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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한국禪사상사] <48> 허응당 보우“허깨비가 허깨비 마을에 들어가 미치광이 놀이를…”
  • 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 승인 2019.03.01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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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불시대 문정왕후 힘입어 
선종판사 봉은사 주지 맡아

선교양종·승과 부활 비롯
승려도첩, 폐사찰 복원 등

조선후기 불교명맥 잇게 한
“천고에 둘도 없는 성인”… 

진심=물, 허망심=파도 비유
선교일치, 선ㆍ화엄 융합 주장
“禪은 行, 화엄은 理 철학”

혹독한 척불정책이 기승을 부리던 명ㆍ정종대 봉은사 주지로 조선불교 명맥을 잇는데 큰 역할을 한 허응당 보우대사는 유생들의 집요한 상소와 배척으로 제주 유배 중에 순교했다. 사진은 서울 삼성동 봉은사가 스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난 2013년 일주문 옆에 조성한 동상(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도 법난이 많았다. 대표적인 법난이 삼무일종(三武一宗)이다. ‘삼무’는 북위(北魏)의 태무제(太武帝)·북주(北周)의 무제(武帝)·당(唐)의 무종(武宗)을 말하며 ‘일종’은 후주(後周)의 세종(世宗)을 말한다. 법난이 이렇게 많이 일어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으나 표면적으로는 유·불·도 3교의 대립, 특히 불교와 도교의 대립항쟁이 표면적 원인이다. 중국말에 “천자(天子)가 한번 노하면 송장이 만리에 덮인다”고 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법난은 무종의 회창폐불(會昌廢佛, 845˜847)이다. <구당서>의 ‘무종본기’에 드러난 회창폐불로 인한 불교계의 피해는 매우 컸다. 파괴된 유명 사원은 4600여 곳, 무명 사원 4만여 곳, 환속한 승려와 비구니는 26만500명, 몰수된 전답은 수천 만경, 양세호로 바뀐 사원 소속의 노비는 15만명이었다.

이런 대규모적인 몇 년 간의 법난에 교종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선종과 정토종은 발전했다. 선종은 이때부터 5가7종이 형성되는 등 기라성 같은 선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회창폐불 때 선사들은 재가자로 환속해서 수행한 경우가 부지기수다. 위앙종의 위산 영우(771˜853)선사도 폐불 때 재가자로 머리를 기르고 숨어 살았고, 암두 전활(828˜887)은 뱃사공 노릇을 했다. 바로 일상성의 선(禪)이 전개됐다. 법난에도 다음에 뭔가 회복될 여지가 있었다고 할까? 

‘불교말살’에 가까운 조선의 법난

조선불교는 중국의 몇 차례 법난과는 상황이 다르다. 법난이 아닌 불교 말살이었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시작해 500년간, 장기전도 이런 장기전이 없었다. 글로 표현하기도 안쓰러운 통한의 불교사다. 

성종 때 다시 억불정책이 시작됐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유학을 장려하여 사라진 집현전의 기능을 담당한 홍문관을 설치하고, 수많은 역사책을 편찬했으며, 세종 때부터 이어온 법전 <경국대전>이 완성됐다. 대전에 조선 사회의 기본 통치 방향과 이념을 제시했는데, 척불강화가 명시됐다. 도첩제를 실시해 출가를 금하고, 간경도감(1461년, 세종 때 경전을 번역하기 위해 설치한 기관)을 폐지했다. 연산군 때는 승려를 관노로 삼고, 토지를 몰수했으며, 승과도 폐지했다. 

중종 때에 이르러 철저한 유교적 개혁정치를 실시하면서 철저한 배불(排佛)이 최고조에 달했다. 선교 양종이라는 말조차 존재 자체가 희미했다. 이런데도 사찰과 승려는 늘었다. 계급의 가혹한 수탈로 파산한 민중이나 도적들, 부역 기피자들이 사찰로 들어간 것이다. 승려들은 사회적 지위를 완전히 상실하게 됐다. 

인종(명종의 형)이 후사가 없이 8개월 만에 타계하자, 12세의 명종이 왕위에 오른다.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명종의 모친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문정왕후가 정치를 할 때, 불교가 잠깐 활발히 살아났다. 문정왕후는 당시 수많은 인명들을 사사함으로 인해 큰 질책을 느꼈기 때문에 불교에 깊이 의지했던 것이다. 문정왕후가 허응당 보우를 기용함으로서 불교는 잠깐 부흥한다. 

문정왕후의 허응당 보우 기용 

허응당 보우(虛應堂 普雨, 1509˜1565)는 고향이나 출생지가 정확하지 않다. 법명은 보우, 법호는 나암(懶庵), 당호가 허응당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용문사에 머물다가 15세에 금강산 마하연으로 출가했다. 이곳에서 학문을 익혔고, 수행했다. 6년 동안 정진하고, 그 외 <주역>이나 유학까지 학문을 쌓았다. 보우도 출가해 보통 다른 승려들처럼 살았다. 불교의 암울한 시기에 어떤 특별한 명예나 이름을 구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폐불의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에서 출세 지향 길은 생각할 수조차 없었다. 

보우는 여러 지역에서 수행하다가 1548년(명종 3) 함흥 국계암을 떠나 호남 쪽으로 내려갔다. 보우는 당시 병이 나서 요양 차 회암사에 머물렀다. 이때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함경감사 정만종이 보우를 문정왕후에게 추천했다. 39세의 보우스님이 선종판사(禪宗判事)와 봉은사 주지를 맡고, 수진(守眞)은 교종판사와 봉선사 주지를 맡는다. 

스님이 봉은사 주지로 머무는 8년 동안, 제일 먼저 문정왕후로 하여금 <경국대전>의 금유생상사지법(禁儒生上寺之法)을 적용해 능침에 들어와 난동 부린 사람들 중에서 가장 과격했던 황언징을 처벌했다. 이 무렵부터 보우는 봉은사(선종)와 봉선사(교종)에 방을 붙여 유생들의 횡포를 막았다. 이때부터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1551년 42세의 보우는 명종에게 세 가지를 건의한다. 첫째는 선교양종을 부활시키고 승과를 부활시킬 것, 둘째는 승려 도첩 제도를 실시할 것, 셋째는 유생에게 빼앗긴 절이나 황폐한 절을 불사시킬 것 등이었다. 이때 승과에 응시해 급제한 인물이 서산 휴정과 사명 유정이다. 

1555년 9월 종단이 안정되어가자, 보우는 판사직과 봉은사 주지직을 사양하고 춘천 청평사로 물러났다. 마침 이때 서산 휴정을 불러 맡겼다. 보우는 청평사에서 5년을 머물렀다. 그런데 보우는 1560년 5년만에 다시 선종판사와 봉은사 주지를 맡는다. 아마도 보우가 다시 정치 일선에 나올 수밖에 없었던 여러 일들이 얽혀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565년 56세에 보우는 회암사 중창불사를 마치고 4월 무차대회를 열기로 했다.(명종의 아들인 순회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함) 그런데 행사 전날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그 비난의 화살이 온통 보우에게 쏟아졌다. 

왕후의 장례를 치른 직후 보우에게 향한 유생들의 배불상소가 쌓이기 시작했다. 결국 이이가 올린 ‘논요승보우소(論妖僧普雨疏)’를 계기로 보우는 승직을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유배됐다. 이후 스님은 유배지에서 제주목사 변협에 의해 장살(杖殺) 당해 입적했다. 이때 보우의 세납이 56세였다. <허응당집>에 실린 보우의 임종게는 이러하다. “허깨비가 허깨비 마을에 들어가 50여 년 간 미치광이 놀이를 하였네. 인간 영욕의 길을 다 놓고, 승려 탈을 벗고, 푸른 하늘에 오르네(幻人來入幻人鄕 五十餘年作戱狂 弄盡人間榮辱事 脫僧傀儡上蒼蒼).” 

보우의 저술로는 <허응당집> 상·하, <나암잡저(懶庵雜著)>, <수월도량몽중문답(水月道場夢中問答)>, <권념요록(勸念要錄)> 각 1권이 전한다. <허응당집>은 보우가 젊었을 때부터 입적 전까지의 시를 엮은 것이다. 보우가 입적한 다음 해에 선교양종 승과가 폐지됐다. 불교가 잠깐 햇빛을 본지 15년 만에 다시 검은 구름으로 뒤덮였지만, 보우는 조선후기로 불교 명맥을 잇게 한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본다. 

‘유불일치’ 주장…보우의 사상 

부도전의 ‘허응당 보우대사 봉은탑’.

첫째, 보우는 유불일치론(儒佛一致論)을 주장했다. 보우는 유학에도 매우 깊었다. 유교와 불교는 국가 사회에 나타난 면에서는 각기 다르지만 그 이치의 근본을 따지자면 서로 일치하여 다를 바가 없다고 주장했다. 똑같이 인간의 본심과 본성을 근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선사는 “고금에 불교와 유교는 공인된 가르침이라는 점과 그 구체적인 상통성으로서는 공자가 말한 상(常, 五常)과 불교의 권(權, 방편)은 손등과 손바닥과 같은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 “일(一)이란 1, 2, 3도 아니며 성실하여 허망하지 않은 것으로서 곧 하늘의 이치를 말한 것이다.… 정(正)이란 치우치지 않고, 사라지지 않으며 순수하여 섞임이 없는 것으로서 곧 사람의 마음을 말한다”면서 보우는 일심의 일과 대학의 성의정심(誠意正心)의 정을 합하여 ‘일정(一正)’이라는 설을 내세우면서 불교와 유교의 일치를 주장했다. 

둘째, 보우의 선사상을 보자. 선사는 마음을 진심과 허망심으로 나누고, 허망심이란 곧 진심의 묘한 작용에 의한 영상이라고 보았다. 그러면서 진심은 물이요, 허망심은 파도에 비유했다. 이에 한 생각이 일어나 일념에 집착하면 허망심이요, 일념에 집착이 없으면 진실심이라고 했다. “한 생각도 망심이 생기지 않음이 부처요, 이 경지가 묘각(妙覺)의 경지”라고 주장했다. 셋째, 선교일치(禪敎一致)적인 면이 드러나 있다. 선은 행(行)의 철학이며, 화엄은 이(理)의 철학이라고 하면서 선과 화엄의 융합을 주장했다. 

한국사와 불교사의 충돌 

영각 내 진영.

보우와 당대에 같은 인물이었던 서산 휴정은 보우를 일러 “천고에 둘도 없는 지인(至人, 聖人)”이라고 극찬했다. 그런데 그 반대의 평가가 있다. 보우는 입적 이후 400여 년 간 한국사에서 ‘요승’으로 기록돼 있다. 역사는 승자의 편이다. 몇 년 전, 어느 학자가 사학 잡지에 선사를 ‘괴승’으로 매도해 불교계가 벌컥 한 적이 있다. 괘심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떤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평가에 불교학자와 사학자가 다르게 본다. 한국사 기록을 바꿀 수 없으니, 앞으로도 보우를 매도하는 사학자가 나올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불교계도 옷매무새를 단단히 해야 할 것이다. 

[불교신문3467호/2019년3월2일자]

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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