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고통의 성스러운 진리라고 했을까?

인생은 고통과 고통에서 쉬거나 
다른 쾌락으로 잊으려는 몸부림
마음 움직임 멈추고 들여다봐야

고성제는 초기불교를 공부하거나 대승불교를 공부하거나 간에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왜냐하면 초기불교는 열반이 목표이니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열반을 추구하려는 의지가 생길 리가 없기 때문이고, 대승불교의 근본은 보살행이고, 보살행이란 중생에 대한 연민심을 바탕으로 하며, 연민심은 중생의 다양한 고통을 이해하는 데서 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성제는 불교를 알기 위한 첫 시발점이고 이 부분을 잘 이해해야만 바르고 건강한 불교관이 형성 되어질 것이다.

일반적으로 고통을 분류해보면 죄를 짓고 받는 과보로써의 열악한 환경의 고통, 양심을 지키며 진실하게 사는 과정에서 고단한 삶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이 있다. 또 무상한 대상에 집착을 하고, 그 대상이 변하기 때문에 얻어지는 생명(존재)들의 근원적인 고통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죄의 과보로써의 고통, 예를 들어 불구, 사고 등은 죄를 선으로 뒤집어야만 하고, 대부분 이 생이 아니고 다음 생에 고통이 사라진다. 양심을 지키며 살다 얻는 고단한 삶은 그 대가가 금생의 후반과 다음 생에서야 거둬진다. 무상 때문에 얻어지는 존재의 고통은 무상한 존재들에 대한 집착을 모두 소멸해야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실존하는 인간은 다양한 각도의 고통 속에 겹겹이 에워 쌓여 있는 셈이다. 

병과 병의 원인을 아무나 쉽게 알 수는 없다. 의대 정규과정을 나오고 많은 환자를 만나 숙련된 후에야 환자를 보면 병과 병의 원인을 알 수가 있는 것처럼, 고통과 고통의 원인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충분히 마음을 단련해야만 알 수가 있다. 흔들리지 않고 여러 욕망과 잡념과 의도에 물들지 않은 마음, 청정하고 순수한 마음이 그와 같은 냉연한 사실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먼저 몸이 번거로운 일에 연루되지 않아야만 하고, 필요한 말만하고 불필요하거나 잡스러운 언어를 삼가 하여 몸의 에너지를 보존하고 마음을 단순화 하여야 한다(戒). 그 후에 얻은 것에 만족함을 알아야 한다. 만족함을 알지 않으면 마음은 감각기관의 대상에 유령처럼 떠돌아다니기 때문에, 스스로의 마음의 우물을 바라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감각대상에서 마음이 쉬어져서 내 마음의 우물에 눈을 돌렸을 때, 우리는 끊임없이 발생하는 불편함과 서러움,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욕망, 욕망 등에 에너지를 많이 써서 오는 피곤함과 수많은 고통 때문에 오는 좌절감, 3계의 대상에서 무언가 막연히 바라는 마음 등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것들이 흙탕물을 튀겨서 밑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 수가 없는 칠흑 같은 무지가 있음을 볼 수 있다.[5장(五障)]

이러한 것들이 마음을 뒤덮고 있기 때문에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다. 초보자는 이러한 것들의 근원을 쉽게 보거나 다스릴 수 없다. 그러므로 짐짓 마음을 한곳에 집중하거나, 호흡에 집중하여서 오염된 마음을 안정시켜야만 한다. 그리고 차제로 마음의 움직임을 멈춰가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5장이라는 마음의 소용돌이를 멈추어야만 나와 사물의 실체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에 파수꾼을 세워서 악한 행위와 잡스러운 욕망을 하나하나 이 잡듯이 잡아내어 참회한 후에 행복감을 느끼고, 연후에 악과 욕망을 다스리기 위해 사용했던 분별심을 쉬어버린 뒤에 오는 행복감과(2선), 몸의 고통과 즐거움을 떠난 후에 얻어지는 정신적 행복감을 누린 후에 (3선), 몸과 마음의 행복감도 객관화하여 오직 앎이 있고 대상과 마음이 분리된 거울같이 청정한 마음을 성취한다(4선).

마음이 이정도의 평정을 얻게 되면, 이 가벼운 마음으로 몸과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올라 갈 수 있게 된다(의성신).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가고(신족통), 듣고 싶으면 뜻대로 거리에 관계없이 듣고(천이통), 중생들의 의도를 마음을 기울이면 알 수 있게 된다(타심통). 이처럼 물들지 않고 자재로운 마음으로 스스로와 타인의 삶을 관찰해보면 인생은 다름 아닌 고통과 고통에 잠시 휴식을 주려고 하거나, 다른 쾌락으로 고통을 잊게 하려는 몸부림인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들 고통에는 원인적 행위가 있고 그것의 열매가 고통임을 알게 된다.(숙명통, 천안통). 이렇게 의성신이 발생한 후 5신통을 얻어야 알게 되는 것이 존재의 고통이다. 그러므로 고성제라고 하는 것이다. 

수행을 하지 않은 사람도 죄를 지은 후 그 과보를 경험하거나, 게으른 과보의 고통은 경험 또는 사유를 통하여 알게 된다. 그러나 무상한 대상에 집착을 하고, 그 대상이 변하기 때문에 얻어지는 존재의 근원적인 고통은, 천안과 숙명통을 얻은 후에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의 인과관계를 봄으로써 직접적인 경험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성스러운 경지에서 이해할 수 있는 고통이므로 고통의 성스러운 진리라고 한다.(사문과경을 중심으로)

[불교신문3461호/2019년2월2일자] 
 

등현스님 고운사 화엄승가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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