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한 몸이 무슨 특별한 일이나 고단한 사연이 별로 없겠지만, 절을 옮기거나 은사와 상좌 사이의 일은 좀 유별나기도 하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고 했던가, 소임을 보던 절에서 소임을 내려놓고 보따리를 챙겨서 나왔을 때, 도반은 불쑥 ‘시간도 많은데 와서 노가다좀 해. 밥은 먹여줄 테니’하며 위로랍시고 일부터 시킬 궁리를 한다. 10년도 넘게 도반 행각을 해왔으니 그간의 사정쯤은 말 안 해도 다 안다는 눈치다.

반면 다른 이들에게 이런 사건을 이야기하자면 육하원칙에 따라서 꼬박꼬박 보고를 해야 겨우 수긍을 한다. 여간 고단한 게 아니다. 더구나 꼬치꼬치 캐물어가며 그 사건에 대해 토를 단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되며, 이러이러 해야 하며 또는 그 좋은 자리를 차버리다니 멍청하다는 둥 위로랍시고 한다는 말들이 도리어 부아를 치밀게 한다. 안 그래도 서운하고 울고 싶은 마음인데 뺨을 때리는 격이니 자칫 잘못하면 싸움이라도 벌어진 판이다. 그러면 나는 딱부러지게 ‘싫어서 나왔고 좋아서 여기 왔어’하고 말을 맺어버린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아예 없다.

이 글을 쓰려고 사전에서 ‘친구’를 찾아봤을 때, 한자로는 ‘親舊’를 쓴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이제까지 ‘親口’로 쓰는 줄 알았다. 뜻풀이도 전자는 ‘가깝게 오래 사귄 사람’, 후자는 ‘숭상하고 존경하는 대상에 대하여 경의와 복종을 표하기 위해 입을 맞춤’이라고 나온다. 그러나 내 취향에는 뜻풀이는 전자라도 한자로는 親口가 더 어울린다.

연인이나 부부만큼 친한 입(口)은 없겠지만, 같이 밥을 나누어먹고 격의 없이 말을 나눌 수 있는 사이라면 분명 그들은 친구 사이다. 육하원칙이 배제되어도 이야기가 성립되고 희망과 긍정과 건설을 도모할 수 있다면 더 친한 친구 사이이다. 뭐, 그런 친구가 셋만 있으면 인생 성공이라고 하는데, 친구 따라 강남 간다고 했던가. 

내일은 점심(點心)이나 같이 하자고 도반에게 전화나 해야겠다. 

[불교신문3461호/2019년2월2일자] 
 

만우스님 논설위원·시인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