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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스님 ‘심우장’ 사적 지정 예고문화재청 “항일독립 문화유산 가치 충분”
사적으로 지정예고된 심우장. 불교신문 자료사진

일제강점기 불교혁신과 독립운동에 헌신한 만해스님이 여생을 보낸 심우장이 사적이 된다.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2월12일 항일독립 문화유산인 ‘만해 한용운 심우장’을 사적 지정예고했다.

서울시 성북구 성북동 222-1외 2필지에 자리한 ‘심우장’은 만해스님이 1933년에 건립해 입적할 때까지 거주했다. 건물 1동으로 지정 면적은 88.6㎡, 보호구역은 386.4㎡이다. 심우장은 심우도(십우도)의 ‘심우(尋牛)’에서 유래한 것으로 ‘잃어버린 나를 찾자’라는 의미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나타낸다. 심우장을 지을 때 만해스님이 집의 좌향(坐向)을 총독부 방향을 피해 동북방향으로 잡았다. 주춧돌을 총독부 반대 방향으로 해서 지었다. 만해스님의 독립의지를 엿볼 수 있다.

심우장에 머물 당시 만해스님은 일제의 핍박으로 생활이 곤궁했다. <조선일보>와 <조선중앙일보> 등에 투고한 원고료로 생활을 겨우 이어갔지만 노년에는 그 마저 중단했다.겨울에도 불을 넉넉히 넣지 못해 ‘냉골’이 된 방에서 지내야 했고, 고구마로 끼니를 이어야 했다. 하지만 일신의 편의를 위해 변절하지 않았다. 어느 날 집에 없을 때 친일로 돌아선 최린(崔麟)이 찾아와 딸 영숙(英淑)에게 100원(圓)을 건네고 갔다. 집에 돌아와 이 사실을 안 만해스님은 곧바로 사람을 보내 돈을 돌려 주었다. 비록 생활이 어려웠지만 변절자의 돈은 받지 않았다.

일제가 만든 중추원(中樞院) 참의(參議)를 맡은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을 우연히 만났다. 인사를 건네며 악수를 청한 최남선에게 만해스님은 “당신은 누구시오”라고 반문했다. “육당이요”라는 답변에 만해스님은 “뭐라구, 육당? 육당은 내가 장례를 치른지 오래된 고인(故人)이요”라고 면박을 주었다. 조국을 배신한 친일파는 상종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일화이다.

하지만 지조를 지킨 독립투사는 끝까지 외면하지 않았다. 심우장에 머물 당시 서로군정서 참모장, 대한통의부 위원장, 정의부 참모장을 지내며 독립운동을 하다 연행돼 국내로 압송됐다 순국(殉國)한 김동삼(金東三)의 장례를 손수 치렀다. 1937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숨진 채 나왔지만 누구도 시신 수습을 엄두내지 못할 때 만해스님은 일제의 눈치를 보지 않고 직접 장례를 엄수한 일화는 유명하다.

만해스님은 노년에 발병한 뇌졸중과 영양실조로 육체적 고통을 겪었지만, 지조는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스님은 해방을 1년 여 앞둔 1944년 6월29일 새벽 마당을 청소하다 쓰러진 뒤 심우장에서 입적했다. 가족이나 지인에게 유언도 남기지 못했지만, 스님이 평생 걸어온 삶 자체가 유훈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다.

문화재청은 “(심우장은) 전반적으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면서 “(만해스님의) 독립운동 활동과 애국지사들과의 교류 등에 대한 흔적이 남아 있다는 측면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하다”고 지정사유를 밝혔다.

심우장이 사적으로 지정되면 지난 2017년 10월 등록문화재 제519호로 등록된 ‘구리 한용운 묘소’와 함께 항일독립운동 정신을 기릴 수 있는 뜻 깊은 장소가 될 것으로 보인다.

‘만해 한용운 심우장’은 30일간의 예고 기간에 의견을 수렴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최종 지정 등록될 예정이다.

 

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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