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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에서 만나는 우리 역사] <21> 예천 용문사고려 조선 천년 영화 누린 ‘왕실가람’

삼국 재통일 주도권 다툴 때
왕건 편들어, 왕실 차원 지원

세종 正妃 태 봉안 사찰 지정
정조 때는 문효세자 태 봉안해
지방 유생 등 공격, 폐찰 면해

한 눈에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용문사는 대대적인 불사를 통해 대가람으로 일어섰다. 깊은 산에 잠긴 용문사의 아름다운 전경

3대 용문사(龍門寺)가 있다. 신라 마의태자의 은행나무로 유명한 경기도 양평 용문사, 윤장대로 유명한 경북 예천 용문사,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왜적과 맞섰던 경남 남해 용문사다. 이 중 양평 용문사와 예천 용문사는 여러 모로 닮았다. 조선 왕실과 밀접한 연관을 맺었다. 양평 용문사는 세종의 정비(正妃) 소헌왕후 원당으로 대웅보전을 새로 지어 왕후의 초상화를 모셨다. 예천 용문사에는 그녀의 태를 안장했다. 양평 용문사를 소헌왕후 원당으로 삼은 이들은 세종과 왕후의 아들들이다. 그래서 두 곳 모두 왕실 보호를 받고 사세를 유지했다.

양평과 예천 용문사 닮은 꼴

지난 10일 예천 용문사를 찾았다. 지금 용문사 가는 길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나아졌다. 중부 내륙고속도로 덕분에 서울도, 대구 어느 방향에서든 접근하기가 편하다. 국도 마저 4차선으로 넓게 확장해 오지를 찾아가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승용차를 이용할 때 얻는 이득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예전처럼 예천은 여전히 찾아가기 만만치 않다. 기차 버스 어느 편을 이용하든 하루에 다녀오기는 먼 가람이다.

소백산 자락이 흘러내린 곳에 터를 잡은 용문사는 조선시대 서거정(徐居正)이 “산 깊어 세속의 시끄러움 끊겼어라. 절에는 승탑이 고요하고 묵은 벽엔 불등(佛燈)이 타오르네. 외줄기 샘물 소리 가녀리고 첩첩한 산봉우리 달빛을 나누고 있네. 우두커니 앉아 깊이 돌이켜 보니 내 여기 있음조차 잊게 되누나.”고 노래한 것처럼 산속 깊이 고요하고 적막하다. ‘용문사중수기’(重修記)에 따르면 용문사는 신라 두운선사(杜雲禪師)가 창건했다. 

중수기는 “신라의 두운선사와 범일국사가 배를 타고 당나라에서 들어가 법을 전해 법을 전해 받고 돌아왔다. 이어 이 땅을 점쳐 가시와 덤불을 베어 평평하게 하고 처음에 초암을 짓고 오랫동안 정근하였다.”고 적었다. 두운선사는 두운동 태생으로 속성은 신씨로 알려져 있다. 당나라에 다녀온 뒤 신라 경문왕 10년 (870) 이 곳에 초막을 짓고 두운암이라는 암자를 지었다. 883년(헌강왕 9)에는 소백산 희방사(喜方寺)를 창건했다. 호랑이 목에 걸린 가시를 손을 넣어 빼주고 호랑이에게 잡힌 처녀를 겨우내 보살펴 봄에 집으로 돌려보냈다는 전설의 주인공이다.

왕건(王建)이 남쪽을 지나다가 두운의 명성을 듣고 찾아갔으며, 936년(태조 19)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절을 크게 중창했다. 절을 중창한 이유는 정치적 보은이다. 당시 궁예의 태봉, 견훤의 후백제가 기울어진 신라를 대신하여 천하통일을 놓고 겨룰 때다. 왕건은 후백제 정벌 중 이 절에 들렀는데 길목의 바위 위에 용이 앉아 있다가 왕건을 반겼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도 용문산으로 바뀌었다. 왕건이 문경 등 경북 일대 주민들로부터 환영 받은 것을 전설로 묘사한 것이다. 

왕건은 용문산 아래 영천 팔공산에서 견훤 군대로부터 기습 받아 간신히 목숨만 건지는 위기를 지역민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목숨을 건져 마침내 고려를 건국하고 천하를 통일했다. 개성을 기반으로 성장했지만 옛 신라였던 경북의 지원이 없었다면 그 보다 먼저 나라를 세우고 강했던 견훤에게 밀렸을지 모른다.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은 용문사를 크게 일으키고 고려 왕조 내내 밀접한 연관을 맺었다. 태조는 해마다 쌀 150석을 하사했다. 중수기는 이에대해 “우리 태조께서 정의의 깃발을 들어 세 나라를 통합할 뜻을 가지고 불쌍히 여겨 군사를 일으켰다. 산 아래에 이르러 스님의 이름을 듣고 골짜기에 들어와 찾아뵈었다. 수레를 암자 앞에 세워두고 머리 숙여 예를 표하며 비밀스런 약속을 하였다. 천하를 평정 하고 조서를 내려 재물을 모아 기와를 구워 모두 30칸間의 건물을 지어주고 아울러 주현(州縣)의 조세를 거두어 매년 150석(石)을 주어 공양하는 비용으로 삼게 하였다.”고 적었다.

윤장대 모습

무신의 난 이후 왕실과 더 밀접

용문사는 고려 무신의 난을 전후로 왕실과 접촉이 활발해진다. 무신의 난이 일어나기 얼마 전 의종은 1165년 중수를 명한다. 1170년 무신의 난이 일어난 다음해 명종은 절 문 밖 왼편 봉우리를 태자의 태(胎)를 묻는 곳으로 정하여 축성수법회(祝聖壽法會)를 열었다. 무신들에 의해 약해진 왕권을 불심(佛心)으로 극복하고자 했을 것이다. 1173년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이 난을 일으켰다. 이 때 용문사가 나서 대법회를 열었다. 3만 승려가 모였다. 이 때 불교사에서 중요한 불사가 이뤄진다. 대장전을 새로 짓고 윤장대 2좌를 설치했다. 

보물 제684호인 용문사 윤장대다. 원형이 훼손되지 않고 보존된 귀한 성보다. 축을 세워 천장에 고정시키고 축을 중심으로 보궁을 축소한 듯한 8각의 원당형 당우가 돌아가는 윤장대는 높이 4.2m, 둘레 3.15m이다. 윤장대 안에 경전을 넣어두고 바깥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 돌리면서 예불하는 전경신앙(轉經信仰)이다. 이 신앙은 대승불교 후기인 밀교 영향이다. 1179년 중수공사가 완공되었을 때 구산의 학승 500여명을 모아 50일간에 걸쳐 법회를 열었다. 대장전은 현재 용문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데 1984년 대화재 때 대장전을 구하기 위해 그 사이에 있던 단하각을 허물어 불길을 사로잡은 일화가 있다.

척불 숭유 정책을 폈던 조선시대에도 용문사는 왕실의 보호를 받았다. 용문사가 조선시대 왕실의 보호를 받았던 것은 소헌왕후의 태실이 안치되면서부터다. 세조는 이를 이유로 전지(傳旨)를 내려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에게 “용문사를 더욱 살펴 한층 완호(完護)하고 잡역(雜役)을 영구히 없애줄 것”을 명하였다. 세조의 전지 역시 훼손되지 않고 전해와 보물 제729호로 지정되어 있다. 

전문가들은 일반적으로 태실은 왕가에서 출생한 자녀의 태를 안치하는 것으로, 사가(私家)에서 출생한 왕비의 태실이 봉해지고 태실비가 세워진 것은 소헌왕후가 유일한 예라고 한다. 조선 후기인 정조 7년(1783)에는 문효세자의 태를 용문사에 안장했다. 이 때 현재의 이름인 소백산 용문사로 절 이름을 개칭했다. 용문사는 고려 명종 때 ‘용문사 창기사’로 개명했으나 조선 세종대왕의 비 소헌왕후의 태실을 봉안하고 ‘성불사 용문사’로 다시 고쳤고, 문효세자의 태실을 쓰고 다시 지금의 이름으로 변경했다.

정조 때 현재 이름 개명

광무 4년(1900) 5월에는 용문사 완문을 발급했다. 조선시대에 관부(官府)나 궁방(宮房) 에서 향교, 서원, 결사, 촌, 개인 등에게 발급한 공문서로, 어떤 사실의 확인, 증명, 허가, 명령 또는 권리나 특권을 인정하는 증서를 완문이라 한다. 완문이 사찰에 발급되는 경우는 사찰 주변에 태실이 봉안되거나 경내에 원당이 들어섰을 때이다. 용문사에는 소헌왕후와 문효세자의 태실이 봉안돼 있고 인빈궁의 원당이었다. 

완문에는 용문사가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洪陵,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를 합장한 무덤)의 향탄봉산(香炭封山)을 관리하는 사찰로 봉해졌다는 사실과 향탄 봉산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그 처리에 관한 지침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는 궁궐 증축 등에 쓰일 소나무 등 목재를 공급받기 위해 특정한 산림의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금산(禁山)으로 지정해 관리했다.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왕족과 권력자들이 이를 사유화하는 사례가 빈발하고, 일반 백성들도 몰래 묘를 쓰거나 도벌하는 일이 잦아져 관리차원에서 사찰 숲을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한 봉산(封山)으로 지정했다. 

목재의 용도에 따라 선재봉산(배를 만드는 데 사용할 목재 생산), 황장봉산(관을 짜거나 궁궐 건축용 목재), 율목봉산(신주 위패용 목재), 향탄봉산(숯을 생산하기 위한 목재), 송화봉산(송홧가루를 얻기 위한 목재)으로 세분화해 관리했다. 예천 용문사는 남해 용문사, 송광사, 해인사 등과 함께 향탄봉산으로 지정됐다. 용문사 인근 숲은 홍릉에 경비를 조달하기 위한 숯을 만들 목적으로 조정이 출입을 통제하거나 도벌을 금지한 것이다.

예천 용문사는 고려 조선 1천여 년 간 왕실의 적극적인 보호를 받았다. 조선 억불시대에도 왕실은 불교를 믿고 사찰을 원당으로 삼아 잡역을 면하거나 제사답으로 토지를 하사해 오늘날 사찰이 방대한 규모의 토지를 갖게 됐다. 그러한 역사를 감안해도 예천 용문사가 받은 대접은 특별하다. 용문사가 그토록 왕실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고 번영을 누린 이유는 교통의 중심지라는 지리적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예로부터 사찰은 교통 요지에 자리했다. 때로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에 세우기도 했다. 양평 용문사는 관동(關東)과 서울을 오가는 길목에 있다. 예천 용문사는 영남에서 한강과 서울로 들어서는 길목이다. 조선시대 한반도 동쪽 중심축은 동래 상주 충주 여주로 이어지는 낙동강 벨트였다. 상주 문경과 마주하는 예천은 영남에서 중원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었다. 

대로에서 약간 벗어나 소백산 자락에 위치한 용문사는 그런 점에서 군사적으로도 중요했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승병 지휘소가 용문사에 설치됐던 것으로도 이를 알 수 있다. 김보당이 난을 일으켰을 때 예천은 반란군의 근거지였던 경주에서 개성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용문사 중수기

근대화와 함께 쇠락

두 번의 왕조에 걸쳐 1천 여 년 번창했던 예천 용문사는 근대화와 함께 오지(奧地) 사찰로 위상이 추락했다. 철도와 고속도로는 과거 한적한 시골을 새로운 도시로 만들었다. 대신 부산 대구 대전 수원 등 새로운 도시를 만들었다. 크고 오래된 고찰이 없었지만 새로운 가람을 탄생시켰다. 사찰도 사람과 함께 흥하거나 쇠한다. 

용문사는 현 주지스님의 20여년에 걸친 노력으로 과거의 영화를 새롭게 일으켰다. 전국 말사 가운데 가장 많은 문화재를 소유한 사찰 답게 말사로서는 드물게 240여 평 규모의 성보박물관도 지었다. 고속도로가 주변을 지나고 인근에 경북도청이 들어서는, 사람의 잦은 발걸음과 함께 용문사도 다시 일어난 것이다. 용문사는 시대의 변화와 사람의 삶과 사찰의 운명이 함께 한다는 당연하지만 자주 망각하는 현실을 말해준다.

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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