/2019년3월6일자]

구미래 불교민속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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